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틈 (7)
김신록은 호족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알았고, 그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적호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필 적호 님이 계신 자리에서…….’
적호는 긴 시간 형틀에 묶여 있었고, 그가 풀려난 이후에는 호족 앞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적호는 호족 사이에서 김신록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적호와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김신록은 적호가 제 아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
적호는 적연을 풀 때까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어떤 말을 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면 김신록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결국 김신록은 그 자리에 더 있을 자신이 없어 학교 일을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계속 김신록이 있으면 다들 자신에게 마음을 쓸 게 분명했는데, 황호나 적호, 조의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많이 속상하셨겠지…… 내가 좀 더 내 일을 잘했다면, 출신과 관계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지 않았을까……?’
김신록은 아무 의미 없는 가정을 하며 자책했다.
설령 김신록이 우수하더라도 그 부부가 웅족의 피를 타고난 자신을 어찌 생각할지는 바뀌지 않을 텐데, 자꾸 ‘만약의 일’을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김신록은 죽림을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서문으로 들어갔다.
은광고의 정경이 눈에 들어오니 다소 마음이 진정되었다.
‘……요즘 일이 많아 잔업이 밀렸지. 다시 일이나 하러 갈까.’
황유호의 마중을 가장한 성국언과의 만남.
용살자 카드모스의 고문을 위한 용족의 영역 파견.
계이담의 문병 겸 정탐.
요새 일이 많아 학교 일에 소홀했다.
오늘 일정이 취소되었으니, 마침 잘됐다고 김신록은 멍하니 생각했다.
과연 학교 행정 사무에 집중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신록아, 어디 갔다 와?”
교무실로 향하는 길, 용제건이 김신록을 불러 세웠다.
부 활동이 끝나는 시각이 한참 지나 있는데 학교에 있는 걸 보면, 오늘도 염준열이 늦게 하교를 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용제건이 김신록을 ‘김신록 선생님’이 아닌 ‘신록아’라고 부르는 걸 보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김신록은 대충 대답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하고 왔는데.”
“표정이 안 좋네. 다른 호족의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
“……!”
김신록이 화들짝 놀라 반응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용제건 특유의 화법에 걸려들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용제건은 김신록에게서 느껴지는 호족의 기운, 김신록의 표정과 반응을 보고 이미 모든 걸 짐작한 듯했다.
“호족한테 또 한소리 들었구나.”
“……별 이야기 안 들었어.”
“뭐가 있긴 했나 보네.”
“…….”
김신록은 용제건을 무시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로 김신록은 별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저 부부의 반응은 후예를 잃은 것 치곤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
오히려 생각해 보겠다며 여지를 남겨 준 점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차 마시고 싶은데, 놀러 가도 돼?”
“곧 염준열이 하교할 시간이잖아. 얼른 가.”
김신록은 염준열에 관해 상기시켰다.
저 유희계 용족도 후예에게는 사족을 못 쓰는 칠푼이 중 하나였기에 염준열의 이름을 대면 금방 물러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용제건은 고개를 저었다.
“준열이 스승이 귀국했거든. 하굣길 경호는 그 용에게 맡기면 될 거야.”
“……같이 가려고 기다린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지금은 차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야.”
아직 김신록이 알았다고 답하지도 않았는데, 용제건은 실실 웃으며 거주 구역으로 향했다.
김신록의 방이 있는 교직원 사택으로 갈 모양이었다.
용제건은 가끔 이렇게 변덕을 부려 김신록을 신경 쓰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행동을 하곤 했다.
‘……차 한 잔만 먹이고 내보내자.’
용제건의 고집을 이겨 본 적이 없는 김신록이 결국 먼저 꺾였다.
김신록이 저 종잡을 수 없는 성품의 악우(惡友)를 한 대 패 주고 싶고, 압정을 날리고 싶은 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김신록은 제 출신과 상관없이 옆에서 친구로 지내 주는 저 용에게 약했다.
김신록은 용제건을 떨쳐 내는 대신, 머릿속으로 어떤 찻잎을 내주고 다과를 곁들일지 고민하고 있었다.
“신록아, 틈을 보이면 안 돼.”
“응?”
갑자기 용제건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용제건은 멈춰 서서 멀리 교문 밖을 보고 있었다.
“요새 ‘눈’이 집요하게 은광고 주변을 보고 있으니까.”
* * *
김신록은 결국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황지호가 부드럽게 얼굴을 봤으니 저녁을 먹고 가자며 말을 붙여 봤지만, 김신록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억지로 잡아 두는 걸 포기한 호랑이들이 망연자실해 있었다.
황지호와 죽호는 물론이고, 적호도 마찬가지였다.
정적이 한참 흐른 후에야 적호가 입을 뗐다.
“……늘 이랬습니까?”
적호가 무표정한 얼굴을 무너뜨렸다.
“저 아이는 제가 없는 자리에서…….”
“…….”
적호가 말을 끝맺지 못하자 황지호도 굳이 답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않고, 상황을 포장하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오늘 그 호족 부부가 보인 반응은 그리 심한 편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칭하면서도 적호와 김신록을 탓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으니까.
적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황지호를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봤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적호는 결국 자리를 먼저 떴다.
적연을 휘감고 기척을 지우고 사라진 걸 보니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은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 적호의 행선지가 황명호 대저택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기다려도 별수가 없으니 이만 자리를 뜨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가든이 완전히 안정된 게 아니라 죽호는 죽림을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 뵙게 되어 반가웠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 주세요.”
나와 황지호가 죽림을 나서기 전, 죽호가 디바이스 코드를 건네며 인사했다.
아마 그 ‘무슨 일’에는 죽호의 제자 김유리의 안부도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내 몫의 디바이스 코드도 건네고 죽림 밖으로 걸었다.
해가 져서 그런지, 올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그런지 유독 발걸음이 무거웠다.
‘평소대로라면 이만 기숙사에 돌아가겠다고 말했겠지.’
그런데 호랑이들의 저런 모습을 보니 묘하게 가겠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눈치껏 자리를 피해 줘야 하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대나무숲을 걷는 동안 계속 고민을 거듭했다.
죽림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결론을 내렸다.
“오늘은 은호의 후예들을 보고 싶어.”
앞서 걷던 황지호가 나를 돌아봤다.
은서호와 은이호는 은광고 입시 준비로 바쁘고, 오늘 있었던 일을 고려해 돌아가라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 아이들도 널 환영할 거다.”
그러나 황지호는 거절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지호는 저택에 대기시켜 둔 황유호에게 저녁 준비를 시키겠다며 바로 못을 박았다.
“오늘 서호와 이호가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아직 저녁을 들지 않았지. 잘됐군.”
제때 끼니를 챙겨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애들이 아직까지 밥을 안 먹었다니!
뭐가 잘된 건지 몰라 한소리 했더니 황지호가 처웃었다.
처웃는 소리를 듣다 보니 금방 저택에 도착했다.
그간 황명호 대저택에 자주 방문했지만, 본채에 오는 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을 통과한 순간.
팡! 파팡!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꽃가루가 눈앞을 가렸다.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니 황지호는 이 상황을 예측한 듯 뒤로 내뺀 상태였다.
앞을 보니 은호의 후예들이 폭죽과 고깔모자,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생일 축하해요, 의신이 형! 늦었지만요.”
“급하게 준비하느라 케이크는 기성품으로 준비했어요. 다음엔 맞춤 케이크나 수제 케이크를 만들어 올게요!”
“……같이 사진 찍고 싶어요.”
저번에 내 생일 때 은호의 후예들이 직접 보고 싶다고 했는데, 결국 시간을 내지 못해 만나지 못했다.
은호를 만난 직후에 후예들을 보러 간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건 좀 꺼려졌다.
사실상 은호의 후예들과 만나는 걸 피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 그동안 만나러 오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앞으로 의신이 오빠가 자주 오시면 문제없어요!”
“이제 내년부터는 같은 학교에 다닐 거니까 괜찮아요.”
은서호와 은이호는 자신들이 어떻게 은광고를 준비하고 있는지, 0반에 들어가서 무엇을 할지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벌써 0반에 들어가는 게 확정되었나?
왜 0반 후배가 되는 게 기정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면접 때 선보일 장기자랑을 몇 개 준비했다더군. 그걸 하면 충분히 0반에 합격할 것 같다.”
“황호 님도 저렇게 말씀하시는걸요! 분명 0반이 될 거예요.”
“면접까지 더 철저하게 연습할게요.”
대체 무슨 장기자랑을 준비했기에 황지호가 저런 소릴 하는 건가!
은서호와 은이호가 바쁜 이유는 수험 준비 때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면접 준비, 아니, 장기자랑 준비로 두 남매가 바빴던 모양이다.
“……나도 은광고 입학하고 싶다.”
한편, 아직 고등학생이 되기엔 한참 나이가 남은 은재호는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은재호는 디바이스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긴 하지만 부족한 모양이다.
가능하면 셋이 함께 은광고에 왔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10살이면 좀 힘들 것 같다.
힘들 걸 알지만 일단 물어는 봤다.
“후예도 겉보기 나이를 조작할 수 있지 않아?”
“진족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가능하긴 하지. 하지만 성인이 되지 않으면 힘들다.”
황지호는 딱 잘라서 말했다.
은재호가 원하면 지금 1학년 0반에 편입시켜 줄 기세였던 후예 바보 황지호가 웬일로 저렇게 말하는 걸까.
살짝 기대에 찬 얼굴로 귀를 기울이던 은재호가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준비하고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황지호는 은재호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은재호는 금방 기대에 찬 얼굴로 조르르 황지호의 발치로 다가왔다.
황지호를 올려다보는 은재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다른 방법이요? 저도 내년에 은광고에 갈 수 있나요?”
“하하하! 은광고는 좀 힘들지. 다른 방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황지호는 은재호가 응석을 부려서 기쁜지 신나게 처웃었다.
평소보다 처웃는 빈도가 줄었는데, 은재호의 응석에 금방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내년이면 광일초등학교를 접수할 수 있을 것 같다. 안전 문제는 뭐…… 황유호의 모습을 한 나와 같이 행동하면 문제없겠지.”
“저…… 그러면…… 혹시…….”
은재호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래, 나와 함께 초등학교에 다니자. 어떻나.”
“네! 다닐게요! 황호 님, 감사합니다!”
은재호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황지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학교를 다니는 건 생각도 못 했는지 정말 기쁜 모양이었다.
노친네가 초등학교를 접수한다고 할 때는 그냥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렸는데, 나름 계획이 있었나 보다.
조금 늦은 내 생일 파티에서 이것저것 후예들이 만든 종이 공예품을 받긴 했지만, 가장 큰 선물은 은재호의 초등학교 입학 소식이었다.
생일 파티를 마치고 저택을 나서기 전, 황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그분들의 연락처를 알려 줬으면 해.”
“……그분들?”
나는 후예를 잃은 호족 부부를 생각하며 말했다.
“오늘 만난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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