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숨겨야 하는 것 (4)
그 이후로 얼마간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우리 반의 경우 특히 그랬다.
한이와 독고미로 사이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두 사람은 종종 매점에 같이 가거나 공청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저렇게 보면 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 같은데.’
대련 이후에 독고미로의 홈마, 정해온이 한이와 이야기하는 걸 목격했다.
한이는 독고미로에게 직접 묻진 못해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황지호가 철저하게 흔적을 지워 버리는 바람에 한이의 힘으로 알아내긴 힘들 것 같지만.
‘권레나는 이번 주 내내 바빠 보였어.’
권제인이 나에게 연락해 권레나를 잘 챙겨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아마 권레나가 이여름에 관해 알아보려고 애쓰는 걸 눈치챘을 거다.
권레나가 친언니라고 믿고 있는 이여름에 관련된 일이니 개입할 생각을 못 하고 일단 지켜보는 듯했다.
‘홍규빈 말로는 현재 남궁물산 이계 산업 1사업부를 압수 수색 중이라고 했지.’
협회의 규정 집행부는 법원의 영장을 받아 움직인다.
정부와 협회 사이가 점점 나빠지고 있어서 그런지, 단순히 절차상 문제인지 영장을 받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영장은 사법부에 속한 법원이 발부하잖아. 그러니 협회와 행정부가 사이가 좋건 나쁘건 상관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세상사는 그렇게 공정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특히 플레이어들에겐.
그런 상황을 타파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있었다.
‘법 앞에 플레이어가 공정하게 대우받는 게 꿈이라고 했어.’
그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이능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로펌 소속 파트너 변호사였다.
억울한 일을 당한 플레이어의 무료 변호가 그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주 업무였다.
‘아이템 제작이나 이계 공략을 할 만한 이능은 없는데도 플레이어로 분류되는 바람에 차별당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변호사 활동으로는 그리 수입을 얻지 못해 가끔 이계 공략을 다니곤 했다.
가끔이라고 표현은 해도 사실 일이 얼마 없어서 이계 공략이 주 업무라 할 정도였다.
아예 그 법률 사무소를 하나의 이계 공략 프로 플레이어 팀 취급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사건을 수임한 것을 계기로 파트너 변호사가 플레이어블 캐릭터로서 플마고에 등장하게 된다.
‘……지금 시기에선 흑막과 엮일 일이 없겠지.’
하여튼 협회는 결과적으로 압수 수색 영장을 얻고, 남궁물산 이계 산업 1사업부 기습에 성공했다고 한다.
규정 집행부는 신속하게 모든 디바이스와 칩, 인쇄된 서류 등을 회수했다.
대기업을 상대로 압수 수색을 벌인 거니 언론에 대서특필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무슨 수를 쓴 건지 잠잠했다.
남궁물산에 관한 기사를 찾아봐도, 오디션 프로그램 ‘플레이리스트’ 최후의 3인 중 하나가 직원이었고, 녹화 당시 사건이 터져 휘말렸다는 내용이 나올 뿐이었다.
홍규빈의 말로는 회수한 자료의 양과 내용을 고려했을 때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고 하지만, 마음에 계속 뭔가가 걸리는 모양이었다.
[홍규빈] 사무실 압수 수색은 무사히 진행됐지만, 뭔가 이상하구나.
[홍규빈] 직원들과 인터뷰할 때에도 서로 모순된 증언을 하고 있으니, 객관적인 자료 수집이 필요했다만…….
[홍규빈] 영장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어.
[홍규빈]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드는구나.
홍규빈은 예지 스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의 예감은 허투루 볼 게 아닌데.
예지 스킬이 발동한 건 아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듯했다.
자료 분석이 지연되는 중이라 하니 당분간 좀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마 바쁘겠지. 시간이 필요할 거야.’
TC 연구소 사건도 같이 터지는 바람에 한 번에 두 대기업을 상대하게 되어 협회 직원들이 죽어 나가는 것 같다.
은광고 축제는 한참 남았긴 한데, 과연 홍규빈이 제갈재걸 3D 화보집을 보러 올 수 있을까?
일단 초판 팸플릿이나 인쇄본이 있으면 구해 줘야겠다.
한편, 이번 주 내내 우리 반의 등교 거부자들, 관종1, 2가 자주 발견되었다.
‘왜 학교는 나오면서 출석은 안 하는 건데…….’
자칭 루이스 페레나, 괴도 네온과 구슬비는 우리 반 주변을 맴돌며 집요하게 우리를 관찰했다.
언제, 어떻게 등장하면 주목을 끌 수 있는지 연구 중인 듯했다.
두 사람은 플마고 속에서도 쓸데없는 일에 체력과 정신력을 쏟았는데, 실제로 보니 더했다.
이 관종들은 함근형 선생님과 황지호에 의해 곧잘 발견되었으나 발견되기 무섭게 내뺐다.
최적의 등장 타이밍은 잡지 못한 것 같지만, 도망 실력은 어마어마하게 향상된 것 같았다.
‘……저렇게 잘 도망치면, 당분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저 둘은 흑막에 대항하다가 최후를 맞이하지 않는가.
지금 두 사람이 흑막과 마주칠 만한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억지로 끌고 나와 등교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둘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우선 등교 중인 아이들이나 걱정해야겠다.’
걱정해도 아무 소용 없었기에 생각을 미뤘다.
이번 주에 우리 반에서 눈에 띄는 존재를 꼽자면 단연 용제건이었다.
용제건과 김신록은 또 싸운 것 같았다.
우연히 두 사람과 그 건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묻지도 않았는데 용제건이 그 얘기를 꺼냈다.
―신록이가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내가 너무 쉽게 깨서 화났나 봐.
―……이벤트요?
―뭐라고 설명해야지…… 아, 보물찾기 이벤트였어.
……보물이라고?
용제건을 위해 보물을 숨기는 김신록의 모습은 조금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역시나 김신록이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물 좋아하네.
―응, 좋더라.
김신록이 비꼬는 말을 했지만 용제건은 도리어 기분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속 긁는 소리를 하며 용제건이 품에서 정사각형으로 된 공간을 꺼냈다.
그 공간 안에는 작은 압정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걸 보니 상황이 짐작이 갔다.
‘김신록이 보복을 위해 압정을 숨겨 뒀는데, 그걸 용제건이 다 찾아 버렸구나.’
용제건은 주먹만 한 공간을 손에 쥐고 김신록에게 흔들어 보였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김신록 표정이 몹시 안 좋아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김신록의 깜짝 압정 이벤트는 빡침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 같은데, 용제건은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 같았다.
한적한 복도에서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 안다인이 나타났다.
안다인의 등장에 김신록이 당황하며 이능파로 강화한 샤프심을 숨겼다.
―김신록 선생님, 학급 운영에 관해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요.
안다인의 말에 김신록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학급 운영이란 말에 죄책감이 든 것 같았다.
말로 표현은 안 했지만 속이 훤히 보였다.
제자가 상담해 올 만큼 고생하고 있는데 자신은 저런 용을 상대하는 데 시간을 소비한 게 미안한 것 같았다.
―……그래. 말해 보렴. 상훈이가 요새 등교를 안 하니까 다인이 부담이 크겠구나.
―아니에요, 제가 자리를 비울 때가 있으니까 임시 부반장을 뽑고 싶어서요. 반 애들도 기다리고 있어요.
―상훈이한테는 말해 뒀니?
―네, 이대로 부반장을 바꿔도 상관없다고 하던데…… 그건 말리고 싶어요.
안다인은 자연스럽게 김신록과 용제건을 분리시켰다.
안다인은 보란 듯이 압정 상자를 흔드는 용제건에게 잠시 시선을 줬는데, 그 눈빛이 몹시 날카로웠다.
‘……스코프 너머 타깃을 보는 눈이잖아.’
신탄의 사수 안다인은 그 이명에 걸맞게 보통 맨눈으로도 저격하지만, 가끔 스코프도 쓴다.
날씨가 나쁘거나 거리가 지나치게 멀 때.
그럴 때 총기에 망원 조준경을 부착해 타깃을 바라보는데, 플마고에서 안다인으로 플레이할 때 그 장면이 컷신으로 삽입되곤 했다.
잠깐이라고 하나 안다인은 그 눈으로 용제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유상훈이 했던 말을 떠올리게 했다.
―너희 부담임이 우리 담임한테 자꾸 시비 거는 것 같던데.
―우리 반 담임 팬이 많아. 계속 담임이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용제건을 공격할 예정이란다. 난 안 말릴 예정이고.
말리지는 않아도 참전할 생각은 없어 보였던 유상훈이 요새 등교를 안 한다.
그렇게 되면 1학년 1반엔 강경파만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1학년 1반이 용제건을 노릴지도 모르겠는데.’
용제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황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유상훈과 같은 입장을 취하기로 했다.
‘계이담이나 성시완하고 이야기해 봐야 하는데.’
‘이무기의 귀천’의 또 다른 비밀이 밝혀졌으니, 비밀 결사에 관해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 지익회의 두 사람과 이야기해 보려 했는데 지익회는 몹시 바빠 보였다.
―3학년 0반 선배님들이 교직원 전용 매점을 습격했습니다!
―지금 매점 직원과 3학년 0반이 대치 중이라 합니다.
―야, 이담이 불러!
―……그냥 시완이 형 부르면 안 될까?
지익회에 찾아간 날, 지익회는 3학년 0반이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바빠 보였다.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학생들이 이용하는 매점에서 빵을 다 털어 가는 것만으론 부족했나 보다.
이들의 목적은 교직원 매점의 빵 확보 및 3학년 0반의 강한 담임 임연화가 좋아하는 간식을 매진시키는 것이었다.
은광고 3학년이라 생각할 수 없는 유치함이었으나 임연화가 처음으로 약간 데미지를 입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선생님 간식이 그렇게 탐났니? 너희들이 이렇게나 비뚤어지다니……! 훈련이 부족했구나!
임연화가 거의 입에 달고 산다는 스틱형 소시지가 완전히 매진되자, 그녀는 매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제자들의 인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듯했다.
조금 늦은 것 같긴 하지만.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승리했다고 좋아할 뻔했지만, 임연화가 개인적으로 보관 중이던 100개짜리 소시지 묶음을 몇 개나 꺼내며 자애롭게 웃었다.
―앞으론 매점에 폐 끼치지 말고 선생님한테 달라고 하렴! 선생님하고 팔씨름해서 이기면 한 묶음씩 줄게.
임연화가 확보한 재고량은 어마어마해 사실상 타격이 없었다.
결국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임연화의 즐거움을 뺏는 데에도 실패했다.
이들은 임연화에게 팔씨름으로 도전했다가 다 지쳐 나가떨어지고, 참가상으로 스틱 소시지를 하나씩 받았다고 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선배놈들의 연약한 팔 근육을 걱정한 강한 담임의 훈련이 더욱 가혹해진 건 덤이었다.
‘결국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얻은 건 소시지 하나뿐이구나.’
선배들이 패배했지만, 조금도 안쓰럽지 않았다.
안 보이는 곳에서 운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평화롭게 주말을 맞이했는데, 아침부터 귀찮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꾀돌이] 주말인데, 바빠요?
[꾀돌이] 귀국 기념 선물 드리고 싶어요!
[꾀돌이] 가능하면 오늘이요.
딱히 받고 싶지 않은데.
선물을 두 개나 준비한 데다 존댓말까지 쓰고 있으니 영 내키지 않았다.
다행히 변명이 있어서 선물 받기를 미룰 수 있었다.
[나]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뵙기 어려울 것 같아요.
대충 정중하게 메시지를 마무리하고, 디바이스 화면을 껐다.
내가 메시지 작성을 마친 걸 확인한 천동하가 물었다.
“의신아, 들어갈까?”
“네.”
황명호 대저택 앞.
나와 천동하가 초인종을 울렸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