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믿음과 시험 (6)
안다인의 ‘특이 체질’에 관해선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 학생회 임원들은 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학생회 임원들은 전원 플레이어로서 우수한 이들뿐이니, 구체적으로 그 ‘특이 체질’이 뭔지 몰라도 그 존재 자체는 인지하고 있을 거다.
안다인 주변은 공기가 다르다.
안다인과 보낸 시간이 적거나, 둔한 사람들은 그게 그녀의 카리스마성이나 기백 혹은 이능파의 영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다인의 ‘특이 체질’은 주인공 특유의 사기 능력으로, 확실히 이 세계에 실재한다.
‘안다인 곁에 있으면 안전할 거야. 아마 안다인 옆에서 떨어지면 독기를 느끼겠지.’
용족의 후예인 염준열이나 자체 회복이 가능한 곽경구면 모를까, 지명수는 특히 주의해야 할 거다.
‘……그리고 유상훈도.’
내가 걱정하는 게 전해진 걸까, 염준열이 성실하게 답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모처럼 공투를 제안해 주셨으니, 기대에 응할게요. 더 주의해야 할 건 없나요?”
착한 제자한테 주의 사항을 몇 가지 일러주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학생회 임원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유상훈과 합류했다.
까마귀 가면을 쓰고 내가 건넨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몹시 어색했다.
멀리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유상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우리 반 반장이랑 비슷한 힘이 있나 보네.”
유상훈도 안다인의 특이 체질에 관해 느끼고 있었나 보다.
이놈은 말은 안 해도 생각은 다 하고 있었나 보다.
유상훈의 예리한 시선이 또 내 쪽으로 향했다.
“얼굴은 가면으로 가리고 체격을 방어구로 좀 숨기긴 했는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알리바이는 확실하지만 유상훈도 알고 있는 인물의 외양을 빌린 건 실수였나?
하지만 최적의 선택은 이 인물의 모습을 빌리는 거였다.
‘무명의 운명’으로는 안다인의 힘을 사용해야 하니까.
난 대답할 의사가 없음을 전할 겸, 유상훈을 재촉했다.
“가자.”
“어.”
눈치 빠른 유상훈이 더 묻지는 않았다.
TC 연구소 내부.
도원우가 연구소를 완전히 마비시키고 제압을 끝낸 탓에 지나치게 조용했다.
덩달아 우리도 숨을 죽이게 될 정도였다.
“……춥네.”
지하로 한참 이동한 후에야 유상훈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안다인의 특이 체질은 독기를 상쇄하지만 냉기는 막지 못한다.
유상훈이 지금이라도 돌아가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담아 물었다.
“지금 돌아가도 돼.”
“안 간다.”
역시나 씨알도 안 먹혔다.
유상훈이 투덜거리며 방어구를 여미고 입도 다물었다.
다시 대화가 재개된 건 앞서 걷던 내가 멈췄을 때였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는 불투명한 문 앞.
언뜻 보기엔 전기가 끊긴 탓에 작동하지 않는 문으로 보였지만, 벽의 일부로 위장된 이능파 입력 패널이 존재했다.
“여기가 입구냐?”
“지도에 의하면.”
“어떻게 할 거냐.”
천동하가 보낸 자료에 의하면, 이 문은 이능파 인식을 통해 길을 연다.
물론 나나 학생회 일행은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상태다.
입력 패널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능파를 흘려 봤자 문은 열리지 않을 거다.
그러니 힘으로 해결할 생각이다.
“……UR 아이템 카드!”
내 손에 들린 아이템 카드의 색을 본 유상훈이 경악했다.
나는 ‘플레이어의 궤적’과 ‘무명의 운명’을 제외한 나의 무기 중, 가장 강력한 것을 꺼냈다.
파아앗!
내 이능파에 반응해 아홉 개의 이빨을 가진 쇠스랑이 나타났다.
처음 저강렵에 손에 있을 때와 달리 검게 물든 상보심금파의 갈래가 빛을 뿜었다.
마치 내가 무엇을 사용할지 아는 것처럼.
〈스킬 ‘만물 사용’이 발동했습니다.〉
“뒤로 물러나 있어.”
유상훈이 내 뒤로 뛰어든 순간, 곧바로 이능파를 발산했다.
내 ‘만물 사용’의 스킬 레벨은 현재 6 .
그에 걸맞은 힘을 보여 줄 때였다.
콰콰콰콰콰! 콰아아앙!
상보심금파의 갈래가 문을 꿰뚫고 폐쇄된 복도를 뒤흔들었다.
몇 개의 복도와 문으로 주변이 막힌 탓에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이능파의 잔해와 먼지구름이 가라앉자 조각난 문 너머가 보였다.
‘……광림과 무명의 운명에 이어서 상보심금파의 갈래까지 사용하니 이능파 소모가 심한데.’
상보심금파의 이빨이 이능파를 긁어 간 듯한 감각이었다.
상보심금파의 갈래를 아무렇지 않게 발동시키던 저강렵이 절로 떠올랐다.
내게 무기를 빼앗긴 처지라곤 하나 이능파의 총량은 무시할 게 못 되지 않을까?
천봉원수라 불리던 존재니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어.’
파아앗!
태연을 가장해 상보심금파를 회수하자 뒤에 물러서 있던 유상훈이 다가와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오, 쩐다. 전에 방윤섭이랑 싸울 때보다 스킬 레벨 오른 거 같은데.”
유상훈이 내 몸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 같긴 했지만, 어둠 속에서 난리를 일으킨 직후라 그런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이제 밑으로 내려가면 되냐? 밑으로 내려가는 길은 안 보이는데.”
지금 내 눈으로도 앞이 잘 보이진 않지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천동하의 광림을 쓸 여유는 없지만, 천동하가 제공했던 지도를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
또 나에겐 호랑이에게서 받은 눈이 있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파앗!
눈에 이능파가 감도는 것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밝은 곳에서 안광을 사용할 때에 비해 훨씬 시야가 넓어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부서진 문의 잔해에 파묻힌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쪽이야.”
“……너 별게 다 있네.”
유상훈이 칭찬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가 지하로 진입한 직후.
콰아아앙!
멀리서 이능파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회 임원들이 진입한 방향은 아니었다.
“도원우……!”
일단 도원우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 비슷한 거라서 그런지 유상훈이 그 강력한 이능파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도원우가 자신의 광림, 철쇄연쇄(鐵鎖連鎖)를 사용해 억지로 길을 연 것 같았다.
이능파의 진원지를 감지해 본 결과, 도원우는 내 예상과 다른 루트로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도원우는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의 핵을 바로 부술 생각인가!’
도원우가 여기에 온 이유는 여러 개 존재할 거다.
하지만 도원우가 이 시각에 이 연구소에 왔다면, 곧바로 실험실로 향할 줄 알았는데.
‘……설마 그건 파악하지 못한 건가?’
변수가 생겼지만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 도원우의 이능파를 감지하고 학생회 임원들도 그쪽으로 올 거다.
“……이게 다 뭐야.”
지하로 진입해 도원우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도중, 식물원처럼 꾸며진 지하를 본 유상훈이 인상을 구겼다.
조금만 방심하면 손끝이 굳을 것 같은 한기 속에서 생생하게 피어난 식물들은 척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자줏빛의 식물들은 침입자를 발견하자 더욱 강력한 독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독기 사이로 에너미가 배회하고 있었다.
기기긱…… 크르르…….
그극······ 기긱······ 기기긱!
유상훈이 주먹을 굳게 움켜쥐고 기척을 억눌렀다.
지금 우리가 상대해야 할 건 에너미가 아니었으니까.
‘진입 중 조우하는 에너미는 학생회 임원들이 맡기로 했다. 우리가 해야 할 건…….’
시야의 저편, 로브 차림의 누군가와 마주한 도원우가 보였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주제에 도원우는 도망갈 생각이 없는 듯, 전투 준비를 마치고 똑바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원우는 이미 이능파를 상당히 소모한 상태인지, 서포터에 맺힌 이능파는 평소보다 희미했고 손끝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을 수 없어 곧바로 뛰어들었다.
휘익!
나와 유상훈의 난입에 로브를 착용한 진족이 뒤로 뛰었다.
까마귀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인물의 등장에 도원우가 당황한 듯했지만, 유상훈은 알아본 것 같았다.
유상훈이 도원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만 온 게 아니야.”
학생회 임원도 제때 도착한 건지 총성이 울렸다.
탕! 탕탕!
끼에에에에!
파아아아!
서걱!
지명수의 광림에 의해 허공으로 떠오른 에너미들이 곽경구의 쌍검과 안다인의 이능총에 의해 토벌되었다.
사라지는 건 에너미뿐만이 아니었다.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했던 지하 식물원이 홍룡의 불꽃과 안다인의 특이 체질에 의해 정화되어 갔다.
“…….”
도원우는 모든 걸 혼자 해결할 생각이었던 걸까.
도원우는 마치 신기루라도 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TC의 도련님이 친구분과 같이 오셨군요.”
로브 차림의 진족은 아직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자신의 우세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주변엔 자줏빛 이능파를 머금은 씨앗이 떠다녔는데, 색이나 모양, 이능파의 질을 고려해 봤을 때 저건 ‘저주의 씨앗’이었다.
‘저 씨앗을 보니, 아바리티아의 사제와 연관된 마족인 게 분명해.’
비록 마신으로부터 문양이 새겨진 로브를 받을 정도로 고위 사제는 아니지만,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이 공간과 씨앗을 맡길 정도의 마족일 거다.
나는 가면 너머로 마족을 응시했다.
마족은 짧은 고민을 마치고 씨앗으로 도원우를 겨냥했다.
“숫자를 먼저 줄이는 게 좋겠군요. 살아남으면 성가신 존재, 또, 약해진 쪽을 처리하겠습니다.”
……까마귀 가면을 노리지 않고 도원우를 노린다고?
내 시험은 의외의 결과로 끝났다.
‘까마귀 가면이 ‘언령’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모르나?’
사관학교 교류전 당시, 아바리티아의 사제를 ‘언령’으로 제압한 건 까마귀 가면이었다.
그리고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자신이 본 것을 제단으로 전했을 터.
‘누군가가 정보를 쥐고 알리고 있지 않은 건가?’
이 실험실을 대리로 맡은 마족이 아닌 누군가.
그러나 아직 단서가 없었다.
이자에게 정보가 없다면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왜 독기에 침식되지 않는 거지?”
마족은 말을 걸어 시간을 끌고, 그사이 씨앗과 이 주변의 식물로부터 뿜어져 나온 독기에 우리가 잠식되길 기다렸나 보다.
마족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스킬을 발동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언령’을 사용합니다.〉
지금 내가 체격을 바꿀 겸,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위장하고 있는 인물은 제갈재걸이었다.
파아아……!
“이건, 설마……!”
“……제갈재걸 선생님?”
유상훈과 도원우가 경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족은 눈을 부릅떴지만, 그사이 제갈재걸의 힘으로 허공에 문자가 새겨졌다.
마족을 옭아매는 언어가 하나하나 추가될 때마다 그의 몸은 점점 굳어 갔다.
마족은 발악하듯 손에 숨겨 둔 주문서를 꺼냈다.
언령을 새기는 손보다 빠르게 복잡한 술식이 새겨진 주문서가 찢어졌다.
파아아아앗!
주문서에 새겨진 술식은 세 줄.
세 개의 이능파가 화살처럼 주변으로 쏘아졌다.
“지금부터 이계가 열릴 겁니다!”
마족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이 공간에 있는 디바이스들이 일제히 알람을 쏟아 냈다.
―삐이이이익!
플레이어 SAT-K가 보내는 이계 경보였다.
마족이 TC 연구소 주변에 잠복시킨 세 개의 동계형 이계를 활성화시켜 플레이어 위성이 이를 감지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계는 곧 공략될 거다.”
이미 수는 전부 둔 상태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