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믿음과 시험 (9)
12지 동맹 중, 호족을 배신한 ‘긴 꼬리’에게는 후예가 존재한다.
김신록이 리플레이를 통해 잡은 이 단서를 통해 긴 꼬리의 후보 중 하나를 제외할 수 있었다.
그 진족은 바로 원족(猿族)이었다.
―申[우주최강 제천대성] “아, 알았다, 알았어. 후예 없는 진족은 서러워서 죽겠네.”
난장판이었던 12지 동맹 회담 당시, 원족의 수장 ‘우주최강 제천대성’은 저런 발언을 했다.
그 후예 없는 서러움이 계기가 된 건지 몰라도 제천대성은 제 정체를 숨기고 어떤 모임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만석꾼 아들의 유괴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비정기 오찬회’이었다.
그리고 원족이 배신자 긴 꼬리가 아니라고 확신을 얻은 황지호가 제천대성과 접촉했다.
―비정기 오찬회에서 원족의 수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제천대성은 황지호에게 어떤 의뢰를 한다.
그 의뢰의 내용은 자신의 동생, 무지기를 찾는 것.
―나는 제천대성이 넘겨준 단서를 근거로 그의 동생, 무지기의 행방을 찾던 중이었지.
황지호가 쫓던 단서는 동결형 이계의 위치가 남은 지도 속으로 이어졌다.
―그 단서가 이어진 곳이 저 TC 연구소다.
그리고 유상훈과 TC 연구소에 오고, 은호의 메시지를 받아 염준열, 학생회 임원들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나는 최선의 수를 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최선의 수 중 하나는 제천대성을 부르는 것이었다.
‘호족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얼마만큼 개입했는지는 최대한 숨길 수 있겠지.’
황지호와 제천대성이 손을 잡았다는 건 아직 아무도 모를 거다.
황지호가 회담을 열어 배신자의 존재를 알린 상황이다.
호족이 지금 12지의 진족을 경계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제천대성이 무려 긴고주를 내밀며 자신이 배신자가 아님을 증명했다고 누가 믿겠는가.
갑자기 제천대성이 TC 연구소를 습격한다면, 손오공이 직접 무지기의 단서를 잡아서 쳐들어왔다고 생각해도 호족의 손을 빌렸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할 거다.
‘제천대성이라면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이곳을 습격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잘하면 호족의 개입 여부를 숨길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수, 의도를 알 수 없는 수는 막기 어렵다.
그래서 플마고의 주인공들은 내내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흑막을 상대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호족은 용제건과 함께 동결형 이계를 대처하게 하고 가능하면 지하에 내려오지 않게 막는 게 좋겠다.
나는 곧바로 내 생각을 은호에게 전해 제천대성을 이곳에 부르고, 중간에 이능독 해독제를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지하 돌입 직전이었지만, 반나절이면 수렴동에서 남해까지 날아간다는 근두운이 있다면 곧바로 날아올 수 있으리라.
내 예상대로 제천대성은 시간에 맞춰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반응이 시원치 않군.”
정신법으로 굳은 연구원이 리액션을 취할 리는 없었고, 그렇다고 나나 유상희, 유상훈, 도원우가 환호성을 지를 리도 없었다.
정적이 흐르자 제천대성이 활기차게 대사를 외친 게 언제였냐는 것처럼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황지호 말에 의하면, 비정기 오찬회에선 ‘호사가 진족’으로 불렸다고 했지. 정체를 숨기고 있지 않았나?’
도원우의 반응을 보면 정체를 죽 숨기고 있던 것 같은데, 그동안 좀이 쑤셨나 보다.
유상훈은 제천대성을 상대하는 대신 가면 사이로 내 쪽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수상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뭐가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유상훈은 내가 제천대성을 불렀다고 확신한 듯했다.
까마귀 가면의 구조상 각도에 따라선 입가가 보이니 내 특유의 수상한 표정이 다 보였나 보다.
저 말을 하고 나서야 유상훈은 방금까지 자기가 짓던 멍청한 표정이 다 드러난 게 새삼 떠올랐는지 입가를 우그러뜨렸다.
“에이씨…… 가면이 뭐 이래.”
유상훈이 그렇게 말하고 입가를 가렸다.
그래 봤자 이미 늦었는데.
“흠, 흠. 그럼 이야기를 들어 볼까. 예전 같았으면 토지신이라도 불러내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소상히 들었겠지만, 이제 인간의 세계에서 상위 존재를 접하기 어려워졌으니까.”
제천대성은 민망했는지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놨다.
기껏 도와주러 왔는데 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먼저 제천대성의 말에 답변한 건 유상희였다.
“……저와 이 사람들을 보내 주세요.”
연구원의 온몸이 굳었으니 유상희를 위협하던 주사기는 무용지물이 되었는데, 그녀는 목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것처럼 두려워했다.
제천대성은 눈을 가렸지만 유상희가 어디에 있는지 훤히 보이는 것처럼 그녀를 향해 다정히 말했다.
“이유를 소상히 말해 다오. 자초지종을 들을 시간은 충분하다. 지금 이 제천대성이 눈앞에 있는 한 이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기나긴 여정과 모험을 거듭하며 나는 영웅과 소인배를 가리는 안목을 갖췄다. 너를 위협한 자는 시정잡배에 불과하거늘,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지?”
제천대성은 과연 남다른 혜안을 갖고 있었다.
서유기 속, 손오공은 불경을 얻기 위한 순례길에서 저 연구원들 같은 무뢰배들을 무수히 상대해 왔으니, 척 봐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을 거다.
“제 동생은 이능을 각성하지 못하면 죽을 운명이었어요. 저분들은 제 동생의 이능의 각성을 앞당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충분히 갚은 것 같다만.”
“……이능이 사라지면 제 동생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유상희의 목소리에서 공포가 묻어났다.
여기에서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능을 그리 쉽게 없앨 수 있다면, 흑막은 주수혁이나 안다인에게 그 짓을 했겠지.’
제천대성은 의문스러워하며 말했다.
“이능은 그리 쉽게 없앨 수 없다. 저 시정잡배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인간 중에는 신체가 이능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는 바람에 성장 중에 이능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지. 그러나 네 동생은 이미 장성한 듯하다만.”
“하지만!”
유상희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유상희가 한 말은 의외의 말이었다.
“어느 날, 제 동생이랑 같은 반 아이의 이능이 사라졌어요. TC 연구소에서도 이 사례를 언급했고, 제 동생도 그런 꼴을 당하면…….”
머릿속이 잠시 텅 비는 감각이 들었다.
만우절에 박승현을 괴롭히던 부정입학자 둘의 이능이 사라졌다.
그 부정입학자는 유상훈과 같은 반이었으니, TC 연구소 측에서 이 사례를 들먹이면 유상희가 저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와 저 TC 연구소를 상대로 분노가 치밀었다.
내가 한 일을 교묘하게 이용해 유상희를 붙잡는 족쇄로 이용하다니!
“그건 제가 한 일입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바로 말했다.
“그 쓰레기들의 이능을 지운 건 접니다.”
“이능을 지우다니…… 호오…….”
“저자들은 할 수 없을 겁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굳은 연구원들을 노려보았다.
연구원들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당황하고 있었다.
여기에 그 당사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자, 지금부터 한 명을 풀어 주지.”
파앗!
제천대성이 손뼉을 한 번 치자 유상희의 목에 주사기를 겨눈 연구원이 풀려났다.
동시에 제천대성이 귓속에서 아주 작게 변한 여의봉을 꺼내 들었다.
휘리릭!
수많은 전설을 남긴 신보 중의 신보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 통칭 여의봉을 꺼낸 제천대성이 호기롭게 외쳤다.
“사실을 확인하겠다. 이 까마귀 가면의 이능을 지운다면, 제천대성의 이름을 걸고 네놈들을 보호하겠다.”
풀려난 연구원은 벌벌 떨기만 할 뿐 우물쭈물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연구원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부(富)와 생명의 무게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짓이니, 당연하지.’
이능을 지웠다고 주장하는 나.
중간에 서 있는 제천대성.
이 둘을 번갈아 보던 연구원이 유상희에게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상희야, 미안하다…… 미안해…….”
“……그동안 날 속인 거예요?”
유상희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연구원이 바들바들 떨다가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비굴한 와중에도 멋모르는 아이를 타이르는 어조를 하는 게 아직 정신을 덜 차린 것 같았다.
“우리가 잘못했다. 응? 하지만 이게 다 잘되면 결국 너도 잘되는 거…… 커억!”
퍼억!
유상희의 손날이 연구원의 목을 가격했다.
연구원은 숨도 못 쉬고 꺽꺽거리며 자리에 엎어졌다.
“어떻게…… 내 동생을 걸고 그런 개수작을 벌일 수가 있어!”
퍼억! 퍽!
그 이후로 일방적인 폭력이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유상훈도 손이 근질근질해 보였지만, 지금은 유상희에게 맡길 모양이었다.
유상희의 수도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연구원이 기절했다.
연구원이 다시 정신을 차릴 때까지 머리를 걷어찬 유상희가 바닥에 굴러다니던 주사기를 들었을 때였다.
염준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상희 누나?”
“상희야!”
“얘들아, 여긴 어떻게……!”
푹!
유상희가 쥐고 있던 주사기를 연구원의 입 깊숙한 곳에 대충 꽂아 넣고 학생회 임원 쪽으로 달려갔다.
혓바닥에 주삿바늘이 꽂힌 연구원이 살충제를 맞은 벌레처럼 꿈틀거렸으나 이미 유상희의 의식 속에서 연구원의 존재는 지워진 것 같았다.
“이 주변엔 에너미가 있을 텐데, 위험하게 왜 온 거니……!”
“당연히 너랑 원우가 걱정돼서 왔지.”
“상희 언니, 무사하신가요?”
유상희는 에너미와 격전을 벌이고 온 학생회 임원들이 걱정되었는지 치유 스킬로 여기저기 살펴보고 있었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동기와 후배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오, 용족의 후예로군.”
“안녕하세요, 비정기 오찬회의 주최자분이시군요! 여기엔 어떻게…… 아.”
예의 바른 제자가 제천대성에게 인사하다가 내 쪽을 봤다.
유상훈에 이어 염준열도 내가 제천대성을 불렀다고 확신하나 보다.
염준열은 미소를 띠며 나를 보고 있었다.
“강력한 에너지원을 발견하면 파괴하지 말고 확보하라고 하셨죠. 말씀을 따랐습니다.”
뒤를 보니 염준열의 홍룡이 거대한 수조를 끌고 오고 있었다.
마족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게, 강력한 봉인이 걸려 있는 듯했다.
유상희와 학생회 임원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제천대성이 수조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안에 무언가가 있군. 단단히 봉해져 있어. 이쯤이야, 이 손오공의 도술로…… 으음, 좀 까다롭군!”
여의봉으로 분쇄해 버리면 간단하겠지만, 그랬다간 봉인 너머에 있는 무언가도 같이 파괴될 거다.
마족의 봉인이나 내용물이 여의봉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으니까.
“이 봉인은 마족의 소행일 거예요. 제가 해제하겠습니다.”
“호오…….”
마족의 힘이 닿아 있다면 언령으로 해주하기 쉬울 거다.
나는 제갈재걸의 언령을 다시금 사용했다.
파아아!
봉인 위, 제갈재걸의 힘으로 글귀를 새기고 또 새겼다.
그러나 한참을 써 내려도 쉽게 해제되지 않았다.
‘……이렇게 단단히 봉인해 놓은 걸 보면, 이 안에 있는 게 확실하군.’
여전히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휘이이이……!
이윽고 마족이 건 봉인이 모두 해제되고, 그 안에 든 무언가가 드러난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 * *
군사관학교 생활관.
1학년 생도 전용 휴게실.
“시후야, 뭐 해?”
“응? 아, 원우 형이랑 연락이 안 돼서. 좀 알아보고 있어.”
장남욱은 살짝 미안해졌다.
주오 드래곤즈가 한국시리즈에 패배한 이후로 주변에 통 신경 쓰지 못한 탓이다.
친구들과 디바이스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도 남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무신경하게 자기 얘기만 해 댄 게 마음에 걸렸으니까.
오늘은 야구 얘기는 그만하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장남욱이 다짐하던 중, 갑자기 주변에 이능파가 피어올랐다.
파아아아……!
도시후의 몸에서 빛을 머금은 사슬이 나타났다.
장남욱은 곧장 도시후가 광림을 발동시켰다는 걸 알아챘다.
장남욱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저 빛의 사슬에 묶이면 이능파가 봉인되어 버린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시후야……? 왜 갑자기 광림을 써?”
또 도시후의 광림으로 자신의 이능을 봉인하고 못된 장난질을 하려는 게 아닌가.
장남욱이 의심하고 있을 때, 도시후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놀란 표정의 도시후가 이능파를 거두려 하는 듯했으나 빛의 사슬이 뿜는 빛은 점점 강해졌다.
마치 억지로 광림이 발동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윽……!”
“뭐야, 무슨 일임요?”
야전삽을 들고 자율 훈련 중이던 남궁규연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장남욱, 도시후 둘 다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장남욱은 ‘별 처녀의 눈’으로 도시후를 바라봤다.
깊고 어둡고, 무거운 무언가가 도시후 주변에 맴돌고 있었다.
‘그 ‘저주의 씨앗’하곤 달라. 저게 뭐지……? 안개? 아니…….’
장남욱의 눈에는 도시후가 어둡고 컴컴한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도시후의 귓속에 원망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원망의 대상이 자신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도시후는 기억 저편에 묻고 있던 어떤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예전에, 유괴됐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 같아…….’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장남욱, 여기저기에서 몰려드는 동기들, 야전삽을 땅바닥에 꽂고 무언가를 하는 남궁규연.
그 모든 게 멀리 느껴졌다.
곧 도시후의 정신은 어둠 속에 잠겼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