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15화 (414/925)

63. 감시 (2)

저녁, 유상훈의 집.

유상훈은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농구 중계 방송을 보고 있었다.

4인 가족 중 가장 어린 유상훈은 채널 선택권이 없어 평소엔 거실에 있는 초고화질 홀로그램으로 농구 시합을 보기 어려웠는데, 최근엔 이렇게 거실을 홀로 차지하는 날이 늘어났다.

처음엔 이런 상황을 환영했다.

방에 틀어박혀 학교에서 받은 디바이스로 농구 시합을 보는 건 그리 성에 차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런 날이 점점 길어지니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오늘도 늦네.’

맞벌이 중인 유상훈의 부모님은 해외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긴 했다.

그러나 유상희는 유상훈의 귀가 시간에 맞추거나 먼저 돌아왔는데, 어째 요즘은 계속 늦었다.

창밖을 보니 인공조명이 비추는 곳을 제외하면 온통 컴컴했다.

11월이 되니 날이 서늘해지고 해도 일찍 져 금방 주변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그렇게 늦은 시각이 아닌데도 한밤중 같았다.

농구 중계가 끝나고, 시합을 분석하는 해설 방송이 끝난 후에도 유상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유상훈은 보지도 않을 뉴스를 틀어 놓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삐잇.

주요 뉴스가 전부 끝나고, 날씨 예보도 거의 끝나갈 무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상희가 귀가했다.

유상희는 학교를 마치고 사복으로 갈아입을 여유도 없었는지 교복 차림이었다.

‘3학년은 학생회 활동도 안 하고, 수능이 얼마 안 남아서 단축 수업도 할 텐데. 그동안 뭐 한 거지.’

유상희는 3학년 초, 진로 조사를 할 당시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는지 수능 원서 접수도 마쳤고, 시험을 치를 준비도 착실하게 하는 중이었다.

밖에서 수능 공부를 하고 왔을 가능성도 생각해 봤지만 생각을 바꿨다.

유상희는 툭하면 우연을 가장해 등장하는 도원우와 마주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보통 집에서 공부하기 때문이었다.

“다녀왔어.”

“……왔냐.”

유상훈에게 인사하는 유상희의 목소리에서 피로감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유상희는 신발을 벗고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 했다.

평소라면 유상훈에게 말이 짧다며 누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고 한마디 하고,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과자를 먹는 걸 두고 잔소리를 했을 텐데.

유상희는 지금 유상훈과 입씨름할 기력이 없는 듯했다.

“야, 잠깐만.”

유상훈은 저도 모르게 유상희를 불러 세웠다.

유상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힘없이 말했다.

“누나한테 ‘야’가 뭐야…… 왜?”

그러게, 내가 왜 불러 세웠지.

유상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소리를 정직하게 입에 담으면 수도(手刀)가 날아올 것 같았다.

유상훈은 잔머리를 굴렸다.

유상훈과 유상희의 공통된 화젯거리를 떠올리다 문득 얼마 전에 생일을 맞이한 친구, 조의신이 생각났다.

주말에 기숙사에 있으면 얼굴도 보고 식사나 하면서 축하 인사를 하려 했는데, 조의신이 자리를 비운 통에 디바이스 메시지를 보내는 선에서 그쳤다.

유상희도 조의신의 얼굴을 보고 축하 인사를 한 것 같지 않으니, 지금 이야기를 꺼내면 좋은 변명거리가 될 것 같았다.

“어제 조의신 생일이었는데, 선물은 줬냐?”

참 궁색한 변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핑계는 그럴싸했다.

조의신의 이름을 듣자 유상희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조의신이 예전에 집에 놀러 왔을 때 유상희가 물어봐서 유상훈도 조의신의 생일을 알게 된 건데.

정작 생일을 물어봤던 본인은 조의신의 생일에 관해 전혀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맞다, 의신이 생일이었는데…… 어쩌면 좋아. 깜빡했어.”

“…….”

“의신이한테 지금이라도 연락해야 할까. 아니, 시간이 늦었으니까 내일 직접 보고 축하 인사를 하는 게 좋겠지…….”

유상희는 당혹스러워하며 디바이스의 홀로그램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평소에 유상희가 뭔가를 까먹었다면 벌써 뇌가 늙어서 그런 게 아니냐고 핀잔을 줬을 텐데.

피곤해하는 유상희를 보니 그런 말이 쑥 들어갔다.

“걔는 그런 거 신경 안 쓸걸. 그냥 아무 때나 축하한다고 말해.”

“그래, 의신이는 그런 걸로 서운해할 애가 아니지…….”

조의신에 관한 화제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다시 대화가 뚝 끊겼다.

유상훈은 다시 머리를 굴려 봤지만 유상희에게 뭐라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으면 될 것을 좀처럼 살가운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유상훈이 말하는 걸 포기하고 과자나 집어 먹으려 할 때, 유상희가 유상훈을 보며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상훈아, 혹시…….”

그러나 유상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유상훈은 유상희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갑갑한 기분 탓에 10초를 버티지 못하고 되물었다.

“할 말 있으면 해라.”

“아니야.”

“아,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왜 말을 하다 마냐고.”

유상희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신 휙 몸을 돌려 자신의 방 쪽으로 향했다.

유상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상희를 불렀다.

“야, 유상희!”

그러나 유상희는 끝까지 유상훈의 버릇 없는 태도를 지적하지 않고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유상훈은 과자를 먹으려 했던 것도 잊고 생각에 잠겼다.

‘뭔가 이상해…….’

유상희는 과격해 보일 정도로 말을 솔직히 하는 편이다.

저런 식으로 할 말을 안 하는 건 유상희답지 않았다.

‘아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나?’

생각을 거듭하던 중, 유상희가 비슷한 태도를 보이던 때가 떠올랐다.

유상훈의 어린 시절.

정확히 말하면 투병 시절에 유상희가 잠시 이상하게 굴던 때가 있었다.

‘……그때 이능 센터로 데려갈 때 저러지 않았나.’

몸을 가누기도 어려워 휠체어 신세를 지던 때였다.

유상희는 부모님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유상훈이 탄 휠체어를 밀고 이능 센터로 향했다.

‘갔던 건 기억 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 TC 연구소 로고를 본 것 같기도 한데.’

이능 센터를 방문한 다음 날, 유상훈은 심하게 앓았다.

아픈 유상훈을 밖으로 끌고 간 일로 유상희는 부모님에게 심하게 혼났고, 유상훈은 자기는 괜찮다는 말만 몇 번이나 반복했다.

다행히 꾸중은 금방 끝났다.

유상훈이 갑자기 이능을 각성하고, 유상훈을 괴롭히던 기병이 씻은 듯이 사라졌으니까.

‘……그때 일과 관련이 있나?’

아직 제대로 된 근거는 없었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유상훈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날 유상희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실려 갔던 것처럼, 그러다 뜬금없이 이능을 각성해 상황이 끝나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못 한 채 무기력하게 상황을 흘려보내기는 싫었다.

‘TC 연구소와 연관된 일이라면 내 힘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겠지…….’

유상훈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자신은 한국 최고 명문 이능 특목고에 소속된 플레이어이긴 했지만, 거기에서 중간 정도 가는 학생일 뿐이었다.

은광고가 자랑하는 최상위권 플레이어인 유상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기에 유상훈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TC 연구소니까, 그 새끼한테 말해야 하나?’

TC라는 단어에 떠오른 건, 은광고의 전 학생회장이자 3학년 단독 수석, TC 그룹의 자제인 도원우였다.

유상희와 관련된 일이면 도원우가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상훈은 금방 도원우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 새끼한테 빚을 지긴 싫다. 또 최근엔 시원치 않게 굴고 있고…….’

사관학교와의 교류전을 기점으로 도원우가 추하게 굴지 않는다는 건, 가까운 지인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도원우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도 마음에 걸렸고, 빚을 지기도 싫다는 생각에 그를 도움을 청할 대상에서 배제했다.

덤으로 TC와 관련된 도시후도 떠오르긴 했지만, TC 그룹 내에서 도시후의 입지가 별로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공연히 도시후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

‘담임 선생님한테 말해 볼까…….’

유상훈이 속한 1학년 1반의 담임 김신록.

김신록은 공정하고 성실하며 유능한 담임 교사다.

김신록이 반 아이들을 상대로 묘하게 선을 긋는 것 같아 서운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김신록은 반 아이들이 곤경에 처하거나 상담을 하러 가면 성심성의껏 응해 평판이 좋았고, 유상훈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야, 담임도 오늘 좀 멍해 보이는 걸 보니 뭔 일이 있는 것 같았어.’

김신록은 성국언과 관련한 일로 고민이 많았다.

초등학생으로 위장한 호족의 수장과 함께 성국언을 만나야 해서 더더욱 그랬다.

유상훈은 그런 자세한 사정까진 몰랐지만, 어쨌든 담임의 정신 상태가 별로라는 건 잘 알았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후보를 제외하고 나니, 단 한 사람만이 남았다.

제일 먼저 떠올랐지만, 워낙 신세만 진 상대라 선뜻 도움을 청할 생각이 들지 못했던 대상이었다.

‘조의신은 바쁘지 않나…… 상담해도 되나…….’

유상훈은 조의신이 뒤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1학기 초, 유상훈의 반에 있던 부정 입학자를 처리한 것.

키모폴레이아 호에서 이계 공략에 참가한 플레이어 명단에 없던 대신 무언가를 한 것.

여름방학 청소년 수련회 당시 터진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뭔가 한 것.

사관학교와 교류전을 할 당시 도시후나 장남욱을 대신해 뭔가 한 것.

유상훈은 그 외에도 수상한 사건 몇 개에 조의신이 관련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1학년 0반 애들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걸 보니 조의신이 뭔가 했겠지.’

조의신이 1학년 0반의 아이들의 등교를 위해 뭔가를 했을 거라는 것도 확신했다.

본인이 그걸 드러내려 하지 않아 굳이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어떡할까.’

유상훈은 고민하다가 장남욱과 조의신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을 열었다.

메시지방에는 장남욱의 구구절절한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올해 가을야구에서 주오 드래곤즈는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주오 드래곤즈는 최근 16년 동안 준우승만 11번 하게 된 셈인데, 저 상황을 겪고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건 팬이 아니라 가짜 팬이거나 생불이었다.

주오 드래곤즈 골수팬 장남욱은 수십 수백 줄의 메시지로 터진 멘탈을 인증하고 있었다.

[장남욱] 페넌트레이스에서 가장 우수한 기록을 남긴 마무리 투수가 부상으로 나오지 못한 것도 커. 하지만 한국시리즈가 7차전까지 가면서 주오 드래곤즈 선수들의 체력이나 정신력이 흔들린 게 패배의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해. 팬으로서 그런 점을 지지해 줬어야 했는데, 내 응원이 부족했나 봐.

장남욱은 비슷한 말을 계속 반복했다.

유상훈은 장남욱의 메시지를 속독으로 휙휙 읽고 가끔 ‘ㅎ’, ‘ㅋ’, ‘ㅇ’을 찍어 가며 대답했다.

조의신은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는지, ‘읽지 않음’ 표시가 옆에 계속 남아 있었다.

‘바쁘나…….’

유상훈이 그만 메시지창을 덮으려 했을 때였다.

기나긴 문장으로 가득한 장남욱의 메시지창 옆에 붙어 있던 숫자 하나가 사라졌다.

조의신이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표시였다.

‘지금 디바이스를 확인하고 있나 보네.’

유상훈은 잠깐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야, 조의신. 난데…… 내일 잠깐 얼굴 좀 보자.”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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