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31화 (430/925)

64. 믿음과 시험 (10)

‘운명력’ 스킬은 늘 예고 없이 발동한다.

처음 운명력이 발동했을 때는 손민기의 계략을 타파할 예비 카드가 나타났다.

그 뒤로도 운명력은 멋대로 움직였다.

언제 어떻게 발동할지 모르는 운명력을 계산에 넣고 수를 짤 수 없었기에 발동하는 순간마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운명력 스킬이 있었기에 권레나를 구했고, 염준열을 제자로 받는 계기가 된 대화를 듣게 되었고, ‘무명의 운명’을 손에 얻었고, 체스 대회 때 응원 온 아이들을 발견했다.

수많은 상위 존재와도 만나게 해 줬다.

또,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 스킬이 없었다면 은호는 지금도…….’

운명력 스킬 덕에 많은 이들을 구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려한다면, 운명력 스킬이 발동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들리면 환영해야 할 거다.

그럼에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실수하면 중요한 걸 놓치겠지.’

‘운명력’ 스킬은 힌트와 기회만 줄 뿐이다.

입학시험을 치를 때에는 카드의 수를 늘려 줬을 뿐, 손민기를 처리해 준 건 아니었다.

권레나가 떨어질 때에도 내가 손을 뻗지 않았다면, 염준열에게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만약의 상황이 떠올라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내가 힌트를 놓치고 움직이지 않으면 일이 틀어질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또 상위 존재와 이야기하게 되나?’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를 연구하는 연구소에 오게 되었으니, 상위 존재와 대화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상위 존재와 대화할 때마다 발생하는 특유의 암전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

한편, 염준열과 제천대성이 무언가를 감지한 건지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예전에 체스 대회에서 황지호가 운명력의 존재를 감지했을 때와 같았는데 어쩌면 후예와 진족은 운명력의 발동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저 둘이 우수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파아아…….

해제된 봉인 사이로 빛의 파편이 흩날렸다.

언령 스킬이 남긴 이능파가 어린 글자 탓에 봉인 안의 내용물도, 파편의 형태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잠시, 빛을 잃어 가는 파편이 내 주변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바람에 그 형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슬의 모양을 하고 있던 것 같은데.’

설마 이걸 내게 보여 주는 게 운명력의 의도였나?

멋대로 발생하는 스킬에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뭔가 이상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는데, 상황은 빠르게 돌아갔다.

휘익!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는데, 제천대성이 눈앞이 훤히 보이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제천대성이 여의봉을 높게 들어 올리는 게 보여, 나도 모르게 외쳤다.

“다들 방어해!”

나는 이 중에서 가장 위험할 것 같은 염준열 앞에 섰다.

나와 거의 동시에, 혹은 한 박자 늦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 이들이 경악하며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쉬익!

제천대성의 여의봉이 거대한 수조를 스쳤다.

수조 그 자체는 마족의 결계만큼 견고하지 않았기에, 제천대성의 여의봉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수조가 박살 났다.

수조가 파괴되자 여의봉이 남긴 풍압과 이능파, 수조 안의 물과 파편이 주변으로 터져 나갔다.

콰아아아아아!

수조 내부 안을 채운 물에 마족의 마력이 남아 있었는지 파괴력이 심상치 않았다.

단순히 수조가 터졌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주변이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내가 펼친 결계와 도원우의 광림이 벽을 만든 턱에 우리 일행은 무사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법(定身法)으로 굳어 있는 연구원들과 유상훈이 대충 던져둔 마족, 유상희에게 처맞은 연구원은 휴지 조각처럼 구겨져 벽이나 도랑 주변을 굴러다녔다.

“이런 물에 잠기면 홍룡은 힘을 쓰기 힘들죠.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괴의 여파가 가라앉자 제일 먼저 착한 내 제자가 감사 인사를 했다.

염준열의 안심과 감사가 넘치는 인사를 들으니 공연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이 정도 일에 쉽게 다칠 만큼 약하진 않지만, 예고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나.

나는 곧바로 제천대성에게 항의했다.

“자칫하다간 다칠 뻔했습니다.”

제천대성은 수조 안의 존재에게 정신이 팔려 대답도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답변은 금방 돌아왔다.

“마음이 급해져서 손이 먼저 움직였다. 너희가 이 정도에 당할 조무래기는 아니지 않나. 좀 봐다오.”

파괴된 수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천대성은 조금도 젖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나타났을 때와 달리 재킷을 벗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제천대성의 손에는 여의봉 대신 재킷으로 감싼 무언가가 안겨 있었다.

제천대성의 품 안에는 재킷으로 푹 감쌀 정도 되는 체구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여자아이를 본 유상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안에 사람이 있었어?”

유상희는 이 수조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보다.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몰랐겠지만.

제천대성이 유상희 말에 답하듯 말했다.

“이 아이는 인간이 아니다.”

제천대성은 자신의 품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그리움, 기쁨,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기운이 약해져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진족인 것 같습니다.”

“그래, 이 아이는 진족이다.”

염준열의 말에 제천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천대성이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이의 이름을 담았다.

“이 아이는 무지기. 오래전 실종된 내 동생이다.”

제천대성의 동생, 무지기.

무지기는 물의 요괴라는 설도 있고, 신이라는 설도 있는 존재였다.

이계 충돌이 발생한 이후 신화와 전설 체계들이 충돌하며, 어떤 존재는 진족으로 남고 어떤 존재는 상위 존재가 되었다.

제천대성, 현무의 경우 상위 존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으나 이 세계에 진족으로 머물러 있는 걸 택했다.

여기에 있는 무지기도 신화나 전설 속에 남긴 힘과 위용을 보면 상위 존재가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지기는 인간의 세계에서 날뛰다가 우왕의 손에 봉인되었지. 사슬과 쇳덩이에 묶여 회수 강바닥 아래에 던져졌다. 뭐, 그건 이 녀석 잘못이니 머리를 식히고 곁으로 불러올 계획이었다.”

신화와 전설 속에서 묘사된 무지기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나처럼 사전에 단서를 얻었다면 모를까 제천대성이 저 아이를 무지기라고 칭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무지기를 연상하기는 어려웠을 거다.

‘오랜 기간 봉인되어 있던 탓인가. 기록에 남은 묘사를 보면 사람의 키의 몇 배는 될 법한 거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재킷으로 가리지 못한 무지기의 발끝이 조금 보였다.

그 발끝에는 벌겋게 사슬 모양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지금 사슬의 흔적이 없는 걸 보니 이능으로 된 사슬에 구속되어 있었나 보다.

“이계 충돌 후, 뒤늦게 동생을 맞이하러 행차했지만, 강 아래엔 무지기가 없더군. 쇳덩이 하나만 남아 있었다.”

처음에 제천대성은 무지기가 자력으로 탈출한 건지, 누군가에게 잡혀간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제천대성은 후자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누가 감히 제천대성의 동생을, 그것도 상위 존재에 가까운 무지기를 겁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세계에는 스스로를 도천이라고 칭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늘에 다다를 정도로 큰물이 가득 차 넘치고, 하늘의 분노를 무서워할 줄 모른다는 뜻의 도천.

그 하늘 무서울 줄 모르는 자들은 무지기를 붙잡아 두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무지기는 여기에 있었나 보군.”

괴력을 소유하였고 자연재해를 부르는 거대한 괴물이 지금은 힘없이 형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제천대성이 동생을 잠시 바라보는 사이,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무지기가 몸을 조금 떠는 게 보였다.

아직 정신을 차리진 못했지만, 이능으로 봉인되어 완전히 정지되어 있던 신체 기능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제천대성이 무지기의 맥을 짚었다.

“……많이 쇠약해졌군.”

서유기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제천대성은 의술에도 능하다.

손오공이 주자국에서 왕의 병을 낫게 하는 일화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때 손오공은 자신의 도술이 아니라 약재를 이용해 병을 치료했다.

손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지기를 치료하긴 어려울 거다.

치유계 광림을 소유한 유상희와 달리.

“……제가 치료해도 될까요?”

유상희는 죄책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이 수조를 매개로 한 실험을 자주 했어요. 동생분이 여기 계시는 걸 모르고 저도 그 실험에…….”

강력한 봉인에 묶인 거대 수조는 에너지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 물속에 갇혀 봉인되었다는 진족이 존재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기에 누군가의 동생이 갇혀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유상희는 자기가 더 무언가를 희생할지언정 그 실험에 참가하려 들진 않았을 거다.

유상희의 말을 듣던 제천대성이 ‘실험’이란 말에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듣지. 내 동생을 치료해 다오.”

유상희는 거듭 사죄했다.

어떤 실험인지 몰라도 무지기에게 부담이 가는 내용인 건 확실한 듯했다.

제천대성이 손을 저으며 사과할 필요가 없음을 밝히자 유상희가 치료를 시작했다.

아케아의 권능이 담긴 바람이 무지기의 주변을 감쌌다.

제천대성의 품으로부터 허공으로 떠오른 무지기가 빛의 입자로 가득한 바람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 몸은 은원을 확실히 가리는 걸 좋아한다.”

제천대성이 나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눈가리개 탓에 제천대성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이 향하는 방향은 분명했다.

“은혜도, 원한도 잊지 않겠다.”

……여기 오기 전에 제천대성이 호랑이들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던 걸까.

제천대성은 내가 자신을 불렀다고 확신하고 있나 보다.

호랑이들을 통해서 제천대성을 부르자고 제안한 건 나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모든 일이 잘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내 마음속엔 아직 걸리는 게 있었다.

‘운명력은 대체 왜 발동한 거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운명력은 힌트를 던졌는데, 내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사슬의 파편이 무슨 관계가 있을 텐데…….’

단순히 무지기를 봉인한 사슬의 파편이 튀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엔, 여태까지 운명력이 미친 영향력이 너무 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사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무지기.

그리고 방금 제천대성이 날뛸 때 광림 철쇄연쇄(鐵鎖連鎖)로 벽을 만들어 파편이 튀는 걸 막은 도원우였다.

도원우는 마치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까 그 사슬…….”

도원우는 내 시선을 느끼고 곧바로 입을 다물고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평정을 가장하는 게 놀라웠다.

‘아까 그건 도원우의 사슬은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도원우의 광림을 직접 써 보기도 하고, 방금 눈앞에서 보기도 했으니 헷갈릴 리가 없었다.

‘내가 알아채면 곤란한 일과 관련이 있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무언가가 떠올랐다.

‘도시후의 광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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