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56화 (454/925)

66. 또 다른 후보 (8)

중앙 구역 제1양호실.

이송 기기에 올라탄 순간 정신을 잃은 계이담은 검사와 처치를 마친 후에야 눈을 떴다.

계이담은 눈을 뜬 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해 얼떨떨했다.

온몸이 얼얼하고 주변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났기에 또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온 건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아, 여기는 은광고의 양호실이지.’

계이담은 제압한 학생들을 양호실로 데려온 경험은 많았으나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한 건 처음이었다.

무자비하게 자신을 굴리던 조의신을 생각하니 섬뜩해졌다.

계이담이 기억하는 후임 조의신은 아무리 갈구고 불합리한 대우를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예의 바르게 구는 독종이었다.

조의신이 저렇게 사람을 잘 굴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칼에 찔려도 이상하지 않지.’

군대에서 있던 일도 그렇고, 조의신이 죽어라 파는 게임에 악플 단 것도 그렇고…….

그런데 자신이 플레이하는 게임에다가 욕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대한민국 게이머 중 게임에다가 욕 안 해 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강화에 실패하거나, 클리어 직전에 사망하거나, 원하는 아이템을 뽑기로 뽑지 못했을 때 등등.

하물며 플마고는 모든 망겜의 요소를 하나의 집약체로 만든 듯한 국민망겜 아니었던가.

계이담이 만약 지금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면 군대에서 조의신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플마고에다가는 더 심하고 참신한 쌍욕을 날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조의신은 군대에서 갈군 거보다 악플 단 거에 더 빡쳐 하던 것 같은데…….’

물론 계이담은 좀 집요하게 플마고에 쌍욕을 날리긴 했다.

그러나 그건 다 미친 망겜에 계이담의 인생 히로인, 안다인이 갇혀 있던 탓이었다.

안다인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조의신은 특별 체육실을 나가기 전, 계이담에게 안다인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안다인한테 들이대다가 걸리면…….

조의신은 그 말을 다 맺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말을 할 때 조의신이 뿜었던 살기를 생각하면, 뒷말을 안 듣는 편이 계이담의 정신건강을 위한 길일지도 모르겠다.

계이담은 갑자기 추워진 듯한 기분에 딴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조의신이 나간 다음에 시완이 형이 오고, 용쌤은 그 뒤에 나타나서 황홀하게 웃고, 염준열이 와서 뭐라 하고…….’

염준열이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던 게 떠올랐다.

조의신과 염준열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게 분명했다.

‘……예전에 염준열이 적벽괴도에 관해 조사하던데. 그거랑 관련 있나?’

계이담은 조의신과 염준열이 사제관계라는 것까진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벽괴도의 정체를 아니 어느 정도 상황을 추측해 냈다.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던 동급생 하나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이담아, 괜찮아?”

커튼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성시완이 나타났다.

성시완은 계속 양호실에서 기다려 준 듯했다.

“……네.”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말해. 양호 선생님 불러올게.”

성시완은 양호실 침대 옆 간이 의자를 끌고 와 근처에 앉았다.

계이담이 일어난 걸 확인했으니 바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 오지랖 넓은 선배는 계속 옆에 있을 생각인 듯했다.

성시완은 계이담의 이능파와 부상당한 부위를 확인한 후 말했다.

“의신이 건 말인데, 내가 도울 수 있을까?”

오지랖 넓은 성시완다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번 건만은 그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괜히 다른 사람들을 중재네 뭐네 하며 끌어들이면 조의신의 화만 부추길 것 같았다.

중재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해 표면상으로 조의신이 좋게 넘어가도 더 지독한 복수와 깊어진 원한만이 기다릴 게 뻔했다.

“아뇨.”

“그래…… 알았어. 대신 의신이와 또 대련할 일 있으면 미리 말해 줘. 이송 기기를 대기시켜 둘게.”

결국 성시완은 오지랖을 부릴 생각이긴 했지만, 선은 지킬 모양이었다.

성시완은 그 이상은 간섭할 의사가 없음을 어필할 겸, 화제를 바꾸었다.

“아까 이사장님도 오셨던데, 봤어?”

“……황명호 이사장님이요?”

“응, 학생들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인데 오랜만에 뵈었어.”

계이담은 플마고 스토리에 관해 잘 모르지만, 몇몇 캐릭터에 관해선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몇 안 되는 캐릭터 중 하나가 황호로, 황명호 이사장이 호족의 수장 황호라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1학년 0반 소속의 황지호가 황호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니, 호족의 수장이 여길 왜 와! ……조의신 때문에 왔겠지?’

이 세계에서 황명호 이사장과 계이담 사이의 접점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계이담이 황명호 이사장에 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기억을 되찾기 전, 1학년 때 계이담이 황명호 이사장에 관해 아는 건 학교 홈페이지나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로 나오는 프로필 정도였다.

황명호 이사장은 일을 제대로 안 하기로 소문이 났지만, 높으신 분이 일을 안 하는 건 한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 아니던가.

‘그 이사장도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지.’

계이담이 플마고에 관한 기억을 잃은 상태였을 때, 황명호 이사장에 관해 신경 쓰이는 사항이 하나 있었다.

작년 3학년 0반의 구교사 연쇄 습격 사건 때의 일이었다.

지금은 졸업한 0반 학생들이 구교사를 철거해 달라며 피켓 시위, 폭파쇼, 테러 행위 등 온갖 지랄을 해도 황명호 이사장은 구교사 철거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다.

학생 자치기구에 소속된 사람의 입장에선 기록기기도 없어 관리하기 힘든 구교사 따위 그냥 철거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 원망도 했었다.

잠시 황명호 이사장, 황호에 관한 정보를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잠깐,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에 호족의 수장이 엮인 적이 있었지 않았나?’

계이담은 플마고를 하며 과금과 캐릭터 육성을 위한 노력과 시간 모든 것을 안다인에게 쏟아부었다.

그러다가 안다인이 2학년일 때, 히든 퀘스트가 열린 적이 있었다.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안다인의 미공개 일러스트나 스킬, 장비 등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설레발치기도 했다.

‘공략을 보고 플레이하려고 정보를 찾아봤는데 없었지.’

조의신으로 추정되는 플마고 폐인, jo2god111조차 그 히든 퀘스트에 관한 공략이나 리뷰를 올리지 않았다.

히든 퀘스트가 열리는 조건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계이담은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안다인의 레벨이 가장 높은 게 조건일 거라고 추측했다.

jo2god111은 그 수많은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골고루 육성하는 폐인 중의 폐인이었으니, 레벨이 조건으로 걸려 있다면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를 연 건 안다인의 극성팬, 계이담 하나뿐일 가능성이 컸다.

계이담은 당시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한 단 한 명의 팬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우 설렜다.

그런데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에선 안다인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냥 미친 개망겜이 나를 낚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는데…… 어쩌면 그건…….’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 속, 황호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부분이 있다.

계이담은 곱상하게 생긴 캐릭터가 안다인과 엮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황호가 등장할 땐 스토리를 대충 넘겨 버렸다.

안다인이 주수혁을 워낙 좋아하니 주수혁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줬지만, 광팬의 심정상 주수혁이 아닌 다른 남캐들은 허용할 수 없었다.

하여튼 의문만 남기고 싱겁게 끝난 히든 퀘스트 이후에는 황호가 등장하지 않아 후련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그 이후로 호족의 수장은 아예 등장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계이담이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어 보려 할 때였다.

“이담아, 괜찮아?”

“어, 김신록 선생님!”

예상치 못한 이가 나타났다.

지익회 고문, 김신록의 얼굴을 보니 계이담은 안도감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저 다정한 고문 선생님이 와 줘서 기쁘지만, 지익회장이 이렇게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기도 했다.

계이담은 김신록의 정체가 호족과 웅족의 후예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얘기 들었어. 오늘 의신이랑 대련하다가 다쳤다고 하던데…… 사실이니?”

“……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평소에는 선을 긋던 김신록이 저렇게 걱정하며 말하니 입을 꾹 닫고 있기가 좀 그랬다.

계이담은 최대한 모호하게 상황을 표현하기로 했다.

“그게…… 제가 옛날에 잘못한 게 있어서…….”

“……옛날이라.”

어쩐지 ‘옛날’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김신록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들렸다.

계이담이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해서 고개를 들어 봤다.

그러나 눈앞엔 평소대로 사람 좋은 표정을 짓는 지익회 고문 김신록이 있었다.

*    *    *

황명호 대저택.

은호가 머무는 저택 앞.

‘왜 백호군이 여기에 있지?’

늦은 시간인데 산책이라도 하러 나온 걸까.

백호군은 신화계 호족답게 평소에도 올 때마다 바로 기척을 읽고 마중 나왔지만,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처음 봤다.

백호군은 먼저 내 쪽을 가만히 주시했다.

‘……안광 스킬을 쓰고 있나?’

내 쪽을 보는 백호군의 눈에 하얀 섬광이 스치다가 사라졌다.

‘계’새끼와 싸우면서 부정한 기운이 옮겨붙는 바람에 백호군이 경계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더 철저하게 계이담을 굴려야 할 것 같다.

그때, 저 멀리서 ‘도도도’ 하고 작은 무언가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왕왕!

저편에서 나타난 건 내 천사였다!

저택 부지 안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나 보다.

혼자서도 잘 노는 게 아주 대견했다.

혼자서 잘 노는 걸 내가 방해한 꼴인데, 나한테 인사하려고 뛰어오는 건 더 대견했다.

“올무야! 연락도 없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와서 미안해. 잘 놀고 있었어?”

왕왕!

내 천사는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날 반겨 줬다.

발치에서 꼬리를 흔드는 올무를 두 손으로 안아 들었더니 더 세차게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올무를 안으니 나도 덩달아 기뻐졌다.

계이담 같은 쓰레기가 이 세계에서 숨을 쉬는 바람에 오염된 것 같았던 몸과 마음이 정화되었다.

“날이 차군, 들어가지.”

황명호 이사장의 모습을 한 황지호의 제안에 일단 들어갈까 했지만, 발걸음을 멈췄다.

품에 안고 있던 올무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 뒀다.

……끄응?

올무가 다시 안아 달라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쪽을 봤지만, 힘겹게 다시 안아 들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머리를 쓰다듬는 선에서 멈췄다.

나는 백호군을 보며 말했다.

“잠깐 할 얘기가 있어. 먼저 들어가.”

황명호 모습의 황지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와 백호군을 번갈아 살폈다.

백호군은 서늘한 얼굴로 서 있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무슨 일로 자진해서 저택에 오나 했더니…… 백호와 할 말이 있나?”

“어.”

더 자세히 물으면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다행히 황지호는 순순히 물러났다.

“알았다. 차를 준비하고 있을 테니 너무 오래 바람 쐬지 말고 돌아오도록.”

올무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아쉬워했으나 착한 천사는 얌전히 별채 안에 먼저 들어갔다.

오늘은 약속도 없이 쳐들어온 주제에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지만, 다음엔 꼭 올무의 선물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별채 앞이 완전히 조용해졌을 때, 백호군에게 말을 걸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 봐라.”

이 세계에 온 직후, 그 상황이 벌어졌을 때 백호군에게 가장 먼저 이 질문을 했어야 했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질문을 던졌다.

“웅족이 습격한 날, 어떻게 그 자리에 왔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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