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67화 (465/925)

67. 틈 (9)

호족 부부는 사전에 ‘김신록의 행동 여하에 따라 고문을 허락하겠다.’라고 황지호에게 말했다.

황지호는 김신록에게 그 말을 빠짐없이 전했을 거다.

그러니 김신록은 나름의 각오를 다지고 왔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저 말은 상상도 못 했겠지.’

김신록은 부부의 말에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굳어 있다가 뒤늦게 눈을 깜빡였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호족 부부는 담담한 얼굴을 한 김신록을 관찰하듯 빤히 들여다봤다.

호족 부부가 착용한 가면이 눈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전부 덮어 버렸기에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부부가 악한 존재가 아닌 걸 알고 있어도 위압감이 상당했다.

“이곳에 오기 전, 우리는 여러 동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단다.”

“우리에게 네 소식을 전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에 직접 알아보고, 묻는 수밖에 없었지.”

김신록의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저 부부에게 전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호족들은 그동안 저 부부에게 김신록에 관해서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나 보다.

부부의 말이 계속되었다.

“네게 적의를 품은 자도, 동정심을 느끼는 자도, 무관심한 자도 한입을 모아 말하더구나. 호족 내에서 최고의 고문 기술자를 꼽는다면 그건 적호의 아들일 것이라고.”

“너는 대상이 죽지 않을 정도로 절묘하게 고통을 가해 비밀을 파헤치는 데에 능하다고 들었다.”

“설령 그게 네 근원과 이어져 피로 묶인 진족이라 해도.”

부부가 김신록에게 요구하는 바는 명확했다.

처음 그 요구를 입에 담았을 때보다 사족을 덧붙이긴 했지만, 그들의 요구는 ‘김신록의 고문’ 단 하나였다.

“네가 그렇게 잘한다는 고문을, 우리에게 해 보렴.”

부부는 그 이후로 입을 다물었다.

황지호는 뭔가 말하고 싶은 건지 한 발 앞으로 나가다가 나를 보고는 멈춰 섰다.

“…….”

조금 고민한 것 같지만, 황지호는 당장 이 자리에서 개입하는 건 그만두기로 한 듯하다.

혹시 내가 뭔가를 했다고 생각해서 믿고 지켜보겠다는 건가.

나라고 해서 부부가 어떻게 나올지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닌데.

한편, 김신록의 대답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나왔다.

“……고문은 대상에게 고통을 주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때 하는 겁니다. 악행을 저질렀거나, 필요한 정보를 숨기고 있을 때가 그러합니다.”

김신록의 목소리는 방금 말했던 것에 비해 다소 메말라 있었다.

김신록은 먼저 부부를 설득해 볼 생각인 것 같았다.

“이유가 필요해? 우리의 허락만으로는 부족한가.”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 한, 황호 님은 네게 그 웅족의 고문을 허락하지 않을 거다.”

부부의 단호한 태도에도 김신록은 꺾이지 않았다.

“두 분의 허락을 받지 못하는 건 애석하지만, 그래도 그런 이유로 고문을 하는 건 어렵습니다.”

“그래……?”

“은영관의 지하에는 아직 사지와 정신이 온전한 웅족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바로 시연하겠습니다.”

김신록은 처음부터 웅족에게 고문을 시연할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다.

김신록이 고문의 예시와 웅족의 상태를 설명하며 설득했다.

호족 부부는 얇은 가면을 쓴 것처럼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는 김신록을 들여다봤다.

저 부부는 김신록의 표정을 집요하게 관찰하다가 갑자기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뱉었다.

“네 아버지가 어떻게 사형을 면했는지 아느냐?”

왜 여기에서 적호의 이야기가 나오는 건가.

궁극적으로는 김신록이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 그의 호족에서의 입지 등등이 적호와 관련 있긴 하지만.

‘적호가 죽음을 면한 건 천신과 친우의 자비 그리고 황호와의 계약 덕분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반도에 외적이 쳐들어와 호족과 웅족이 함께 싸웠다.

그러나 전쟁 도중 웅족의 수장이 전사한 후, 웅족은 호족을 배신했다.

새로 수장의 자리에 오른 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웅족은 전쟁 도중에 호족을 저버리고 외적 측에 가담했다.

긴 전쟁 끝에 외적과 웅족을 제압한 뒤, 하늘이 열리고 천신이 내려와 신성한 범들과 한반도에 축복을 내렸다.

그때, 신성한 범들이 거대한 권능을 받고 신화계 호족이 되었다.

‘이때 적호가 웅족이 용서받는 것을 소원으로 빌었고, 천신이 이를 들어줬지.’

이어서 플마고에서 얻은 정보, 이 세계에서 배운 개천신화, 황지호로부터 들은 옛이야기를 종합해 적호와 비탄의 웅녀 사이의 과거사를 반추했다.

호족과 웅족이 극적으로 화해했지만, 평화는 길게 가지 않았다.

웅족은 야심을 버리지 못했다.

비탄의 웅녀는 적호에게 ‘천신의 은총이 사라져야 호족과 웅족이 공평하게 한반도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꼬드겼다.

적호는 웅녀의 말을 받아들여 한반도 곳곳에 세워진 호신총을 부수어 한반도에 내려진 천신의 축복을 지웠다.

그 결과 백두산을 제외한 모든 곳의 호신총이 부수어졌다고 한다.

‘친우들이 받은 천신의 은총을 어찌하기 전에, 다행히 깨달은 것 같지만.’

적호의 의도가 어떠하든, 한반도 땅에 내려진 천신의 축복을 지운 건 대죄임이 틀림없었다.

적호는 제 목숨을 내놓아 죗값을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했던 적호는 아들을 위해 황지호와 계약을 했다.

황지호는 그 계약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적호가 죄를 범한 직후, 적호는 제 목숨을 내놓아 죗값을 치르는 대신 아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해 달라 청했다.

―당시 은호를 대리해 임시로 수장을 맡고 있던 건 나였다. 나는 호족을 대표해 적호의 청을 거절하고, 대신 개인적인 계약을 제안했다. 뭐…… 제안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깝겠군.

―적호가 살아서 죗값을 치르고 내 명을 듣는 한, 나는 적호의 아들을 호족의 후예로 취급하며 그를 보호할 것이다. 단, 적호가 죽는 순간 그 아들을 웅족의 후예로 여길 것이다.

이 계약은 언뜻 보기엔 그럴싸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틈이 있었다.

그 틈은 ‘다른 호족의 존재’ 였다.

그 틈의 존재를 깨닫게 된 계기는 이 호족 부부와의 만남이었다.

‘다른 호족들은 황지호의 선택을 어떻게 납득한 걸까?’

황지호는 당시 정식 수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식 수장이 아닌 이가 친우와 그 아들을 구하기 위해 이런 계약을 개인적으로 했다면, 과연 다른 호족들은 납득할 수 있을까.

황지호가 김신록을 비호하고, 적호가 죽음을 면하고, 다시 적호가 수장의 최측근으로서 움직인다니.

호족들이 황지호를 실각시켜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태까지 내가 관찰했을 때, 수장으로서 황지호의 입지는 굳건했고 그를 따르는 호족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심지어 후예를 잃은 저 호족 부부조차 황지호를 크게 반기지 않았던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더 있었기에 다른 호족들이 납득한 걸 거야.’

그리고 김신록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 무언가에 관해선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와 달리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것 같았지만.

김신록은 다소 혼란스러운 듯했으나 부부의 물음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적호 님의 친우분들께서 선처를 빌고, 천신께서 자비를 베푸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것도 있지. 하지만 어찌 그것만으로 호족을 배신한 죄를 면하고, 다시 수장의 곁에서 호족을 위해 일할 수 있겠느냐.”

“옛 수장인 은호 님과 현 수장인 황호 님께서는 제 친우를 귀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족들의 뜻을 저버릴 분들은 아니다.”

호족 부부의 말에 김신록은 점점 더 혼란스러운 듯했다.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 듯 김신록이 입을 다물자 부부가 대신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가 사형을 면한 건, 제일 먼저 웅족의 배신을 알아차리고 최전선에서 싸워 가장 큰 공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적호 님이 수렵 싸움에서 백호 님을 이긴 건, 웅족과의 결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부부는 신화시대 당시, 웅족이 호족을 배신했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적호는 호족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빠르게 한반도 곳곳에 퍼져 있던 호신총을 파괴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은 백두산의 호신총을 부수기 전, 적호는 산 정상에서 한반도를 내려다보다 위화감을 느꼈다.

뒤늦게 웅족의 배신을 깨달은 적호는 최후의 호신총을 부수는 것을 중단하고 모든 것을 밝힌 후, 단신으로 웅족의 본진으로 향했다.

웅족은 혈혈단신으로 나타난 적호를 크게 환영했다고 한다.

비탄의 웅녀를 향한 적호의 사랑은 극진했고, 둘 사이에는 후예도 있었지 않았던가.

이제는 적호가 호족 사이에 발을 디딜 수 없을 테니 웅족들은 당연히 적호가 웅족의 손을 잡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웅족의 본진 깊숙한 곳에 파고들어 수뇌부를 마주한 적호는 곧바로 붉은 번개를 불렀다.

적호가 부른 적뢰는 쉬지 않고 수많은 웅족을 잿더미로 만들어 순식간에 수뇌부를 괴멸시켰다.

모든 힘을 쏟아부은 적호는 이후 호족에게 죄를 청하러 갔다고 한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선택을 한 네 아버지를 위해 누가 그 이야기를 하겠느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적호 님이 백호 님보다 큰 공적을 세운 전투였으니, 백호 님을 흠모하는 호족들이 입단속을 시킨 것도 있지.”

“그 이야기를 기억하는 호족들도 많지 않을 거다.”

김신록은 정말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지 당혹스러워했다.

부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아주 배은망덕한 호족들이란다. 웅족이 배신하기 전, 외적과의 싸움에서도 몇 번이나 적호 님께 구명받고선 이리도 원망하고 있으니 말이다.”

“……적호 님이 백일, 아니, 삼칠일의 시련을 견뎌 내고 외적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맺어지지 못했겠지. 그 전에 죽었을 테니까.”

부부는 김신록에게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저 아무 장식도 없는 흰 가면을 쓴 탓일까.

쉬지 않고 말을 흘려 넣는 모습에 귀기가 느껴졌다.

“후예를 잃은 우리를 위해서 호족들은 너희 부자에게 더 가혹하게 굴었겠지.”

“우리가 네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조금만 덜 원망했다면 네 아버지가 붉은 형틀에 묶이는 기간이 짧아졌을 거다.”

“너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랄 수도 있었겠지. 우리의 선택과 태도 여하에 따라서 네가 더 행복한 유년 생활을 보냈을지도 모르겠구나.”

“너는 고문 기술자가 아니라, 호족의 전사로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부부의 말이 이어질수록 김신록의 표정이 조금씩 무너져내렸다.

김신록의 머릿속에서 무수한 만약의 상황이 떠오르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

붉은 형틀에 묶인 적호를 구하려다가 적호가 더 큰 벌을 받지 않았던가.

만약 부부의 말대로라면 적호가 ‘예견된 지옥’ 디버프를 짊어질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아직도 우리를 고문할 생각이 없느냐?”

“우리를 고문하면 네 아버지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다.”

“네 유년 시절을 망가뜨린 원인 중 하나가 여기에 있는데, 이유가 더 필요해?”

김신록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사이에도 부부는 김신록을 부추기는 말을 속살거렸다.

한참 고뇌하던 김신록이 마침내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두 분께서 제게 어떤 말씀을 전하고, 무엇을 시키고 싶어 하는지 이해했습니다.”

김신록은 처음 입을 열었을 때보다 목소리가 더 갈라져 있었다.

“그래도 저는 당신들을 고문할 수 없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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