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믿음과 시험 (5)
결국 나는 유상훈을 공격하지 못했다.
“알았어. 같이 가자.”
감 좋은 유상훈도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몰랐나 보다.
유상훈은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생각했다.”
정말로 내가 잘 생각한 걸까?
도원우 쪽으로 갔다가 나와 싸우는 것보다 더 크게 다치진 않을까.
유상희가 유상훈을 어떻게 지켜 왔는데……!
“내 걱정은 그만하고 출발이나 해라. 어디로 가냐?”
유상훈은 내 속도 모르고 태평하게 말했다.
유상훈의 말투는 마치 ‘밥 먹었으니까 농구나 하러 가자.’라고 말할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TC 연구소에 얽혀 있는 건들을 생각하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데.
하지만 한 번 둔 수를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부터 TC 연구소로 갈 거야.”
“여기서 별로 안 머네. 거기에 가서 뭘 할 거냐?”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따라나선다고 한 거냐.
지금 향하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려 줘 봤자 유상훈이 생각을 바꿀 것 같진 않았지만, 일단 말해 보기로 했다.
“도원우 선배님이 단독으로 TC 연구소를 공격했어.”
도원우의 이름이 나오자 유상훈이 복잡한 얼굴을 했다.
유상훈은 도원우의 추한 행적에 휘말린 피해자 1인이니 저런 얼굴을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이동하며 대화를 계속했다.
“그곳에 진족이 있을 가능성이 커. 또 우리가 가면 이계가 발생할 거야.”
“우리가 가면……? 자연 발생 하는 이계는 아닌가 보네. 가든 같은 거냐?”
가든은 이계의 모든 것이 지배하에 있는 상태지만, 동결형 이계는 달랐다.
말 그대로 입구를 얼려 버린 것뿐이니, 이계를 얼린 주체는 동결 상태를 해제하는 것 외에는 이계에 간섭하지 못한다.
활성화시킨 순간부턴 일반적인 이계와 다를 바가 없지만,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해동되는 과정에서 이능독이 발생한다는 것.’
인간, 진족, 후예 가릴 것 없이 이능을 보유한 이들을 잠식하는 이능독.
이능을 가진 존재 중 그 이능독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원래 이계에 속해 있던 에너미들뿐이다.
현재 이능독에 대항하는 방법은 몇 가지 존재한다.
첫째는 오랜 시간을 들여 자연 회복 하는 것.
진족의 경우 자가치유력이 우수해 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지만, 그사이 이능 사용에 장애가 생기니 전투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둘째는 유상희 수준의 치유술사가 이능으로 치료하는 것.
셋째는 향록이 개발한 해독약을 복용하는 것.
단, 이 해독약에는 내장을 녹여 버리는 부작용이 있어 현시점에선 진족 외엔 사용이 어렵다.
‘그리고 넷째는…….’
TC 연구소 근처에 도달했을 때.
은호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황지호는 몰라도 은호의 메시지는 무시하기 어려웠다.
지금 내가 무슨 상황인지 알 텐데도 굳이 연락했다는 건 그만큼 급한 일일 테니까.
[천은하] 의신이 형, 안녕하세요.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천은하] 동하 형한테 받은 TC 연구소 구조도예요. 안내도에 나오지 않은 지하 결계의 위치도 포함되어 있어요. 지금 동하 형이 더 자세히 알아본다고 하셨어요.
역시 은호는 황지호와 달리 쓸데없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지도를 머릿속에 넣는 동안 은호가 메시지를 추가로 보냈다.
[천은하] TC 연구소에 형보다 먼저 도착한 은광고 사람들이 있어요.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라고?
저게 도원우나 황지호를 칭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은호는 디바이스 위치 추적 결과표를 보내 줬다.
그 표에는 도원우 외에도 학생회 소속 임원들의 이름이 있었다.
지명수, 염준열, 곽경구, 안다인…….
‘……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잖아!’
역시 총명하고 정의로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도원우의 위기를 못 본 척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나 기민하게 대처할 줄은 몰랐지만.
[천은하] 황호 님이 주변에서 대기 중이에요. 합류 여부는 의신이 형에게 맡길게요.
이 말을 끝으로 은호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은호가 왜 굳이 황지호의 존재를 상기시킨 건지 짐작이 갔다.
학생회 임원들을 어떻게 대처할 건지, 그 여부를 내 선택에 맡기겠다는 뜻일 거다.
지금 와 있는 학생회 임원들은 은광고가 자랑하는 유수의 플레이어들뿐인 걸 보니, 아마 지명수가 선별한 전투 요원인 듯했다.
어지간한 일에 죽거나 중상을 입을 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원 플마고 속에서 전선에서 최후를 맞이한 이들이기도 했다.
‘……황지호의 힘을 빌리면 학생회 사람들을 돌려보낼 수 있을 거야. 여차하면 호족을 불러서 전력을 보충해도 될 거고.’
나와 있는 유상훈도 마찬가지다.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황지호와 함께 유상훈을 제압하는 방법도 있다.
‘이대로 같이 싸우면 죽진 않더라도 다칠지도 몰라. 그냥 돌려보내고, 나랑 호족의 힘으로 대처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런데 선뜻 그렇게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와 같이 가겠다며 앞을 가로막던 유상훈의 결연한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떠오른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방송국 때 사건처럼 나 혼자 해결하려 들면,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닥치지 않을까.’
지금 염준열이 와 있는 걸 안 탓일까.
용족의 영역을 방문했을 때, 자조적으로 말하던 염준열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저는 아무것도 못 하고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라 기척을 숨기고 지켜봐야만 했어요.
―스승님께서는 저를 만나기 전부터 위험을 감수하고 많은 이들을 구했어요. 저를 제자로 받은 후에도 그러셨고요. 그러니 스승님께 있어서 오늘 사건은 큰일이 아니었던 거겠죠.
―스승님보다 한참 약한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없는 걸 알아요. 이런 말을 해 봤자 스승님이 곤란해하실 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전······.
같이 싸우지 않는 쪽이 유상훈과 염준열, 학생회 임원들을 더 힘들게 하진 않을까?
빈약한 근거에서 비롯된 생각이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점점 설득력을 더해 갔다.
유상훈이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괴로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다른 이들이 다치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나 혼자 돌입하는 건 제대로 된 수가 아닐 것이다.
‘……최선의 수를 생각해 내자.’
TC 연구소.
그 주변에 잠복한 동결형 이계.
호족이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 안 것.
아바리티아의 사제.
유상희와 유상훈 그리고 도원우.
도원우를 돕기 위해 온 학생회 임원들.
내가 파악한 모든 체스 피스와 수를 하나씩 점검한 결과, 답을 내렸다.
‘이번엔 같이 가자.’
생각대로 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거다.
“또 수상한 생각을 하나 보네.”
결론을 내릴 때쯤 유상훈이 쓸데없는 말을 한마디 했다.
들으나 마나 또 내가 수상하게 웃었을 거다.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아이템창에서 까마귀 가면을 꺼냈다.
“지금부터 얼굴을 가려. ‘눈’이 있어서 얼굴을 가리는 게 좋아.”
“그게 뭔데. CCTV 같은 거냐?”
“비슷해. 학교에서 지급한 방어구 중에 얼굴이 가려지는 타입 꺼내서 써. 없으면 줄게.”
마족의 영향권에 있으니 눈을 주의하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이 가면을 쓰고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염준열에게 공동 작전을 제안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는 사이.
유상훈의 손이 쑥 뻗어 와 내 가면을 빼앗아 갔다.
유상훈이 날렵하게 행동한 탓도 있지만, 적의가 느껴지지 않은 기척이라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유상훈은 그새 까마귀 가면을 썼다.
“나 이거 쓸래.”
“안 돼, 내가 쓸 건데.”
말려 봤지만, 역효과가 났다.
“안 되는 걸 보니 꼭 써야겠네. 이렇게 눈에 띄는 가면을 쓰는 걸 보니 미끼 같은 역할을 할 생각 같은데.”
……유상훈은 까마귀 가면에 관해 잘 아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저걸 어떻게 짐작한 거지?
저놈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유상훈이 가면 아래로 씨익 웃는 게 보였다.
“네 성격이면 예비 가면도 있겠지. 넌 그거 써라. 싫으면 다른 방어구로 가리든가.”
유상훈은 나한테 예비 가면이 있다는 것도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보통 까마귀 가면을 쓸 때는 전투를 할 때가 많은데, 나나 상대방의 이능으로 가면이 파손될 때를 대비해 예비 가면을 준비하는 건 당연했다.
‘마족이 까마귀 가면을 노릴 가능성이 있는데……!’
아바리티아 사제의 ‘눈’의 행방을 고려하면 그랬다.
그 위험성을 말하면 유상훈은 절대로 저 가면을 안 벗을 거고, 또 마족에 관한 정보를 알게 돼서 향후 더욱 위험해질 것 같았다.
유상훈만 저 까마귀 가면을 씌울 순 없어서 결국 나도 나란히 까마귀 가면을 쓰게 되었다.
“오, 체격도 바꾸나 보네.”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해 이 시각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존재할 법한 인물의 외견을 빌리고 겉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음성의 톤을 바꾸는 변조기를 착용한 후 말했다.
“학생회 사람들이 왔어. 얘기하고 올게. 여기에서 기다려.”
“……학생회 사람 다 왔냐?”
아마 유상훈은 유상희가 온 건지 확인하고 싶은가 보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학생회 사람이 전원 온 건 아니었으니까.
“오실 줄은 몰랐어요. 같이 싸우자고 제안해 주셔서 기뻐요!”
까마귀 가면을 발견하자 염준열이 곧바로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염준열은 다른 학생회 임원들의 눈을 의식한 건지 나를 ‘스승님’이라고 부르진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선 염준열의 스승, ‘그 단어’로 움직일 때의 말투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 밑에 뭐가 있는지는 알지?”
“네, 동하에게 연락받았어요.”
나는 간략하게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전했다.
기본적으로 나와 유상훈이 함께, 학생회 임원 넷이 함께 움직이라는 요지였다.
“제건이 형은요?”
“……따로 부탁할 일이 있으니까 여기에서 대기했으면 좋겠는데.”
용제건이 황홀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준열이와 따로 움직여야 하는 게 마음에 걸리는데…… 내가 꼭 여기에 있어야 하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제건이 잠깐 고민했지만, 염준열의 설득에 못 이겨 알았다고 답했다.
반은 염준열의 설득 덕이긴 하지만, 남은 반은 여기에 남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저런 것 같았다.
“용쌤하고도 아는 사이였구나.”
“용족과 관련된 분일까요?”
“방패가…….”
용제건이 여기에 남기로 하자 곽경구는 묘하게 아쉬워했지만 다들 그렇게까지 안타까워하진 않는 듯했다.
학생회 임원들은 얼굴을 가려 달라는 내 제안에는 조금 망설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염준열은 홍룡을 부리면 바로 정체가 들통나니까.
물론 그렇지만, 이전에 내가 환몽 경매장에서 홍룡을 부린 경력이 있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마족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면 성공이다.
“그럼 저희도 까마귀 가면을 쓸게요!”
……그렇다고 해서 까마귀 가면을 쓸 필요는 없는데.
말리려고 했지만, 염준열은 아이템 카드를 꺼내 실체화시켰다.
카드들이 순식간에 까마귀 가면들로 변해 버렸다.
저 까마귀 가면들은 아이템 카드로 존재했던 걸 보니, 그냥 가면도 아니고 이능을 통해 만든 아이템인 듯했다.
“주변에 이런 걸 잘 만드는 분이 계셔서요. 부탁드렸더니 여러 개 만들어 주셨어요.”
염준열은 쑥스러워하면서 말했다.
대체 왜 염준열이 까마귀 가면들을 들고 다닌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용제건이 뒤에서 실실 웃는 걸 보고 묻지 않기로 했다.
“이 까마귀 가면 혹시…….”
“최편득의 퇴폐 업소 붕괴 사건 관련 기사에서 본 것 같은데.”
안다인과 지명수가 까마귀 가면을 살펴보며 대화를 하는 게 들렸다.
과연 학교 주변에 일어난 일에 관해선 전부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학생회 임원 중에 현상 수배범 최편득 추적 파티에 소속한 사람이 있는 탓도 있겠지만.
“……도원우를 뒤쫓는다. 나와 내 일행은 반대편 입구로 돌입할게.”
나는 중요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나 안다인 옆에서 일정 걸음 이상 떨어져선 안 돼.”
나는 손에 ‘무명의 운명’ 카드를 쥐고 있었다.
‘무명의 운명’에 나타난 캐릭터는 안다인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