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믿음과 시험 (8)
“무장을 해제하고 양손을 들어라! 어서!”
유상희가 인질로 잡힌 상황이라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나는 순순히 양손을 들었고 도원우는 서포터를 벗었다.
유상훈도 마찬가지였다.
퍽!
양손을 들라는 말에 유상훈이 손에 쥐고 있는 마족의 한쪽 발목을 내던졌다.
힘을 얼마나 준 건지 내동댕이쳐진 마족의 몸이 괴상하게 꼬였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유상훈의 기세에 놀란 연구원이 움찔 손을 떠는 바람에 바늘 끝이 유상희의 살갗을 살짝 스쳤다.
“……!”
주사액이 투여된 건 아니었지만, 도원우와 유상훈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도원우와 유상훈의 주변에서 억누르지 못한 이능파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퍼지자 연구원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이, 이능파가 감지되면 바로 찌를 거다!”
도원우와 유상훈이 급히 이능파를 갈무리했다.
한 연구원의 손에 이능파 감지기가 들려 있었다.
연구원들이 보란 듯이 이능파 감지기와 유상희 목에 들이댄 주사기를 흔들어 댔다.
바늘 끝이 피부를 할퀼 때마다 유상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침착하자. 평정을 잃어 봤자 유상희가 위험해질 뿐이다.’
유상희가 인질로 잡힐 가능성을 상정하고 왔지만, 눈앞에서 저 꼴을 보니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유상훈과 도원우가 참고 있는데 내가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냉정하게 사고를 하기 위해 자신을 다잡았다.
‘……저걸 들고 있는 걸 보니 연구원들은 전원 이능이 없나 보군.’
이능독은 이능이 없는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능독을 해독하거나 제어할 수 없다면, 이능이 없는 편이 안전할 거다.
‘웬만한 플레이어나 진족은 이곳에 오면 붙잡히거나 죽겠지.’
하지만 예외는 존재한다.
유상희처럼 우수한 치유술사가 그러했다.
그러나 유상희는 이능이 없는 이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잡혀 있다.
그렇다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유상희는 자의로 잡혀 있는 거다.’
유상희가 유상훈 건으로 빚을 져 원치 않은 일에 협력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목숨을 걸 이유는 무엇일까.
도원우 하나만 왔으면 몰라도 지금 유상훈이 눈앞에 있는데, 왜 유상희는 저항하지 않고 있는가.
자칫하다간 인질로 잡힌 유상희를 위해서 유상훈이 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단순히 빚을 진 게 아니라, 협박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협박의 내용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동생 목숨 빚을 졌으니 갚아라’가 아니라, ‘동생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우리를 따라라’라면 어떨까.
‘유상훈은 이능을 각성했으니, 이제 유상희의 치유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 대체 무엇으로 유상훈의 목숨을 노린다는 거지?’
협박의 빌미가 될 건수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가능성 하나가 떠오르긴 했다.
‘……공갈 협박의 가능성.’
어쩌면 유상희는 속고 있는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옆에서 작게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상훈의 목소리였다.
“……젠장.”
감정을 억누른 욕설과 달리 표정은 붕 떠 있었다.
유상훈은 내가 여태껏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표정으로 유상희를 보고 있었다.
아니, 멍청하다기보다는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유상희가 지금 저 비열한 연구원 손에 잡혀 있는 게 자신 때문이란 걸 짐작했나 보다.
‘유상훈…….’
유상훈은 눈을 몇 번 끔뻑거리더니 다시 패기가 돌아온 얼굴을 했다.
유상훈은 무력감 대신 분노와 믿음 어린 얼굴로 내 쪽을 봤다.
유상훈이 저 연구원들과 자기 자신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지만, 그걸 억누르고 있는 건 저 믿음 탓인 것 같았다.
그리고 유상훈의 믿음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유상훈은 나를 믿고 있구나.’
유상훈은 나를 믿고 참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아는 것 같은데, 알고도 이런 짓을 하는 건가.”
도원우가 연구원을 노려보았다.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벌벌 떠는 연구원도 있었으나 여전히 주삿바늘은 유상희의 목을 노리고 있었고, 이능파 측정기는 우릴 향해 있었다.
도원우는 그들의 반응을 남김없이 관찰하고 판단했다.
“표정을 보니 믿는 구석이 있나 보군. 이곳의 뒷배는 이번 숙청 대상에 없었나 본데…… 그럼 후보가 줄어들겠군.”
“다, 닥쳐!”
TC 그룹 차기 총수의 아들인 도원우의 등장보다 TC 연구소의 뒷배가 밝혀져 자신들의 안위가 흔들리는 게 더 무서웠나 보다.
연구원이 유상희의 목에 주삿바늘을 더욱 가까이 들이댔다.
바늘이 잠시 유상희의 목을 찔렀다가 나왔는데 그걸 본 도원우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우드득!
어찌나 힘을 준 건지 도원우의 주먹 안에서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도원우는 연구원을 떠보는 걸 포기한 듯했다.
“……원하는 게 뭐냐.”
“여기에서 움직이지 마라! 우리는 조용히 밖으로 나가겠다.”
“우, 움직이거나 이능파를 쓰면, 알지?”
천동하가 제공한 지하 식물원의 내부 구조도에는 비상 탈출 시설이 있었다.
위험한 연구를 하는 집단이 늘 그렇듯, 다른 이들은 몰라도 자신들의 안전에는 철저히 대비한 셈이다.
이들은 유상희를 인질로 이 시설을 빠져나갈 생각인가 보다.
데이터 칩 보관용 가방을 들고 있는 연구원이 있는 걸 보니, 어쩌면 유상희를 이대로 납치해 계속 연구를 진행할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순순히 걸어가는 유상희를 만족스럽게 보는 연구원이 있는 걸 보니 더 그랬다.
유상훈은 아직 나를 믿고 있는 건지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터벅, 터벅.
유상희가 연구원들 사이에 섞여 걷기 시작했다.
유상희가 나와 유상훈, 뒤에 구겨져 있는 마족을 지나 도원우까지 지나쳐 갔다.
“왜…….”
유상희와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치자, 도원우는 더 참을 수 없는 듯했다.
“왜…… 저항을 안 하는 거야.”
“…….”
“저 사람들은 플레이어도 아니잖아!”
도원우의 의문은 합당했다.
유상희는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을 제압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유상희의 공격 스킬도 수도(手刀)가 아니던가.
보호대가 없어도 맨손으로 에너미를 제압할 능력이 있는데, 고작 일반인들의 주삿바늘에 위협당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건 말도 안 됐다.
‘……도원우도 그 답을 알고 있을 텐데.’
도원우는 눈앞에서 유상희가 끌려가고 있으니 답답한 기분에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나 보다.
유상훈은 딱한 것을 보는 얼굴로 도원우를 봤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유상훈이 도원우를 처음으로 동정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원우야.”
유상희의 가라앉은 눈이 도원우를 보고 있었다.
유상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억눌러 왔던 감정과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알고 여기에 온 거 아니야?”
“……!”
유상희의 말에 도원우의 입이 막혔다.
유상희의 말은 많은 걸 함축하고 있었다.
유상희는 어린 시절부터 도원우와 함께 지낸 사이이니, 그가 얼마나 유능한지 잘 알고 있었다.
도원우가 여기에 온다면, 모든 걸 알게 된 이후라는 걸 상정하고 있던 거다.
“이건 내가 선택한 거야. 내 힘으로는 내 동생을 구할 수 없었으니까, 원우네 집…… TC의 힘을 빌렸어.”
유상희의 목소리엔 깊은 자책이 묻어났다.
유상희는 어린 시절, 희귀한 이능과 재능을 타고난 인재로 주변의 기대를 샀다.
건강하지 못한,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유상훈과 달리.
집에서 죽어 가는 유상훈을 보며 다정한 유상희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뻔했다.
유상희의 과거사에 문득 내 동생들을 잃었던 순간이 겹쳐졌다.
‘……만약 그때 누군가의 힘을 빌릴 수 있었다면, 뭐든 했겠지.’
내 주변엔 동생들을 되살릴 힘을 가진 누군가도 없었고,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또, 유상훈이 기병을 앓는 동안 곁에 있어 준 유상희와 달리 나는 죽어 가는 동생들 곁에 있어 주지도 못했다.
그래서 감히 유상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동생들을 살릴 수 있다면 뭐든 했을 것 같다.
“……나중에 추적하지 말아 줘.”
유상희에게 이 말을 시키려고 연구원들이 유상희의 말을 끊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상희 뒤에 있는 연구원들이 히죽 웃었다.
도원우는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면 좋을지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다.
도원우는 오랫동안 답변을 하지 못하다 한마디 했다.
“제발…….”
도원우는 애원하듯 한마디 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달라는 것 같았지만, 유상희는 그걸 보고도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도원우를 보고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
도원우에게 시선을 뗀 유상희가 이미 지나쳐 간 유상훈 쪽을 돌아보려고 하자, 연구원들이 제지했다.
정말로 유상희를 이용해 도원우를 막으려고 대화를 허락했나 보다.
“움직이지 마!”
“윽!”
거칠게 유상희를 붙잡은 탓에 주삿바늘이 깊게 찔렸다.
주사액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유상희의 비명에 고개를 든 도원우가 마치 자신의 목이 찔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지 마!”
유상희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도원우를 만류했다.
유상희와 연구원들이 점점 멀어졌다.
실험실에서 비상 탈출로가 가까웠는지, 연구원이 카드키를 꺼내 패널에 가져가는 게 보였다.
지이잉!
비상 탈출 캡슐 안에 연구원들이 하나하나 올라타려 했다.
끝까지 우리를 경계하는 건지, 유상희와 유상희에게 주삿바늘을 겨누고 있는 연구원들은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고 빈틈을 노리고 있는 도원우가 초조한 얼굴로 탄식했다.
“상희야……!”
그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작게 불기 시작했다.
솨아아…….
바람이 지나치자 지하 식물원의 공기가 가볍게 변했다.
“……아.”
유상훈이 주변을 둘러보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안다인의 ‘특이 체질’로 독기를 억누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언가에 의해 이능독이 날아간 거다.
공기의 변화에 내가 준비한 체스 피스가 드디어 움직였다고 확신했다.
‘이제 온 건가.’
유상희가 이곳에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디바이스 추적 결과표에 유상희의 이름도 있었으니까.
유상희는 도원우나 학생회와 함께 움직이지 않았으니, 여기에 온 이유는 명확했다.
그러니 유상희가 인질로 잡힐 가능성도 상정하고 있었다.
휘이이이……!
“이능파가 감지되었다!”
“어디, 어디야!”
그 상대는 이능파 감지기가 감지 가능한 범위 내로 접근한 듯했다.
우리가 이능파를 낸 게 아니란 걸 안 듯했으나 저들은 일단 본보기를 보일 겸 유상희에게 주사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주사기를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우, 움직이지 않는다!”
“뭐지, 뭐야!”
그들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상대는 서왕모 치하에 있는 일곱 선녀의 발을 묶었던 도술로 이름난 스킬, 정신법(定身法)을 사용한 듯했다.
“내 도술도 녹슬지 않았군. 공기가 더러워서 제대로 먹힐지 감이 안 잡혔는데. 오는 길에 사슴에게 받았던 맛없는 약 덕인가.”
그렇게 말한 존재는 지하 식물원의 천장 가까이에서 구름, 근두운을 타고 있었다.
눈을 가린 누군가가 씨익 웃었다.
“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 마음에 들었다. 너희는 나와 무관계한 존재지만, 손을 빌려주마.”
내가 부른 원군이 이곳에 도착한 듯하다.
“당신은…… 비정기 오찬회의 그……!”
도원우는 그 상대와 만난 적이 있는 듯했다.
곧 내가 부른 진족, 원족의 수장 제천대성 손오공이 자기소개를 했다.
“우주최강 제천대성 등장!”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