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숨겨야 하는 것 (12)
방과 후.
김신록은 이르게 퇴근할 준비를 했다.
평소라면 잔업을 하거나, 지익회 일을 도울 시각이었으나 김신록은 퇴근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남아서 일이나 하고 싶다.’
김신록은 퇴근이 달갑지 않았다.
오히려 퇴근 후에 기다리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졌다.
김신록이 은광고를 나서서 가야 하는 장소는 광일초등학교.
초등학생 황유호의 모습을 한 호족의 수장 황호를 마중 가는 게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그건 표면상의 이유일 뿐, 실제 목적은 김신록의 옛 제자였던 성국언과의 접선이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안 올 수도 있어.’
김신록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국언의 은광구 지역 사무실이 광일초 주변에 있었는데 한 시간 전 SNS에 성국언이 사무실을 방문해 찍은 사진이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저번 주에 둘이 학교 근처에 잠복해 있다가 등장한 걸 생각하면 오늘도 비슷하게 행동할 것 같았다.
“퇴근하시나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시네요.”
“매번 퇴근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더니.”
교무실을 나서기 전, 동료 교사들이 김신록에게 한 마디씩 말을 걸었다.
김신록은 사람 좋은 교사를 가장하며 웃었다.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아뇨, 늘 일을 도맡아 하시니까 이런 날도 있어야죠.”
“저번 주도 일찍 들어갔는데…….”
“에이, 들어가세요.”
머뭇거리는 김신록을 두고 교사들이 농담조로 인사를 던졌다.
위잉.
그때, 1학년 담당 교직원 전용 교무실의 자동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이를 보자 김신록 주변에 서 있던 교사들이 각자 제자리에 앉았다.
등장한 존재는 용제건.
용제건은 교사들과의 관계가 양호했으나 교사들은 용제건이 김신록에게 거는 장난질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썰물 빠지듯 교사들이 사라졌지만, 흔한 일이라 그런지 김신록을 포함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인간들은 저 유희용이 좀 그렇겠지. 부장직 이상 되는 교사는 그나마 익숙해진 것 같긴 한데.’
연차가 얼마 안 된 교사 중에선 그나마 공청훤이 용제건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긴 하지만.
물론, 공청훤은 예외 중 예외였다.
‘……내가 정체를 드러내면 다른 교사들도 나를 그렇게 대할까?’
김신록은 자조했다.
자신은 유희용처럼 괴짜 짓은 하지 않겠지만, 출신이 출신이다.
개천신화에서 기록이 지워지는 바람에 현세에 웅족의 이야기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웅족의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은광고 입학 실기 시험 중 웅족이 습격한 건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그전에도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았다.
‘내 손으로 웅족을 사냥할 수 있다면…….’
김신록이 웅족을 고문하며 얻은 정보를 되새기며 흉흉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용제건이 가방을 챙긴 김신록을 발견하곤 곧장 다가왔다.
용제건은 조용해진 분위기나 김신록의 복잡한 심경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실실 웃으며 물었다.
“김신록 선생님, 어디 가?”
사람들 앞에선 꼬박꼬박 ‘김신록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는 게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짜증 났다.
누가 보고 있는 앞에서 저렇게 말을 걸면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김신록은 부아와 함께 치밀어 오르는 이능파를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
“……퇴근합니다.”
“벌써? 무슨 일 있어?”
“……일이 있어서요.”
“일이 있는 건 아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
바로 대답하지 못하던 김신록은 겨우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김신록은 ‘개인적인 일이니 너한테 말하고 싶지 않다.’라는 내용의 말을 사교적으로 포장해서 말하는 데에 성공했다.
김신록이 저 유희용을 상대로 어른스럽게 대처한 걸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자니 용제건이 속 긁는 소리를 뱉었다.
“말하기 곤란한 일을 하러 가나 보네. 알았어.”
알긴 뭘 알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보는 눈만 없었으면 용제건의 입을 향해 컴퍼스를 던져 넣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용제건은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뱉기 시작했다.
“오늘 스테일메이트에 새 부원이 들어 와서 가 봐야 해. 같이 못 가서 아쉽네. 잘 갔다 와, 김신록 선생님.”
“……네, 그러면 먼저 가 보겠습니다.”
김신록은 용제건과 달리 전혀 아쉽지 않았지만, 어쨌든 용제건 뜻대로 일이 굴러가지 않았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광일초에서 황호와 합류한 직후, 예상대로 성국언과 전무영이 접근했다.
국회의원을 이리 자주 만나는 상황은 이상할 법도 한데, 전무영이 정교하게 동선을 짠 덕에 몹시 자연스럽게 우연을 가장해 만날 수 있었다.
인사를 마친 후 성국언이 황유호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준다고 제안했고 어린 모습을 한 호족의 수장은 냉큼 고개를 끄덕여 넷은 함께 이동하게 되었다.
성국언은 황유호의 학교생활에 관해 물으며 대화를 이끌었다.
“그렇군, 담임이 바뀌기 전에 그런 일이 있었나? 아, 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시켜라.”
“네!”
척 보기에는 포용력 있는 어른과 응석을 부리는 아이의 훈훈한 대화처럼 보였다.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흐뭇한 시선을 이쪽에 보낼 정도였다.
실상은 국회의원과 호족의 수장이 정보를 두고 펼치는 줄다리기였지만.
황유호의 모습을 한 황호가 아이스크림을 두 그릇을 비운 후에야 이 기묘한 회합은 끝났다.
자리가 파하는 분위기가 되자 김신록은 겨우 긴장을 풀었다.
‘……성국언 군은 그때 일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이네.’
붉은 사자의 팀 빌딩 앞.
김신록은 몹시 어색하게 행동하고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해 버렸다.
나중에 냉정을 되찾고 홀로 생각할 때 뒤늦게 그럴싸한 변명이 떠오르긴 했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선생님.”
성국언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김신록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비서의 은사를 대하는 태도였다.
오늘 그날 일이 언급되면 뭐라고 변명할지 열심히 생각해 오긴 했는데, 무의미한 짓이 되어 버렸다.
얼빠진 얼굴로 초등학생 황유호의 거주지로 등록된 장소로 향했다.
“고생했다, 김신록. 긴장 좀 풀고 얘기해라. 전무영이 네 걱정을 하는 것 같던데.”
전무영은 자신의 옛 제자에게 또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은 호족의 수장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초등학생답게 이야기하던 황호가 싹 말투를 바꾸니 위화감이 상당했다.
“조금씩 신뢰 관계를 구축하면 언젠가 우리의 정체에 관해 이야기하고, 서로 협력할 날도 오겠지.”
황호의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촌극을 벌이는 이유는 결국 언젠가 성국언과 협력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되면 김신록은 제 정체를 밝힐 수밖에 없다.
성국언의 옛 스승이 후예라는 것까진 알려지지 않더라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신분인 ‘김신록’이 후예라는 건 들통나 버릴 거다.
김신록은 그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번 일이 힘들면 언제든지 다음 신분으로 갈아타도 좋다.”
“……네?”
황호는 김신록을 보며 다정히 말했다.
“다음 신분은 ‘적’이라는 성을 쓰는 게 어떻겠느냐.”
김신록은 가명을 사용할 때, 김씨 성을 주로 택했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한반도에서 가장 흔한 성씨라 눈에 띄지 않아서.
둘째, 호족 중에 가짜 신분 이름으로 김씨 성을 택한 이들이 아무도 없어서.
그 결과, 김신록은 호족 누구와도 연이 없어 보이는 가짜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성이면 적호와 호적상 부자 관계로 해 둘 수도 있겠지. 기왕이면 처음 사용한 이름을 썼으면 좋겠군. 그건 적호가 붙인 이름 아니더냐.”
“……그건 적호 님과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황호의 제안은 굉장히 기뻤지만, 김신록은 신중하게 답했다.
김신록의 대답에 황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텐데. 적호는 아주 기뻐할 거다. 아니, 이미 혼자 호적 정리를 진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적호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준비를 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황호의 말을 들으니 김신록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만약의 경우엔 또 신분을 바꾸면 돼.’
김신록은 제자들에게 제 정체를 숨길 수 있다면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아니, 숨겨야 했다.
* * *
지익회실 앞은 한산했다.
오늘 0반 선배놈들이 비교적 얌전했기에 지익회는 평화롭게 하루를 보냈다.
오늘이라면 계이담, 성시완과 비밀 결사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천천히 올 걸 그랬나.’
지익회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숙사생들은 동아리 활동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먹으러 식당에 간 듯했다.
오늘 신문부 활동은 금방 끝나 저녁을 이르게 먹게 되었다.
해외 취재 중인 문새론이 연장 취재를 선언하고 아직 은광고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문새론의 부재가 동아리 전체에 영향을 준 것 같다.
대체 누굴 만났기에 그렇게 취재가 길어진 건지 모르겠다.
“의신아, 여기에서 뭐 해? 지익회에 볼일이 있으면 들어와서 기다리지.”
말을 걸어온 건 박승현이었다.
박승현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고 나를 지익회실 안으로 안내했다.
처음 만났을 때 디바이스 코드도 물을까 말까 망설이던 소극적인 모습과 비교되었다.
박승현은 지익회에 간식 선물이 많이 들어왔다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잔뜩 내왔다.
제일 먼저 집어 먹은 게 코코넛 생강 와플이었는데, 알싸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일품이었다.
“이거 맛있다.”
“이건 현구가 사 온 거야. 사촌 형한테 용돈 많이 받았다고 씀씀이가 좋아졌어.”
그러고 보니 박승현의 친구 김현구도 지익회 소속이었지.
지익회에 들어오는 간식은 보통 선배들이 보내는데, 지익회 멤버들이 자진해서 간식을 채워 두기도 하나 보다.
박승현은 김현구 얘기가 나온 것을 계기로 친구 자랑을 했다.
사관학교 교류전에서 대활약한 에이스 스트라이커가 친구면 자랑할 법도 했다.
한창 김현구 얘기를 하던 박승현이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아, 맞다. 혹시 사관학교 교류전 개막식 때 사용된 음원 제목 알아?”
어떤 곡을 말하는 거지?
개막식 때 사용된 음원이 워낙 다양해서 어느 걸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무난한 대답을 하기로 했다.
“방송부 홈페이지에 음원 리스트 올라와 있을걸.”
“거기에 올라온 곡 다 들어 봤는데…… 벽사의 검무 출 때 나온 휘파람 곡 제목이 궁금해서.”
그 휘파람 소리는 내가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군사가 지휘하는 진군가(進軍歌)’를 구현한 결과물일 거다.
진군가의 진짜 주인, 박승현이 그 휘파람 소리를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묻는 타이밍이 이상하긴 했지만.
박승현의 말이 계속되었다.
“현구네 사촌 형도 그 곡 제목이 궁금한가 봐. 현구가 부르는 휘파람 곡 듣고선 제목 알아 오면 용돈 더 주신다고 했대.”
……김현구의 사촌이 누구기에 그걸 조사하고 있지?
김현구는 플마고에서 이름도 나오지 않았던 인물이라 정보가 적다.
나중에 황지호를 통해 알아봐야겠다.
“의신아, 2학년 때 지익회 들어올 생각 없어?”
과자를 거의 다 먹어 갈 때쯤, 박승현이 물었다.
얼마 전에는 염준열과 천동하가 각각 학생회와 선도부에 가입 권유를 했는데, 이번엔 박승현이 권유할 줄이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제안은 참 과분하고 감사했지만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힘들 것 같아.”
“그래…… 여유가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 줘!”
박승현은 웃으며 음료수 한 잔을 더 권했다.
그때, 지익회실 밖에서 누가 접근했다.
상대는 문 근처에 앉아 있는 박승현을 먼저 발견한 건지, 바로 말을 걸었다.
“박승현, 내가 지익회실 문 닫고 다니라고 몇 번이나…….”
그 목소리는 중간에 끊겼다.
상대는 날 발견하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특유의 쇳소리가 섞인 듯한 음성은 똑똑히 들었다.
‘……들어 본 목소리다.’
들어 봤다기보다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군 생활을 하는 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이름과 계급을 외치며 나를 갈구던 선임의 짖는 소리를 어찌 잊겠는가.
지금 들린 목소리는 어느 ‘계’새끼의 목소리와 일치했다.
“아, 이담이 형, 죄송해요! 깜빡했어요.”
박승현은 겸연쩍은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계이담은 사과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 같지 않았다.
계이담이 표정을 무너뜨리고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