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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64화 (462/925)

67. 틈 (6)

대나뭇잎이 흔들리며 길이 열렸다.

열린 길 사이로 흐느적거리며 두 개의 그림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림자의 힘 없는 움직임 탓일까, 바람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들렸다.

죽호는 차마 그들을 똑바로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황지호는 낮게 중얼거렸다.

“복수를 해도 변함이 없군…….”

“…….”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 탓에 죽림에는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 해가 질 시간이라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주변이 어둡고 그들이 멀리 있기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린 것 같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잖아.’

두 부부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눈과 입 부분만 뚫려 있는 밋밋한 흰 가면이었는데, 정말로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만 쓴 가면인 듯했다.

가면을 써야 한다면 나도 저런 걸 쓰고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가면을 쓴 부부를 보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호 님.”

“내 입장에서는 고작 반년밖에 흐르지 않았다만.”

“반년밖에 흐르지 않았습니까?”

흰 가면을 쓴 호족 부부가 느릿느릿하게 인사를 올렸다.

가면이 주는 섬뜩한 느낌과 달리 그들의 인사는 정중했고, 대화도 평범하게 했다.

화기애애하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황지호가 가면에 관해 질문할 때까지는.

“그 가면은 계속 쓸 생각인가?”

중심을 못 잡고 흐느적거리던 호족 부부가 우뚝 멈춰 섰다.

가면의 눈 부분에 뚫린 구멍을 통해 부부가 황지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후후후, 황호 님. 왜 당연한 걸 물으시죠?”

“자식을 못 지키고 먼저 보낸 부모가 무슨 낯으로 모습을 드러내겠습니까?”

“저희의 죄가 무거워 하늘 아래에서 감히 얼굴을 내놓고 다닐 수 없답니다. 잘 아실 텐데요.”

“저희의 자식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 하고 스러졌답니다. 어찌 저희가 빛을 받으며 살겠어요.”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 했다.’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저 부부의 후예는 설마 유산된 건가?

그 말을 듣고 나니 부부를 스산하다고 여겼던 게 미안해졌다.

그저 저들은 자식을 잃은 부모였을 뿐인데, 무섭게 여기다니.

“……그렇군. 내가 생각이 짧았다.”

“아닙니다. 자식을 지키지 못한 건 황호 님이 아니라 저희잖아요? 전부 저희의 잘못이지요.”

“너희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황지호가 씁쓸해하며 한발 물러났다.

황지호는 웅족에게 복수를 한 걸 계기로 부부가 가면을 벗길 바란 것 같은데, 아직 일렀던 모양이다.

“……인간이 있네요?”

그때, 부부의 시선이 내 쪽에 닿았다.

황지호는 사전에 내가 온다는 말을 안 했나?

부부는 인간인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걸 의아하게 여기다가 갑자기 ‘아!’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곤 내 쪽으로 걸어왔다.

백지장 같은 가면을 쓴 부부가 휘적휘적 걷기 시작하니 위압감이 상당했다.

아마 이 부부의 사연을 몰랐다면 나도 모르게 광림을 발동해 대비했을지도 모른다.

부부는 내 손을 잡을 기세로 다가왔지만, 황지호의 제지에 한 발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호족의 은인이시군요! 은인께 인사드립니다.”

“저희 부부는 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답니다. 인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덕분에 숙원을 이루었습니다. 은호 님의 후예들도 무사하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부부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나는 그날 한 게 없고 웅족의 포획은 황지호를 비롯한 다른 호족이 했다고 밝혔지만, 부부는 내 말을 제대로 들어 주지 않았다.

“은인께서는 겸손하시네요. 은인께서 언질해 주셔서 황호 님과 백호 님이 움직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은인의 혜안이 겁도 없이 신역의 땅을 밟은 무뢰배를 꿰뚫어 보았다고 들었답니다.”

“네, 은인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자들이 얼마나 무엄한 짓을 저질렀을지…….”

대체 호족 사이에서 내 이야기가 어떻게 도는지 모르겠다.

좀 과장된 이야기가 도는 것 같은데, 황지호 저놈은 뭘 하는 건가.

나에게 감사 인사를 한 부부는 이번엔 황지호에게 말을 붙였다.

“황호 님, 너무하세요. 왜 중요한 걸 미리 일러 주시지 않았습니까?”

“은인께서 이 자리에 오는 줄 알았다면 선물을 준비했을 텐데요.”

그러자 말없이 입꼬리를 올리고 상황을 지켜보던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조의신은 번거로운 걸 싫어한다. 이렇게 수선을 부릴 게 분명한데 어찌 미리 알려 주겠느냐. 그런데 조의신이 호족의 은인인 걸 잘 알아봤구나.”

황지호는 부부가 내 얼굴에 금칠하는 걸 막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저 노친네가 부추기는 것처럼 보였다.

호랑이들은 은인 이야기에 신이 난 듯 저들끼리 좋다고 떠들었다.

“황호 님께서 이 자리에 데리고 올 인간은 한 명뿐이지 않습니까.”

“원수를 갚게 하고, 은호의 후예를 구하신 은인을 알아보는 건 당연합니다.”

“훌륭하군. 이 몸이 이끄는 호족의 일원답다.”

황지호도 부부의 대화에 합류해 내 얼굴에 금칠하는 데에 앞장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신문부에 남아서 문새론의 해외 취재 여행기와 염준열의 스승에 관해 듣기나 할걸.

영혼 없이 호랑이들의 이야기를 한참 들은 후에야 웅족에 관한 말이 나왔다.

부부는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기분이 훨씬 좋아진 듯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자리엔 그 처죽일 웅족 쓰레기를 심문하러 오셨다고 했죠. 아, 처죽인다곤 해도 쉽게 죽여줄 생각은 없지만요.”

“같이 가죠. 저희도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봤는데, 황호 님께선 어떤 식으로 곰을 요리할지 궁금하네요.”

황지호가 직접 고문할 생각이었나?

이건 좀 예상외였다.

호족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고문 기술자는 김신록 아닌가.

‘호족은 웅족을 심문하고도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는데…… 김신록이 고문하기 전까진.’

웅족에게서 얻은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 정보는 다 김신록이 얻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김신록을 부를 줄 알았다.

황지호가 받았다는 ‘허락’도 김신록이 고문을 해도 좋다는 허락이라고 생각했다.

황지호의 표정을 보니 뭔가 착오가 있는 듯했다.

황지호가 죽호에게 물었다.

“……이야기가 다 전달이 안 된 것 같군. 내가 보낸 서신을 전달했나?”

“가든 속 시공간의 틈을 열어 서신을 넣어 답변을 받았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죽호가 긴 소매를 들어 입가를 가리고 생각에 잠겼다.

죽호가 다시 소매를 내렸을 때는 원인을 파악한 건지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번에 가든의 공간축이 흔들렸을 때, 고정을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제자가 워낙 강력한 힘을 품었으니 어쩔 수 없지. 네 잘못이 아니다.”

아무래도 의사소통 과정에서 큰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황지호와 죽호의 대화를 듣던 부부가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저희가 서신을 잘못 읽은 걸까요?”

“서신이 다소 찢겨 있었죠. 문자도 뒤엉켜 있었고요.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답신을 했습니다만…….”

“그러니까 그게…… 제가 전달했던 서신인…….”

죽호가 말을 더듬거리자 황지호가 죽호를 제지하고 대신해 말했다.

“얼마 전, 죽호가 큰 힘을 품은 제자를 받았지. 그 제자는 강력한 물의 힘을 품고 있었다.”

그 물의 힘을 품은 제자는 온갖 물의 신들과 광림으로 이어진 김유리를 칭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김유리와 이 사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부부도 나와 같은 심정인 건지 고개를 작게 휘적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 제자는 힘의 제어에 서툴러 힘이 날뛰었고, 그때마다 죽호가 힘을 수습했지. 그 결과물의 기운이 과다해져 죽림이 필요 이상으로 성장했다.”

“제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다 제가 미숙했던 탓에…… 하하하.”

김유리는 반 아이들 사이에서 한 번도 티 내지 않았지만, 죽호와의 과외 수업이 원활하게 진행된 건 아니었나 보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반 아이들 앞에선 항상 웃고, 학급 관리에 힘쓰는 우리 반 반장,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황지호는 왜 이 이야기를 구구절절하는 걸까.

‘설마, 서신에 담기지 못한 내용이…….’

호족과 웅족의 관계, 부부가 잃은 후예, 웅족의 고문.

이 세 가지를 떠올리니 누락된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라면, 황지호가 저렇게 길게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자칫하다간 황지호가 그 사실을 숨기고 부부에게 허락을 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죽호가 관리하는 가든에도 그 여파가 나타났다. 그래서 서신에 문제가 생긴 거다.”

“문제가 생겼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죽호의 가든이 흔들린 건 저희도 느꼈으니까요. 그래서 서신에 어떤 문제가 생긴 거죠?”

“본래 무슨 내용을 적으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황지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적호의 아들에게 그 웅족의 심문을 맡겨 달라고 적었다.”

웅족에게 후예를 잃은 부부가, 복수의 대상을 웅족의 후예이기도 한 김신록에게 맡긴다.

심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걸 배려해 황지호도 저렇게 설명한 걸 거다.

부부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들이 반응하지 않는 사이 해가 졌다.

해가 완전히 져 어두워지자 죽호가 대나무 등을 밝혔다.

불이 켜지자 정신이 든 건지 부부가 입을 열었다.

“……황호 님께서 직접 그 더러운 웅족을 심문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참관할 예정이지만, 심문은 김신록에게 맡길 생각이다.”

황지호의 대답을 들은 부부가 말했다.

억지로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선택권은 저희에게 있는 건가요?”

“그렇다. 내가 너희들에게 저 웅족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하지 않았더냐.”

황지호가 마음만 먹으면 억지로 그 웅족의 심문을 김신록에게 맡기는 것도 가능할 거다.

호족의 수장이 명하면 죽호가 움직일 거고, 저 부부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황지호는 부부의 의사를 존중하는 길을 택했다.

부부는 서로의 흰 가면을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부부의 말에 황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중에 연락하지.”

부부는 먼저 물러나겠다고 청한 후, 죽림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기껏 불러냈는데 미안하게 됐군.”

황지호는 허공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어쩐지 황지호가 사과하는 대상은 나 하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게 하려고 모습을 감추게 한 게 아니거늘. 그저 얼굴을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설마, 지금 이 자리에는 그들이 있는 걸까.

내 예상이 빗나갔으면 했지만, 황지호가 곧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적호, 김신록. 그만 돌아가자.”

황지호가 그렇게 말한 순간, 황지호의 시선 끝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붉은 안개 사이로 적호와 김신록이 보였다.

적호가 기척을 감추기 위해 적연을 쓰고 있었나 보다.

‘둘은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건가……!’

적호는 무표정했지만, 김신록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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