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49화 (448/925)

66. 또 다른 후보 (1)

계 상병, 개상병, 계 병장, 개병장, ‘계’새끼.

표현은 다양했으나 모든 표현이 가리키는 건 하나였다.

안 그래도 힘든 군 생활을 더 힘들게 만든 그 선임.

직접적인 폭력을 쓰지 않았을 뿐, 온갖 갈굼은 기본이고 안 해도 될 잡일을 다 내게 시키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다.

‘계’새끼는 유독 날 갈궜다.

처음엔 ‘내가 저 또라이한테 안 걸려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던 동기들도 나를 동정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내 체스 기사 이력에 관한 얘기가 돌았지.’

왜 저 ‘계’새끼는 조의신을 저리 갈구는 것인가.

사람들이 이 이유를 파헤치다 보니 자연스레 내 체스 기사 경력이 드러났다.

좁은 사회라서 그런지 소문은 금방 퍼졌다.

―조 이병이 유명인이라서 그러나 보네.

―쟤 유명인이었나?

―……그 체스 신동! 어렸을 때 국제 대회에서 우승도 몇 번 했으니 면제 아니냐?

―자원입대한 거겠지.

소문이 퍼지고 나니 ‘계’새끼가 나한테 패배한 체스 기사 혹은 열등감을 느끼던 지망생이라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기보 연구는 안 하고 나를 끌어내릴 생각만 하던 쓰레기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하지만 ‘계’새끼는 체스 룰도 모르고, 내가 체스 기사 출신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대체 왜?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 아님?

―교통사고랑 후임 갈구는 거랑 대체 뭔 상관인데.

―사고 때문에 성형수술을 몇 번이나 받았다는데, 후유증이 남아서 얼굴이 좀…….

이목구비가 어딘가 어색했는데 사고 후유증이었나?

사지가 멀쩡하니 상상도 못 했다.

얼굴이 저 모양인 건 단순히 못된 심성이 얼굴에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화상 자국이 넓게 남았거나, 안면 근육 문제로 장애 판정을 받았다면 군 면제였을 텐데 참 아쉽게 되었다.

저놈한테도, 나한테도 말이다.

‘사고로 얼굴이 망가진 거랑 날 갈구는 거랑 뭔 상관이지?’

의문을 품었지만, 이 세상에 부조리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결국 그 ‘계’새끼가 전역하는 날까지 불합리한 갈굼을 당했다.

그 악연은 그놈이 먼저 전역하며 끝났다.

사회에 나온 후 우연히 귀찮게 엮일 뻔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정말, 다시는 그놈과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계씨 성을 가진 어느 은광고 인물이 처음으로 말하는 걸 듣기 전까지는.

‘저거 진짜 ‘계’새끼인가? 눈앞에 있는 은광고 지익회장 계이담이 내가 아는 그 ‘계’새끼냐고.’

몹시 귀에 익은 목소리였고,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부추기는 감각은 일치했다.

물론, 목소리가 같다고 꼭 저게…… 아니, 계이담이 계새끼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계이담과 ‘계’새끼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말하는 속도, 말버릇, 음의 높낮이 등등이 모두 일치했다.

우연히 둘의 목소리가 닮고, 성씨가 일치한다기에는 의심스러운 정황이 너무 많았다.

‘내 앞에서는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다른 사람 앞에선 술술 잘만 말한 것 같네.’

박승현의 반응을 보면 안다.

평소에 계이담이 묵언 수행 중이었다면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낸 걸 의아하게 여겼을 거다.

그러나 박승현은 계이담과 대화를 하는 데에 익숙해 보였다.

거기에 나를 발견한 순간 놀란 표정을 지은 게, 결정타였다.

노골적으로 목소리를 들려주는 걸 피한 거다.

믿기 싫었지만, 결론이 났다.

‘은호 외에도 또 다른 후보가 넘어왔구나!’

그것도 하필, 그 ‘계’새끼가 말이다.

갈굴 때 쓰던 흔한 레퍼토리가 ‘국민망겜이나 하는 머저리’였는데, 저 ‘계’새끼도 머저리였나 보다.

그것도 나나 천성헌과 비슷한 시기에 엔딩을 볼 정도의 진짜 머저리였다.

‘이름과 얼굴이 달라서 바로 알아볼 수가 없었어.’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를 위한 자리는 튜토리얼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조연’의 자리를 준비했지만, 적합체 후보는 그렇지 못한 듯했다.

은호도 이 세계에 넘어올 때는 ‘천성헌’이 아닌 ‘천은하’가 되지 않았던가.

‘계’새끼도 그런 맥락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 대신 ‘계이담’이 되었을 거다.

‘그러면 저 얼굴은 교통사고 당하기 전의 얼굴인가?’

지금 계이담의 얼굴은 아마 ‘계’새끼의 사고 당하기 전 모습일 거다.

한참 어려진 데다 헤어스타일도, 입고 있는 옷도 전부 다르니 알아채지 못했다.

거기에 ‘계’새끼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는 편견 탓에 둘이 동일 인물일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서를 모으고 사고를 진행하다 보니, 이제 완전히 계이담이 ‘계’새끼로 보이기 시작했다.

계이담을 잘 뜯어 보니 부리부리한 눈이 어딘가 ‘계’새끼를 연상하게 했다.

‘묻고 싶은 게 많긴 한데.’

초상우주, 적합체 후보, 플마고, 계이담으로서의 삶…… 질문할 게 많았다.

그러나 해묵은 분노와 짜증이 치밀어 올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여태까지 입 다물고 있었겠다?’

갑자기 계이담과 연관된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새끼였던 시절의 계이담은 원래부터 싫었는데, 이제는 저 계이담도 싫다.

망겜이라고 신나게 까던 플마고를 무슨 낯짝으로 클리어한 건지 모르겠다.

또 이 세계에 쳐들어와 뻔뻔하게 학생 자치기구의 대표를 맡고 있는 게 꼴 보기 싫었다.

그 주제에 정체가 들통날까 봐 입을 꾹 닫고 있던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신아? 이담이 형?”

나와 계이담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지 박승현이 주저하다가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저 ‘계’새끼가 박승현이 문 좀 안 닫은 것 갖고 뭐라 했지.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별거 아닌 거 갖고 지랄하는 버릇은 못 고쳤나 보다.

저놈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소속한 지익회의 회장이라니!

계이담이 ‘계’새끼인 줄 알았다면 절대로 지익회장 선거 때 저놈을 찍지 않았을 거다.

머릿속에서 은광고 자치 기구의 장 탄핵 제도에 관해 철저히 찾아보고 있을 때였다.

“……그땐 미안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계이담 쪽이었다.

꼴에 잘못한 건 아는지 먼저 사과를 하고 있다.

들키지 않았으면 끝까지 입 다물고 있었을 테니, 당연히 사과도 안 했을 거다.

진심이고 나발이고 조금도 와 닿지 않는 사과였다.

받아들일 가치가 없었다.

마침 저 ‘계’새끼가 정체를 두고 발뺌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그간 의문으로 여겼던 걸 묻기로 했다.

“기사에 악플 단 거 그쪽입니까?”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의심하는 건 잘못된 짓이다.

그러나 강력한 심증이 있었다.

플마고 관련 기사마다 빠짐없이 악플을 다는 특정 아이디를 볼 때마다, 나는 저놈을 생각했다.

아이디도 그렇고, 욕하는 말투나 트집 잡는 꼴 등등이 딱 ‘계’새끼였던 탓이다.

“관련 기사 뜰 때마다 악플 달던 kye777ing 그쪽이냐고.”

“어? 이담이 형이 악플?”

박승현이 당황한 얼굴로 계이담을 봤다.

그래, 박승현도 빨리 저 ‘계’새끼의 실체를 아는 게 앞으로를 위한 길이다.

여기서 계이담이 ‘아니다.’라고 답하면 이능이든 뭐든 써서 거짓말 탐지기에 저놈을 처넣을 생각이었다.

“……미안.”

쉬이 넘어가지 않으리란 걸 알았는지 계이담이 순순히 자백했다.

예상은 했지만, 눈앞에서 보니 형언할 수 없는 깊은 빡침이 몰려들었다.

플마고 기사마다 악플을 달던 또라이 악플러가 사실은 플마고 유저였다!

그것도 최종장까지 클리어한 고이고 썩은 물!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사과 하나로 만사가 해결되면 법과 폭력이 왜 있겠습니까?”

물론, 법과 폭력을 같은 선상에 둘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법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이계와 에너미, 자연재해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가.

불가피하게 물리적인 힘을 써야 하는 상황이 존재하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아, 오랜만에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현구가 사 놓은 와플 남았냐?”

“아까 몇 개 남아 있던데.”

“VR 대전 게임 할 사람?”

멀리서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슬슬 저녁을 다 먹었는지, 지익회실 주변에 기숙사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먼저 지익회실에 당도한 건 전 지익회장, 성시완이었다.

“어, 의신이 일찍 왔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녁 같이 먹을걸…… 무슨 일 있어?”

반가워하며 내게 말을 걸던 성시완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알아챘는지 말을 멈췄다.

사람이 더 오기 전에 계이담에게 말했다.

“계급장…… 아니, 명찰 떼고 한판 붙자.”

계이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광경을 계속 멍한 얼굴로 보던 박승현이 한마디 했다.

“……아, 의신이도 0반이었지.”

*    *    *

중앙 구역, 학생회관.

예정보다 이르게 학생회 업무를 마친 염준열이 귀갓길에 오르고 있었다.

오늘 도원우와 유상희가 자신들을 걱정하는 학생회 멤버들에게 하나하나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 메시지 덕인지 업무 처리 속도가 빨랐다.

다들 두 사람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힘이 난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만나서 선물 준다고 할걸.’

염준열은 뒤늦게 조의신의 생일 선물을 준비했다.

선물은 총 두 개였다.

하나는 스승 적벽괴도에게 줄 직접 제작한 선물.

다른 하나는 후배 조의신에게 줄 선물로, 용제건의 조언을 받아 용족에게 제작을 의뢰한 물건이었다.

시간을 들여서 그런지 완성도는 높았지만, 생일이 지난 지 한참 된 게 마음에 걸렸다.

하루라도 빨리 선물을 전하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식사하면서 드릴 생각에 내일 보자고 했는데…… 지금이라도 연락해 볼까? 아니, 갑자기 약속을 변경하는 것도 그렇고, 레스토랑 예약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고…….’

염준열은 고민 끝에 조의신에게 연락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 대신, 중앙 구역 산책로를 걸으며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같이 하교하기로 한 용제건은 현재 스테일메이트의 새 부원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용제건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염준열은 기다리기로 했다.

‘제건이 형이 매번 기다려 주셨으니까, 오늘은 내가 기다려야겠다.’

염준열이 느긋하게 산책로를 거닐고 있을 때, 학생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은 디바이스 홀로그램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아마 은광고 종합 게시판을 열어 두고 있는 것 같았다.

“0반 애랑 계이담 싸운대!”

“지익회장이랑?”

“어!”

염준열이 쓴웃음을 지었다.

은광고 사람들은 참 싸움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다들 상당한 실력자들이니 보는 즐거움도 있었고, 이능 대련을 보면서 배우는 것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담이도 고생이 많네.’

보나 마나 2학년 0반이나 3학년 0반이 거주 구역에서 또 소란을 피우다가 지익회에 이야기가 간 걸 거다.

그런 식으로 계이담이 0반 학생들을 상대한 건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었다.

염준열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는지, 다들 그 0반 학생을 2학년이나 3학년으로 여기는 듯했다.

“2학년? 3학년?”

“아니야, 2학년 0반은 오늘 가을 소풍 사전 답사 하러 갔고 3학년 0반은 일일 벌크업 챌린지 중이래.”

“그럼 1학년이야?”

“아, 걔들 요새 등교 많이 하지…… 누군데?”

“미로가 싸우는 거면 보러 간다.”

1학년 0반 애가 계이담과 싸우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염준열은 곧바로 조의신 걱정을 했다.

‘의신이가 고생이 많겠구나. 1학년 0반 애들은 얌전한 편이긴 해도 학급 관리와 적벽괴도 활동을 병행하면 쉽지 않겠지.’

그러나 염준열의 걱정은 바로 뒤에 들린 말 탓에 순식간에 증발하고 말았다.

“계이담의 상대는…… 1학년 0반 부반장, 무명의 초신성이래!”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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