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16화 (415/925)

63. 감시 (3)

전화를 받으니 곧바로 유상훈이 내일 얼굴을 보자고 말했다.

하필 TC 연구소와 유상희에 관해 이야기한 직후, 유상훈이 만나자고 말하니 뭔가 마음에 걸렸다.

또 이 시간에 전화까지 한 것도 그랬다.

‘별일 아니라면 문자로 ‘내일 시간 ㅇ?’이라고 보내고 끝낼 텐데.’

유상훈이 평소 연락을 어떻게 하는지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 수 있다.

무슨 일로, 왜 만나자는 건지 조금도 알 수 없었지만 바로 승낙했다.

“그래, 언제 볼래?”

“부 활동 끝나고 보자.”

유상훈은 농구부, 나는 신문부 활동이 있으니 부 활동을 모두 마치고 저녁에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대화는 금방 끝나고 유상훈은 ‘내일 보자.’라는 말을 남긴 후 전화를 끊었다.

통화 종료를 알리는 홀로그램 뒤로 장남욱의 긴 메시지가 계속 올라오는 게 보였다.

슬슬 바른 생활을 하는 장남욱은 이만 잘 시간인데 잠이 안 올 정도로 속이 쓰린가 보다.

‘다음에 만나면 위로해 줘야겠네.’

주오 드래곤즈가 또 우승을 놓쳤으니 주오 그룹과 연이 있는 주수혁과 오혜지도 아쉬워할 거다.

특히 주수혁은 야구장에도 얼굴을 자주 보였으니 티는 안 내도 많이 힘들어할 것 같았다.

주오 드래곤즈의 준우승을 두고 신경 써 줘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머릿속에 정리한 후, 이번엔 유상훈과의 약속에 관해 생각했다.

‘유상희와 TC 연구소에 관한 일일 가능성이 커.’

유상훈이 내가 상상도 못 한 이유로 나를 불러냈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차피 그런 경우엔 미리 대비를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니 유상희와 TC 연구소 건에 한정해 사고를 진행했다.

‘유상훈이 어디까지 이야기해 줄지 모르겠는데…… 허락해 준다면 유상훈의 병이 나은 과정을 듣고 싶은데.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려나.’

유상훈이 앓던 기병.

기적처럼 각성한 이능.

내가 알고 있는 유상희, 유상훈 남매와 TC 연구소. 그리고 TC 그룹에 관련된 사람들.

머릿속에 체스판을 그려 체스 피스를 배열하듯 생각을 정리했다.

쌓인 피로 탓에 눈이 감기려 했지만, 사고를 이어 갔다.

그때, 품에서 솜뭉치 같은 천사가 꿈틀거렸다.

끄응…….

온기가 느껴진 쪽을 보니 올무가 나를 올려다보며 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천사는 쓰다듬어 달라고 몸을 작게 움직였다.

나는 즉각 손을 뻗어 올무를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계속 기다려 주다니, 이렇게 착할 수가!”

또 올무를 혼자 내버려 두고 기다리게 한 죄 많은 나를, 관대한 천사가 용서해 줬다.

착하게 기다린 올무를 계속 쓰다듬으니 졸음이 쏟아졌다.

사고를 하려 할 때마다 올무가 몸을 손바닥에 밀착시켜서 정신이 쑥 빠져나갔다.

결국 저항을 그만뒀다.

‘그래…… 내일 유상훈 이야기를 듣고 호랑이들이랑 얘기를 한 다음에 다시 추리를 계속하면…….’

사고는 금방 끊기고 나는 잠에 빠졌다.

꿈 없이 푹 자고 맞이한 아침.

오늘도 호랑이 저택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별채 내에 배정된 방에 있는 옷장이 의류 관리기도 겸하는 덕에 어제 넣어 둔 교복이 말끔한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다.

‘호랑이 저택에 별채가 한두 개가 아닌데, 모든 별채의 게스트룸에 다 이 정도 수준의 시설이 있나?’

호랑이 저택에 손님이 그렇게 많이 오는 것도 아닌데.

아니, 잘 생각해 보니 평소 황지호가 돈 쓰는 꼴을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몸단장을 마치고 문을 열고 나섰을 때, 나는 바로 호랑이와 눈이 마주쳤다.

백호군이 문 근처에 서 있었다.

“……안녕.”

왕왕!

백호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올무의 인사를 받아 줬다.

인사를 한 백호군은 나를 지나쳐 1층으로 향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백호군은 어젯밤에 인사를 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혹시 산령을 수색하느라 밤을 지새운 걸까?

다음엔 나도 산령 수색에 협력해 백호군을 좀 쉬게 해 줘야겠다.

“좋은 아침이에요, 의신이 형.”

“잘 잤나? 안색이 한결 좋아 보이는군.”

“……안녕하십니까.”

별채의 밑층으로 내려 가니 이른 시각인데도 호랑이들이 모여 있었다.

방금 마주친 백호군 외에도 은호, 황지호, 적호가 있었다.

나름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저들에 비해선 한참 늦게 일어났나 보다.

다들 나이가 있어서 아침잠이 없는 걸까?

은호는 다기를 정리하며 말했다.

“의신이 형도 오셨으니 일단 아침 식사를 하죠.”

“하하하하! 곧바로 준비하지.”

그 말에 유독 지쳐 보이던 적호가 안심한 듯한 얼굴을 했다.

적호는 기꺼워하는 얼굴로 나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아침부터 저강렵의 상보심금파에 다친 건으로 잔소리를 들었구나.’

적호는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그런지 제 몸보다 호족, 특히 아들 김신록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적호에게 적극적으로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황지호는 적호와 한 계약이 있어서 한발 물러나 있는 상황이고 백호군은 과묵하니까.

그렇다고 막 화해한 아들인 김신록이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적호에게 한 소리 한다면 은호가 적격일 거다.

“적호 님, 의신이 형이 등교하면 다시 대화하죠.”

“……알겠습니다.”

적호의 얼굴에서 안심과 안도감이 사라졌다.

황지호가 아침으로 선보인 꼬막 얼갈이배추 된장국에는 11월 제철 재료가 듬뿍 들어가 맛이 훌륭했는데, 식사 내내 적호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은호는 부드러운 어조로 적호를 나무랐다.

“적호 님, 아침부터 그런 표정이라니요. 그간 적호 님의 몸을 험하게 다루셔서 건강이 많이 상했나 봐요.”

“흠, 영약이라도 먹이는 게 좋을까. 마침 향록과 이야기할 것도 있으니 부르는 게 좋겠군.”

“저는 괜찮습니다……!”

순식간에 적호의 영약을 짓는 날짜가 확정되었다.

적호는 표정 관리를 하며 아침 식사를 마쳤지만, 이미 늦었다.

적호에 이어 나도 덤터기를 썼다.

“조의신, 너도 조만간 향록을 다시 만나야 할 거다.”

“황호 님이 당연히 의신이 형 몫도 챙겨 주시리라 믿었어요.”

“하하하하! 이 몸이 어찌 은인을 소홀히 대하겠느냐.”

황지호와 은호는 아침부터 아주 죽이 잘 맞았다.

영약의 위협에 정신이 멍해졌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TC 연구소 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오늘 저녁은 유상훈과 먹을 예정이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듣고 다음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언제 약속을 잡았지? 빠르군.”

“유상훈이 먼저 연락했어.”

“유상희의 동생과 의신이 형은 친분이 있었죠…….”

결론은 금방 나왔다.

이번 일에 관한 논의는 유상훈의 이야기를 듣고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황지호와 함께 등굣길에 나섰다.

바람이 차 에어 보드 대신 에어 셔틀을 타고 1학년 0반 교실에 도착했을 때.

“의신아, 지호야, 큰일 났어요!”

교실 문을 열기 무섭게 사월세음이 이쪽으로 날아오듯 뛰어왔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큰일이 있으면 당연히 들어 줘야지.

내가 입을 여기 전에 사월세음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교실문이 닫히는 걸 확인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인가?

“왜, 무슨 일 있었어?”

사월세음의 답변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한이랑 미로가 싸울 거래요!”

한이랑 독고미로가 싸운다고?

예상하지 못했던 조합에 잠시 사고가 정지되었다.

한이를 신경 쓰고 있는 황지호가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그쪽을 보니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노친네는 이 상황의 해결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다시 고개를 사월세음 쪽으로 돌렸다.

“음…… 세음아, 그렇게 말하면 애들이 오해할 것 같아!”

내가 질문을 더 하기 전에 김유리가 설명을 시작했다.

김유리의 뒤를 보니 반 아이들이 거의 다 와 있었는데, 표정을 보니 다들 그 상황에 대해 아는 듯했다.

“어제 우리가 루이스 페레나, 드루이디스라고 자기소개를 한 애들을 기다리느라 남았었잖아.”

김유리는 두 관종이 자처한 대로 불러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냥 관종1, 2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는데 꼬박꼬박 루이스 페레나, 드루이디스라고 불러 주는 게 과연 김유리다웠다.

“해산하기 전에 한이가 미로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잠깐 불러냈거든. 그래서 둘이 자리를 비웠는데 좀처럼 돌아오질 않아서 찾으러 갔어. 미로한테 또 나쁜 사람이 꼬였나 해서 다들 걱정했으니까…….”

김유리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반 아이들이 독고미로와 한이를 찾은 곳은 어느 빈 교실이었다.

두 사람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언성을 높였다기엔 한이가 일방적으로 추궁하고 독고미로가 성의 없이 단답하는 모양새였다고 한다.

“뭐라 이야기하는지는 잘 못 들었다. 초등학교? 어쩌고 하는 것 같던데.”

하필 발견한 사람이 송대석이었나 보다.

송대석은 두 사람에 관해 별 관심이 없어서 들었던 대화 내용도 다 흘려들은 것 같다.

민그린은 송대석을 빤히 보면서 걱정 반 어이없음 반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송대석이 그 얼마 되지 않는 대화를 기억 못 하는 게 어이없으면서도, 연구원 생활에 시달려서 기억력이 나빠진 건 아닌가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하하하…… 대석이가 발견해 줘서 말리러 갔는데, 조금 늦었던 것 같아. 어쨌든, 두 사람은 대련하기로 했어.”

……갑자기 대련?

말싸움을 하던 둘이 대련을 하겠다는 건 몸으로도 싸우겠다는 뜻 아닌가.

“한이랑 미로가 우리 보고 증인이 되어 달라고 하더라.”

“증인?”

“응. 둘은 더 싸우지 않는 대신 대련으로 승부를 내기로 했어.”

김유리는 한이와 독고미로가 한 승부에 관해서 간략히 설명해 줬다.

“미로가 이기면 한이는 예전 일에 관해 묻지 않을 것. 한이가 이기면 미로는 예전 일에 관해서 이야기해 줄 것.”

한이는 초등학생 시절 독고미로가 당했던 일에 관해 단서를 잡았나 보다.

한이가 괴롭힘에 휘말리는 걸 막기 위해 독고미로는 한이를 멀리했다.

독고미로는 한이를 위해서 한 일이었지만, 친구로 지낸 한이 입장에선 날벼락이나 다름없었을 거다.

한이가 아직 어리고 힘이 없던 그 시절과 지금은 다르다.

한이는 뒤늦게나마 그 일에 관해 알고자 하는 거다.

“두 사람은 광림을 제외한 이능을 사용해 대련할 거래. 심판은 함근형 선생님께 부탁해 뒀어.”

함근형 선생님이 그걸 허락하신 건가!

수많은 0반 학생들을 다뤄 본 함근형 선생님이라면 그냥 둘 사이가 곪거나 자신이 안 보는 사이에 싸우느니, 눈앞에서 정당한 대련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 대련은 언제 해?”

“곧. 1교시는 ‘플레이어의 전투 연습 2’잖아. 두 사람은 먼저 가서 몸 풀고 있어. 함근형 선생님도 먼저 가셔서 둘을 지켜보는 중이야.”

함근형 선생님이 둘을 지켜보고 있다면 걱정은 없는데…… 정말 이래도 되나?

담임 선생님이 허락하고 학교 이사장은 옆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으니 제재할 사람이 없긴 했다.

“조례는 생략한대. 바로 1학년 전용 제3체육관으로 가면 될 것 같아. 의신이랑 지호도 왔으니까 이제 이동하자.”

“아, 저…… 레나가 안 보이는데…….”

목우람이 주저하다가 물었다.

권레나가 없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 레나는 조금 늦는다고 연락 왔어.”

“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건 못 들었는데…… 바이올린 연습 하는 거 아닐까? 가끔 아침에도 연습하던데.”

그렇게 권레나와 대련을 하는 한이와 독고미로를 제외한 1학년 0반 일행이 체육관으로 향하던 중.

“흠…….”

내내 눈을 반짝이며 기분이 좋아 보이던 황지호가 우뚝 멈춰 섰다.

황지호의 시선이 체육관으로 향하는 산책로 곳곳에 심어져 있는 개잎갈나무 위를 향했다.

사삭!

“쳇!”

“크윽, 눈치챘나!”

나뭇잎이 크게 흔들리는 소리와 동시에 나무 꼭대기에서 그림자 두 개가 멀리 날아갔다.

그걸 본 아이들이 어처구니없어했다.

“아…….”

“저 새끼들은…….”

관종 둘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나 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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