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39화 (438/925)

65. 숨겨야 하는 것 (3)

말이 겹치자 두 사제는 잠시 서로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말을 꺼낸 건 홍경복 화백 쪽이었다.

“그린이가 나와 같은 걸 생각했나 보구나.”

“……네, 옛날에 사부님이 말씀해 주셨던 게 생각이 나서요.”

민그린이 안경알 너머로 허공에 떠오른 지도를 바라봤다.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지호가 전개한 지도 위에 이무기의 귀천 사진을 겹쳐 놓은 바람에 마치 이무기가 한반도를 뒤덮은 것처럼 보였다.

‘그냥 보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첫 작품다운 멋진 그림인데, 저 그림 속에 숨겨져 있는 걸 생각하면 좀 불길하게 보여.’

‘이무기의 귀천’ 속의 이무기는 바람과 구름을 뚫고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이무기의 비늘이 현란한 색으로 변하고 있었는데, 이 비늘 사이에 지도가 숨어 있었다.

척 보기엔 무의미한 점과 선으로 보이는 그것들은 한반도의 지력 지도 위에 동결형 이계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반도의 가장 위대한 화백의 그림에 저걸 숨길 생각을 하다니. 대범한 건지, 지나치게 신중한 건지…….’

굳이 따지면 둘 다인 것 같았다.

옛 한국 지부장의 대범한 선택 덕에 이 귀중한 단서가 도품으로 해외로 팔려 나갔지 않았던가.

그에 반해 그림 자체에 걸린 보안은 엄중하여 누구도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림에 단서가 있다는 걸 알고도 한참을 헤맬 정도의 신중함 덕에 고생했다.

하지만 옛 한국 지부장의 그 고집이 홍경복 화백과 민그린을 지켜 주기도 했다.

‘흑막이 알았다면 이 그림이나 홍경복 화백, 민그린이 무사할 리가 없어. 아직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강력한 통찰안이 없다면 비늘에 숨겨진 점과 선을 찾을 수 없다.

설령 그걸 찾아내더라도 한반도의 지맥에 관해 알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이게 지도라는 걸 추측해 내도 축척, 좌표 따위를 알 수 없으니까.

‘그런데 숨기고 있던 게 하나 더 있었나 보네.’

홍경복 화백은 민그린이 설명하길 바라는 건지, 조용히 황명호의 비서가 내온 차를 마시고 있었다.

민그린이 제 사부의 뜻을 헤아리고도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이 그림을 그릴 때, 몇몇 비늘에는 특별한 색료를 사용해 색을 입혔다고 하셨어요. 저 그림을 그려 달라 하신 분의 부탁이라면서요.”

겉으로는 전혀 구분이 가지 않았는데.

민그린은 그 옛 한국 지부장이 했다는 부탁에 관해 간략히 설명했다.

옛 한국 지부장은 홍경복 화백과 한 번 싸울 정도로 아주 까다롭게 요구를 한 모양이었다.

비늘의 위치가 지정한 부분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림을 파기하고 재료를 건네며 다시 그려 달라 요구할 정도라 했다.

“……성 형은 예전부터 까탈스러웠지.”

홍경복 화백은 씁쓸해하는 얼굴로 고인을 회상했다.

그 옛 한국 지부장의 피를 이은 성국언이나 성시완의 호탕한 성격을 생각하면 까탈스러움과 거리가 멀어 보였는데.

실제 그 한국 지부장과 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다.

한편,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민그린에게 물었다.

“굳이 비늘에 관해 언급한 걸 보면, 비늘 중에 아직 내가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나 보군.”

“……네.”

설마 신화계 호족의 안광 스킬로도 파악하지 못한 비늘이 있었나!

두 사제에게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비늘에 입힌 색료가 날아간 건가?

아니, 그 까탈스러웠다는 성 형의 주문대로 제작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추리를 하는 사이, 민그린은 계속 설명했다.

“이무기의 귀천은 평론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어요. ‘귀천’이 이무기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고, 용이 되어 하늘로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어요.”

“관련 기사를 본 것 같군.”

기자들은 두 사제에게 이 그림의 의미를 집요하게 물었다.

두 사람은 그럴 때마다 모호한 말로 답하곤 했다.

황지호는 이무기의 귀천에 관해 조사하면서 저 갑론을박에 관해서도 알았나 보다.

“일반적으로 ‘귀천’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으니 다들 전자라는 게 주류였지만, 그림을 보고 의견을 달리한 이들도 있었지.”

황지호가 손가락을 들어 어느 비늘 하나를 가리켰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을 받아 다양한 색으로 빛나는 비늘 중, 유일하게 검게 칠해진 비늘이었다.

그 비늘은 단순히 검게 칠해진 것뿐만 아니라, 다른 비늘과 달리 뒤집힌 형태였다.

역린(逆鱗).

용에게 존재한다는 약점, 뒤집힌 비늘이었다.

“역린이 존재하니, 이 이무기는 용이 되는 중이라는 게 그들이 하는 주장의 근거였다.”

역린의 색이 죽은 것처럼 검게 물들었으니 결국 이 이무기는 죽음을 맞이하는 거라는 말도 있었지만.

민그린은 황지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역린도 그분의 의뢰로 넣은 거예요. 그런데 저 지도에는 역린이 표시되지 않아서요.”

저 역린도 옛 한국 지부장이 의뢰한 부분이었나.

그런데 왜 표시가 안 된 거지?

아니, 무엇보다 저 역린이 가리키는 곳이 마음에 걸렸다.

지도에 굳이 표시하지 않아도 저 역린이 가리키는 장소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은광고를 가리키고 있군.”

저 역린이 있는 위치와 지맥 지도를 겹쳐 좌표를 찍으면 은광고를 가리켰다.

은광고의 학교 부지는 약 50만 평인데, 그중에서도 좌표가 가리키는 곳은 중앙 구역이었다.

옛 한국 지부장.

이무기의 귀천.

중앙 구역.

셋을 고려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비밀 결사가 모인다는 비밀 통로는 중앙 구역에 있어. 거길 가리키는 건가!’

은광고 괴담 중, 학생부와 선도부가 만들었다는 비밀 결사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 모임은 실재했고, 학생회관과 선도부회관 사이에 숨겨진 비밀 장소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비밀 장소가 위치한 곳은 마침 중앙 구역이었다.

역린이 가리키는 위치는 아마 학생회와 선도부의 ‘비밀 결사’가 모이는 장소일 게 분명했다.

‘황지호한테 말해서 그 비밀 통로에 숨겨진 비밀을 캐 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러나 나는 입을 떼지 못했다.

홍경복 화백과 민그린에게 추가로 질문을 던지는 황지호를 두고 계속 고민했다.

결국 계속 입을 다문 채로 있었다.

‘……내 추측을 바로 말하기엔 뭔가 마음에 걸려.’

성시완이 한 조사에 의하면 비밀 결사 선정 과정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학생회나 선도부에 소속되어 있을 것.

둘째, 비밀 결사 멤버의 추천을 받을 것.

셋째, 진족이나 후예가 아닐 것.

이 조건 중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세 번째 조건이었다.

‘왜 진족이나 후예는 비밀 결사에 가입시키지 않은 걸까.’

황지호를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옛 한국 지부장이 저렇게까지 하면서 숨겨야 했던 비밀이라면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비밀 결사에 관련한 괴담 건으로 의뢰한 성국언도 진족과 후예를 경계하지 않았던가.

그 이유와 비밀을 알기 전까지 진족인 황지호에게 바로 내가 생각한 바를 말하기가 좀 그랬다.

“이 비늘이 덮은 구역은 중앙 구역이군. 중앙 구역과 역린이라…….”

황지호는 곧바로 조사를 시작했다.

옛 한국 지부장이 살아 있던 시점에 중앙 구역 전역에 눈에 띄는 사항은 없는지 찾아보는 듯했다.

황지호가 한창 태만하던 시절의 이야기라 직접 기억하고 있는 게 얼마 없는 듯했다.

‘황지호가 하는 조사도 아마 무의미하지 않을 거야. 무슨 수로 비밀 통로를 만들고, 그런 이계 시뮬레이터를 준비했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으니까.’

황지호에게 비밀 결사에 관해 말하는 건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

물론 일의 중대함을 고려하면 시간을 길게 끌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이유를 파악하고 전하는 게 최선이겠지.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비밀 결사’에 관해 말해야 해.’

한반도를 뒤덮은 이무기.

그 이무기가 용이 될지, 죽음을 맞이하여 하늘로 돌아갈지는 검은 역린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조만간 성시완과 다시 이야기해 봐야겠다.

지익회장은 계이담이 이어받았지만, 수능이 얼마 안 남아서 3학년인 성시완은 바쁠 텐데.

‘아니면 계이담하고 이야기해야 하나? 하지만 계이담도 바쁠 거고, 몇 번 말해 본 적도 없고.’

은휘관을 나오는 길.

함께 교실로 향하던 민그린이 한마디 했다.

“친척이라서 그런지 말투가 비슷하다.”

“……비슷해?”

“응, 지호랑 이사장님.”

친척은 아니고 그냥 황지호가 이사장 본인이다.

안타깝게도 그 오류를 정정해 줄 수 없었다.

황지호는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왠지 편하게 말했어. 이사장님이랑 얘기하는 건 처음인데.”

민그린은 낯선 사람과 길게 대화했다는 사실에 만족한 것 같다.

그림에 관해 설명하고, 황지호의 질문에 조리 있게 답하는 민그린의 모습을 떠올리니 흐뭇해졌다.

민그린이 만족했으니 나도 만족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    *    *

점심시간을 이용해 방윤섭은 빵을 사러 잠시 교문 밖으로 나왔다.

MITRON에 들려 조의신이 미리 결제해 뒀다는 빵이 들어 있는 봉투를 받으러 갔는데, 이젠 파티시에가 방윤섭의 얼굴을 알아보곤 곧바로 봉투를 내줬다.

예전엔 그래도 이름 정도는 확인했지만, 이젠 강제 단골이 되어 파티시에는 물론 알바생도 방윤섭의 얼굴을 알아봤다.

“아, 저번에 계절 한정 쿠키가 매진되는 바람에 못 사셨죠. 오늘은 재고가 남아 있어요.”

파티시에의 악의 없는 말에 방윤섭의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방윤섭은 매번 MITRON에 들락날락하다 보니 계절 한정 메뉴에 관해 아주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던 여학생에게 주려고 몇 번 쿠키를 산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못 사 갔는데, 저 파티시에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하지만 이제 저걸 사 봤자 줄 상대가 없었다.

“안 사요.”

방윤섭은 그렇게 내뱉곤 빵이 담긴 봉투를 들고 MITRON을 나갔다.

몹시 예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파티시에는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세상에 불행한 게 저 혼자뿐인 것 같아 그 모습에 괜히 더 열 받았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순간 귀신같이 튀어나와 자신을 붙잡은 목우람과 맹효돈의 존재를 떠올리니 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주수혁 그 새끼한테 안 걸린 게 다행이네.’

주수혁을 떠올리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주수혁과 동창인 그 여학생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윤섭은 인상을 구기며 빵 배달 장소인 1학년 0반으로 향했다.

오늘의 빵 배달 상대는 1학년 0반의 현악부 소속 여학생이었다.

교문을 막 통과했을 때, 방윤섭의 디바이스에서 착신음이 울렸다.

처음 보는 디바이스 코드로부터 전화가 와 있었다.

“여보세요?”

[아, 난데. 오랜만이야!]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 같기도 한데, 보나 마나 피싱 전화일 것 같았다.

척 들어도 어른 목소리였으니까.

방윤섭한테 저렇게 오랜만이라며 연락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방윤섭은 목우람 같은 호구가 될 생각은 없었기에 바로 성질을 냈다.

“아, 꺼져!”

방윤섭은 화풀이하듯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막 1학년 0반 교실로 향할 때.

복도에서 주수혁과 얘기하는 그 여학생이 보였다.

방윤섭은 엉망인 기분으로 그 장면을 못 본 척하고 뛰었다.

속에 시커먼 무언가가 차오르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이를 숨겼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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