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믿음과 시험 (7)
지상, TC 연구소 앞.
도원우의 전격으로 전원이 마비된 탓에 주변이 어두웠다.
어둠 속, 용제건은 조용히 건물을 바라보며 대기 중이었다.
가끔 TC 연구소 아래에서 이능파가 느껴질 때마다 용제건의 미소가 짙어졌다.
‘가서 직접 보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겠지? 나중에 준열이가 얘기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현명할 거야.’
분명 지하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용제건은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었지만, 이성을 총동원해 참았다.
용제건은 머릿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설득했다.
‘멋대로 움직이면 의신이의 계획이 틀어질 거고, 그러면 우리 준열이도 속상해할 거고, 앞으로 둘이 뭔가 할 때 나를 안 끼워 줄 가능성도 커지고…… 아니, 안 끼워 주더라도 눈치껏 끼어들면 되지 않나?’
용제건은 모처럼 용족의 영역에 온 김신록을 두고 이 장소에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김신록이 카드모스를 심문하는 과정을 구경이나 하는 게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심문 과정은 나중에 녹화된 영상으로 다시 보면 되지만, 이번 건은 기록이 남지 않겠지.’
용제건이 계속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은 순간.
파아아앗!
연구소로부터 세 줄기로 갈라진 이능파가 쏘아져 나왔다.
이능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애들 이능파가 아니야.’
그럼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거다.
마족이 쏜 이능파 사이로 용제건이 활짝 웃었을 때, 디바이스에서 알람음이 들렸다.
―삐이이이익!
이계의 발생을 감지한 위성이 이계 주변에 있는 디바이스에 경보를 보냈다.
플레이어 SAT-K가 포착한 이계는 세 개.
용제건이 발견한 이계도 세 개.
용제건은 방금 방출된 이능파가 이계가 갑자기 발생한 원인이라고 확신했다.
‘우연일 리가 없지. 어떻게 한 거지? 내가 모르는 스킬이나 광림을 사용했나 보네.’
용제건은 입을 쩍 벌리며 이능파를 발산하는 이계의 입구들을 응시했다.
곧 용제건은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한 냉기와 독기를 감지했다.
‘……접근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내버려 둘 수 없지.’
용제건이 이능파를 전개해 몸에 둘렀다.
이능독은 말 그대로 이능 사이로 침투하는 독으로, 이능파로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으나 용제건은 그것까지 파악하진 못했다.
‘플레이어 팀이 공략하러 올 때까지 수비대나 해 볼까…… 이계 확장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것 같은데? 수비대로 이계를 막는 건 비효율적일 거야. 아무리 나라도 동시에 이계 세 개를 공략할 수도 없는데.’
그러나 용제건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나를 여기에 대기시켜 둔 걸 보면, 이미 수를 뒀겠지.’
파사삭!
예상대로 그 ‘수’가 등장했다.
도약 스킬을 사용해 여기로 온 건지, 허공에서 호족들이 나타났다.
그 호족들은 용제건도 아는 이들이었다.
“청호의 제자 씨들이네. 안녕? 이계 공략하러 왔나 봐.”
“용제건……!”
용제건은 청호의 제자들을 좋게 보고 있었다.
교류는 없었지만, 저 청호의 제자들과 김신록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덕이다.
청호의 제자들은 청호와 저들의 귀를 만족시켜 주는 음악가 외에는 다 똑같이 취급했고, 김신록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김신록을 그저 청호도 음악가도 아닌 존재로 취급해 그가 웅족의 후예라고 박해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용제건은 호의와 호기심을 담아 어느 제안을 했다.
“나도 지금부터 이계를 공략하려 하는데, 누가 먼저 공략할지를 두고 내기할래?”
“……무슨 내기를 말하는 거냐?”
“누가 먼저 이계를 공략할지. 그쪽은 넷이서 파티를 짜도 상관없어.”
청호의 제자들이 경계심 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보다 늦게 이계를 공략하면 은광한빛보육원에 드나드는 이유를 알려 줘.”
“뭐라고!”
“그걸 왜…….”
청호의 제자들은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그럼에도 용제건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는데, 용제건은 그들의 속이 훤히 보였다.
‘황호 씨가 나와 협력하라고 명령했나 보네. 나와 내기를 하기는 싫은데, 너무 딱 잘라 거절하면 내가 협력을 거절할까 봐 망설이는 거겠지.’
용제건은 청호의 제자들이 구미가 당길 법한 상품을 걸기로 했다.
“제인이가 은광고 학생 시절에 학교 축제 한정으로 발매한 앨범 어때.”
“허억.”
“제인이가 친필로 곡에 관한 감상을 코멘트로 적어 놨지.”
“권제인 님의 친필…… 감상……!”
권제인이 학생 시절, 학교 축제 한정으로 발매한 앨범은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다.
아무도 팔려 들지 않고 구하는 사람만 있어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청호의 제자들은 은광고 축제 한정 앨범 판매 당시 철야하여 줄을 섰지만 결국 구매에 실패했고 지금까지 앨범 실물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귀한 앨범에 권제인의 친필 감상까지 준다고 한다.
청호의 제자들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그러나 이윽고 청호의 제자들이 굳은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안 한다!”
“크윽, 그 앨범 중 하나가 유희계 용의 손에 들어갔다니…….”
“용제건은 그때 은광고 교사였잖아…….”
“나도 권제인 님이 재학 중일 때 교사 할걸.”
“그때 황호 님께 부탁드려 봤는데 안 받아 주더라.”
청호의 제자들이 좌절하는 가운데, 용제건이 황홀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본 호랑이들은 털이 쭈뼛하고 서는 기분이 들었다.
“…….”
제안을 거절당했는데 용제건의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 좋아 보였다.
청호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말실수를 했나 싶었으나, 되돌아봐도 실수가 없었다.
방금 자신들은 그 권제인의 한정판 앨범을 포기하고 스승의 비밀을 지키는 걸 선택하지 않았는가.
용제건은 청호의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훤히 읽은 것처럼 답했다.
“너희가 제인이의 음악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잘 알고 있어. 그 은광한빛보육원엔 너희의 그 팬심을 뛰어넘는 비밀이 있는 거겠지?”
청호의 제자들은 아차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 내기를 덥석 하겠노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으로 갑갑했다.
호랑이 넷이 유희계 용족의 말장난에 놀아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였다.
사삭!
누군가가 청호의 제자들보다 더 날렵하게 도약해 등장했다.
달빛 아래에 황금빛을 머금은 곱상한 눈이 빛났다.
새로 자리에 나타난 건 20대의 모습을 한 황호였다.
“이계가 발생했는데 뭣들 하고 있는 거냐. 기껏 먼저 보내 줬거늘.”
“황호 님!”
“그자들은 처리하셨습니까?”
“도원우를 추적하는 ‘용병’의 숫자가 생각보다 꽤 되더군.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황호는 방금 처리한 이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말했다.
보안 팀에 섞여 있던 TC 연구소에서 고용한 용병들.
그들은 전부 하나같이 우수한 플레이어들로, 에너미보다 같은 플레이어를 상대하는 데에 특화된 기술을 갖고 있었다.
‘……내가 진족이란 걸 알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언젠가 진족을 상대할 걸 알고 있던 건가?’
황호는 처음에 봉술을 사용해 이들을 상대했다.
그러자 용병들은 황호가 봉술을 사용하리라는 걸 알았던 것처럼 빠르게 반격했다.
봉술을 사용하는 이를 상대하기 위해 훈련이라도 한 것 같았다.
‘저 용병들은 이능독까지 사용하려 했어. 이 몸이 바로 결계술을 펼쳐 제압하지 않았더라면 성가셨을 거다.’
‘봉술’이라는 스킬 하면 떠오르는 진족이 있었다.
황호는 지하에 무엇이 존재할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마 저 아래에 있을 황호의 은인도 이를 눈치챘을 것 같았다.
“그 나이대의 황호 이사장 씨는 오랜만에 보네. 나랑 내기할래?”
황호는 용제건을 상대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용제건을 향해 이능 종이로 꼼꼼하게 봉해진 약 봉투를 던졌다.
약 봉투에는 녹족의 수장 향록이 개발 중인 이능독 해독제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저 이계에 들어가기 전에 먹어라.”
황호와 청호의 제자들이 같은 약을 먹는 걸 본 용제건이 따라 먹었다.
용제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맛없어. 이걸 참고 먹은 거야? 속도 쓰린데.”
“내장이 좀 녹을 거다. 전보다 개선했다곤 하지만, 아직 완전하진 않더군.”
“이걸 안 먹으면 죽어?”
“이능독에 잠식되면 이능이 마비된다. 이능 없이 에너미와 싸우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해독제를 삼킨 진족들이 내장을 회복하기 위해 몸에 이능파를 순환시켰다.
황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계의 입구를 향하며 청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와 용제건이 각각 이계 하나씩을 맡겠다. 남은 하나를 공략하고 와라.”
황호는 서둘러 이계 안으로 진입했다.
1초라도 빨리 이계를 공략하고 지하로 가고 싶었다.
* * *
이계가 공략될 거라는 내 말을 믿을 수 없는지 마족이 나를 비웃는 듯한 눈을 했다.
그러나 내 말은 허세도 뭣도 아닌 사실이었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부터 동결형 이계가 셋 존재한다는 걸 알았는데, 아무 대비도 안 하는 쪽이 이상했다.
‘이무기의 귀천에 남은 단서가 없었다면 위험했겠지.’
그사이에도 마족을 옭아매는 문자가 하나씩 늘어났다.
마치 옛 문인들의 서책에 남았을 법한 힘 있는 필체의 글자가 마족의 입을 틀어막았다.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하는 마족을 향해 말했다.
“지원을 기다리는 거야?”
마족은 동요한 티를 내지 않았다.
진입 직전, 황지호가 도원우를 쫓는 이들을 발견했었다.
그들은 도원우의 실력을 알고도 그를 추적했다.
도원우를 상대할 만한 플레이어들이라면 저렇게 자신만만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자들은 못 와.”
그러나 그자들이 호족의 수장을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마지막 글귀는 더 움직이지 못하게 된 마족의 몸 위에 직접 새겼다.
지직…… 지지직……!
제갈재걸의 언령이 마족의 피부를 태웠다.
태연을 가장하던 마족의 눈 핏줄이 일순 불거졌다.
문신처럼 새겨진 글귀를 보고 굴욕감에 젖은 듯했다.
그러나 언령이 몸에 새겨진 이상, 마족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호족의 고문실에 끌려가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마족을 처리했고, 도원우의 무사를 확인했다.
이제 다음 목적지로 향할 차례였다.
“……저거 놓고 가면 안 되지 않냐? 내가 끌고 갈게.”
데리고 가는 게 아니라 끌고 간다고?
말이 뭔가 이상했는데 유상훈은 자신이 한 말 그대로를 실행에 옮겼다.
유상훈이 마족의 한쪽 발목을 움켜쥐고 질질 끌었다.
이동 중에 에너미와 식물로 난장판이 된 지하 식물원 구조물 여기저기에 마족이 부딪쳤는데, 유상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굳힌 것뿐이니까 통각은 그대로일 텐데.’
마족이 뭘 느끼든 내가 알 바 아니긴 했다.
마족에게 신경 끄고 신중하게 목적지로 향하고 있을 때, 도원우가 물었다.
“당신은, 대체…….”
도원우는 내 정체에 관해 물으려 한 듯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 정체를 묻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나 보다.
앞장서서 걸으며 눈앞을 가로막는 자줏빛 덩굴들을 수차례 제거한 후.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다.
TC 연구소 지하 식물원.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실험실이었다.
우우웅……!
이계 금속으로 된 문 너머, 불길한 빛의 이능파가 요동쳤다.
“안에 있는 거 안다. 나와.”
나는 문을 향해, 정확히는 문에 설치된 렌즈를 향해 외쳤다.
그러자 조급하게 문이 열렸다.
콰앙!
문이 열리자 하얀 실험용 가운 차림의 인물 여럿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상희야!”
연구원 사이에 유상희가 있었다.
그리고 유상희의 목에는 주사기가 겨누어져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