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숨겨야 하는 것 (10)
백호는 은호의 대국 요청을 받아들였다.
코인 토스 결과 백호는 백을, 은호는 흑을 쥐게 되었다.
선수(先手)는 백호, 후수(後手)는 은호였다.
“시작하죠.”
은호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체스 클락을 눌렀다.
체스 클락의 초침이 움직이기 무섭게 백호의 하얀 체스 피스가 체스보드 위에서 움직였다.
치열하게 수 싸움이 오고 갔지만 별채는 무척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기물을 움직이는 소리뿐.
겉보기에 대국은 조용히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한 수, 한 수는 칼부림을 하는 것처럼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긴 접전 끝에 체스판 위 기물의 수와 대국 시계에 표시된 시간이 0에 가까워졌다.
“체크.”
긴 침묵을 깬 건 백호의 체크메이트 선언이었다.
한참을 체스보드를 내려다보던 은호가 흑의 킹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대국이 종료되었다.
은호가 백호와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황호 님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만한 실력이네요.”
“황호에게 들었나?”
“네, 황호 님께 두 분이 대국하셨다고 들었어요. 백호 형님은 흥미를 가진 것은 금방 익히셨죠. 그 흥미의 대상이 보통 무(武)에 한정되어 있었지만요. 언제부터 체스를 두게 되신 거죠?”
“…….”
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호는 처음부터 백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말을 계속했다.
“의신이 형은 체스 기사를 지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우상이었죠. 저도 그중 하나였고요. 저는 의신이 형의 기보를 읽고, 복기하고, 연구했어요. 아무리 시뮬레이트해도 제가 의신이 형에게 진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죠. 하지만…….”
은호의 손이 체스보드 밖에 있던 체스 피스 쪽으로 향했다.
기물을 움직이던 은호는 외통수가 나오기 직전의 대국 상황을 재연한 후 손을 멈췄다.
“적어도 의신이 형에게서 스테일메이트를 따낸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을 거듭했어요. 실력이 저보다 한 수 위인 기사에게서 스테일메이트를 따낸 적도 몇 번 있었죠. 그런데 백호 형님께서 제가 시도한 스테일메이트를 완벽하게 박살 냈네요.”
은호가 백호 진영에 서 있는 백의 나이트를 가만히 바라봤다.
저 나이트의 다음 움직임으로 은호가 시도한 스테일메이트가 봉쇄되고 은호가 궁지에 몰렸었다.
스테일메이트를 시도한 대국을 철저하게 박살 내는 게 마치 스테일메이트리스를 연상하게 했다.
“백호 형님도 스테일메이트를 싫어하시나요?”
은호는 백호가 ‘그렇다.’라고 대답할 거라 생각했다.
이 정도로 스테일메이트리스와 닮은 수를 둔다면, 응당 비슷한 사고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은호의 예상이 빗나갔다.
“……아니, 싫어하지는 않는다.”
백호는 하얀 나이트를 움직이며 말했다.
“다만, 막을 수 있다면 막을 것이다.”
* * *
메시지를 보낸 건 은광고 서문 앞 유명 베이커리, MITRON의 파티시에 류장.
그의 정체는 방관과 침묵의 까마귀 마왕, 시델렌티움의 대리인이었다.
‘까마귀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면 언젠가 대리인을 내세워 접근할 것 같긴 했어. 그게 MITRON의 파티시에인 줄은 몰랐지만.’
류장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영국에서였다.
런던탑에서 갑자기 등장한 류장은 포모르 마족이 주최한 파티에서 까마귀 가면을 쓰라는 말을 전했다.
그 가면을 쓰는 바람에 괴도 네온과 본의 아니게 엮인 걸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결과적으로 영국 사건은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단순히 까마귀 마왕을 대리해서 파티에 참석한 건 아니었어. 미처르도 류장에 관해 말했잖아.’
핼러윈 파티 당시, ‘루의 창’ 앞에서 운명력이 발동되어 미처르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미처르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이번 건에 있어서 진족과 우리를 경계했지만, 인간에 관해선 신경도 쓰지 않았지. 괴도와 몽마의 제자, 까마귀 마왕의 아이 그리고 왕의 재질을 타고 난 인간 일행과 너. 다들 우리가 직접 안내하거나 정보를 제공했단다.
까마귀 마왕의 아이는 류장을 칭하는 것일 텐데.
류장은 그날 무엇을 한 걸까?
[류장] 안녕하세요, 조의신 학생.
[류장] 내일 바쁜가요? 잠깐 뵙고 싶은데요.
류장이 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았지만, 무슨 의도로 연락했는지는 명백했다.
그때 류장은 시델렌티움에게 건네기로 한 물건을 받아 가지 않았기에 조만간 연락하리라곤 생각했다.
‘들으나 마나 슬슬 ‘부(富)와 생명의 무게’를 건네달라는 이야기겠지.’
까마귀 마왕은 저번에 말한 대로 계절이 바뀌기 전에 거래를 완수할 생각 같았다.
[나] 괜찮아요. 드리기로 약속한 아이템을 가지고 갈게요.
[류장] 조의신 학생과는 이야기가 잘 통해서 좋아요.
류장은 흡족해하며 내게 선물을 줄 생각인지 먹고 싶은 메뉴가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다.
한 번 사양했지만, 저쪽도 물러설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숙사 애들과 먹을 만한 메뉴 몇 개를 제시한 후에야 대화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확인한 건, 가장 활발하게 메시지가 올라오는 신문부의 단체 메시지방이었다.
‘문새론은 해외에서 열심히 취재 중인가 보네.’
단체 메시지방 대부분의 메시지가 해외 취재 여행 중인 문새론이 쓴 것들이었다.
문새론은 신문부 단체 메시지방에서 취재한 내용과 찍은 사진들을 업로드했다.
[문새론] 이번 해외 취재 여행은 몹시 보람찼음요!
[문새론] 생각지도 못한 분을 뵈었고, 단독 인터뷰권도 따냄. 기대하시라!
문새론은 그 ‘생각지도 못한 분’의 정체에 관해서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문새론이 이 단체 메시지방에서도 취재 내용을 숨기는 건 처음 봤다.
대체 해외에서 누구를 만났길래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기로 했다.
그다음으로 확인한 메시지는 아주 길었다.
[장남욱] 오늘 까마귀 가면을 완성했어. 상훈이가 보낸 사진을 많이 참고했지. 나름의 어레인지를 하긴 했는데, 기본적으로 통일감을 주기 위해 애썼어. 그러다 보니 가공에 조금 고생했어. 이계에서 나오는 소재를 사용한 덕에 카드화도 가능해. 나랑 시후 솜씨가 별로 좋지 못해서 희귀도는 아주 낮고, 방어력도 거의 없지만.
[장남욱] (사진)
장남욱이 만든 까마귀 가면도 카드화가 가능하다고?
솜씨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한 것치곤 결과물이 굉장했다.
칭찬해 줄 일인데, 하필 만든 게 까마귀 가면이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이번에도 짧은 답변을 하게 될 것 같다.
씁쓸한 마음으로 사진을 확인했는데, 사진에 찍혀 있는 걸 보고 순간 멍해졌다.
‘……왜 이렇게 많지?’
사진에 있는 건 수십 개 정도 되어 보이는 까마귀 가면‘들’이었다.
기껏해야 장남욱 것, 도시후 것 두 개가 있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제각각 점이 있다거나, 눈 주변에 안경 모양 무늬가 들어갔거나 하는 등 저마다의 개성이 있었지만 어쨌든 다 까마귀 가면들이었다.
[유상훈] ㅋㅋㅋ
유상훈이 ‘ㅋ’를 세 개나 찍은 걸 보니 박장대소하고 있는 것 같다.
장남욱은 왜 저렇게 까마귀 가면을 잔뜩 만든 건지 설명했다.
[장남욱]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단체 행동을 했다고 들었어. 두 개만으로는 모자랄 수도 있잖아? 만약을 대비해 여러 개 만들어 놓으면 좋을 것 같아.
제천대성은 학생회 임원들이 까마귀 가면을 쓰고 온 걸 보고 그런 소리를 한 것 같다.
왜 불필요한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장남욱이 어떤 만약의 상황을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사관학교에 쳐들어가 가면을 다 몰수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밀린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변하다 보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목우람의 암살 계획 건에 관해서도 생각해야 하는데…….’
디바이스를 끄고 서돌이 건넨 봉투의 내용물을 머릿속에 새기며 잘 준비를 했다.
서돌 하니 느루의 앰배서더 운운하던 것도 아주 잠깐 떠올랐지만 그건 금방 잊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침.
휴점 표시 팻말을 건 MITRON의 안.
여기저기에서 증식한 까마귀 가면의 원 모델을 만나게 되었다.
인사부터 하니 시델렌티움이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 조의신. 여전히 예의 바르구나.
까마귀 가면 틈으로 입이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덕에 입술의 움직임으로 내용을 파악해야 했다.
시델렌티움은 ‘침묵’을 수식언으로 삼는 만큼 소리를 내어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단 인사는 존댓말로 했는데, 시델렌티움이 말을 편하게 해도 좋다는 허락을 상기시켰다.
―나는 네가 까마귀의 가면을 통해 보여 주는 것들이 마음에 든다. 그러니 허락을 거둘 생각은 없다.
요컨대, 까마귀 가면을 쓰고 보여 주는 것들이 마음에 드니 말을 놓고 친하게 지내자는 건가?
시델렌티움은 다른 마족들에 비해 인간에 상당히 호의적으로 굴지만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았다.
그래도 장단은 맞춰 주기로 했다.
“알았어.”
내 짧은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시델렌티움과 류장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류장은 새파란 고교생이 자기가 모시는 마왕에게 반말을 하는데 신경이 안 쓰이나.
호족들도 내가 백호군이나 황지호한테 반말을 써도 뭐라고 안 하긴 하지만.
바로 아이템 카드를 건네고 오늘의 만남은 끝일 줄 알았는데, 시델렌티움이 다시 말을 걸었다.
―어제 서족의 수장과 만나지 않았나?
서돌을 만나긴 했는데, 시델렌티움이 그걸 어떻게 알지?
시델렌티움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조금 가셨다.
―너를 만나러 가기 전에 서돌이 내 계약자를 만나러 왔다. 영국에서 내 계약자에게 눈독을 들인 것 같더군.
“영국에서?”
―모리안의 부탁을 받아서 ‘리어 팔(Lia Fáil)’을 찾던 중에 마주쳤어.
류장이 그날 파티에 참석한 건 다누 신족의 대관석을 찾기 위해서였나 보다.
미처르가 말한 대로 까마귀 마왕의 대리인도 무언가를 한 모양이다.
‘하필 대관석이라니.’
그 대관석에는 성국언이 엮여 있다.
성국언이 ‘리어 팔’을 밟는 순간, 그에게서 왕의 자질을 읽은 대관석이 비명을 질렀으니까.
“돌은 찾았어?”
―그래. 내 계약자는 우수하니까,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지.
그날 류장이 다누 신족의 대관석을 찾아냈다고?
하지만 성국언의 말로는 아직 푸른색 가면을 쓴 마족이 리어 팔을 부수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던데.
류장은 대관석을 회수하는 대신, 대관석에 무언가를 한 것 같았다.
‘이 건은 자세히 듣고 성국언에게 전해야겠네.’
대관석에 무슨 짓을 했는지에 관한 설명을 시작으로 까마귀 마왕과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내용은 주로 까마귀 가면을 쓰고 한 일에 관한 것들이었지만, 다른 주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델렌티움이 개입한 덕에 암살 위기에서 벗어난 목우람의 이야기가 그러했다.
“암살 건은 알고 있었어?”
―그건 네 상상에 맡기마.
제3자에 관해선 방관을 고수할 생각인지 시델렌티움은 더 말을 얹지 않았다.
한편, 류장은 나와 시델렌티움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건지, 입을 열지 않았다.
시델렌티움과 류장이 목소리를 내지 않는 바람에 이 공간에 들리는 거라곤 내 음성뿐이었다.
슬슬 화제가 떨어질 때쯤, 나는 ‘부(富)와 생명의 무게’를 건넸다.
―이걸로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군! 약속대로 마계의 길잡이는 준비해 두마.
아이템을 확인한 시델렌티움이 매우 기뻐했다.
이 아이템의 효과는 부(富)와 생명을 대가로 인간의 가능성을 지우는 것.
매우 공격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는데, 방관을 수식언으로 삼은 시델렌티움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 의문이 얼굴에 드러난 걸까, 시델렌티움이 설명을 더했다.
―이 아이템은 진웅팔선(眞熊八仙)이 천신과 신인을 소멸시키고자 한 시도의 부산물 아닌가. 그러니 연구할 가치가 있어. 힌트를 얻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시델렌티움은 진웅팔선과 천신, 신인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플마고의 전개상 그런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그리고 시델렌티움이 한 말 중 걸리는 게 있었다.
저 힌트는 단순히 아이템의 제작 원리를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진웅팔선의 목표는 천신과 신인의 ‘완전한 소멸’이었어. 실패했다고 알려졌고, 그들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지.
그 말의 뜻을 이해한 순간, 시델렌티움이 어떤 힌트를 찾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섬뜩한 상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완전하게, 완벽하게 사라진 무언가가 있다면 인식조차 불가능할 테니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