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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68화 (466/925)

67. 틈 (10)

한 번 마음을 잡은 김신록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김신록은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숨을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저는 호족을 위해 고문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호족을 고문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호족이 괜찮다고 해도?”

“네. 두 분을 고문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김신록은 사적인 이유로 누군가를 고문할 생각이 없고, 그 부부에게는 그 사적인 이유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힌 셈이다.

부부가 그렇게 도발했는데도 김신록의 말이나 태도에선 분노나 증오가 느껴지지 않았다.

김신록은 한결 안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어린 시절이 그렇게 불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게는 훌륭한 스승님들이 계셨으니까요.”

김신록이 지칭하는 훌륭한 스승님들이란 백호군과 청호를 가리키는 것이다.

김신록은 백호군으로부터 무(武)를 배우고, 청호로부터 역용술을 배웠다고 했으니까.

“후회나 고통스러운 기억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저 때문에 적호 님이 더 힘든 길을 걷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오롯이 제 탓이니 누구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김신록은 안정되어 갔다.

갈라진 목소리도 평소대로 돌아왔고,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제 탓을 하면서 안정을 되찾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김신록의 제자인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떠올랐다.

‘성국언과 안다인이 따르는 교사는 저런 분이구나.’

김신록과는 황명호 대저택에서 자주 만나긴 했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기회는 별로 없었다.

김신록이 자신에 관해 말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적호에 관련된 건 티가 나긴 했으나 그 외의 것은 숨기기 위해 애쓰는 티가 났다.

그래서 용제건이 툭하면 김신록을 건드리고 찔러보는 걸 거다.

‘처음부터 김신록이 좋은 교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감독관이었던 김신록이 만신창이인 상태로 등장했다.

김신록은 마지막 힘을 짜내 도주하는 대신, 생면부지인 우리에게 도망치라고 외쳤다.

교사로서 학생들을 위해 저렇게 행동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그 당연한 걸 해내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플마고가 배드엔딩으로 끝난 건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탓도 있다.

‘……이쯤 하면 됐지 않나?’

부부가 더 몰아붙여 봤자 김신록이 마음을 바꿀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잠자코 김신록의 이야기를 듣는 호족 부부를 봤다.

호족 부부는 다시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는 김신록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아까부터 네 아버지를 ‘적호 님’이라고 부르는구나.”

“…….”

“네 아버지를 인정하지 못해 그런 것 같고.”

아마 김신록이 인정하지 못하고, 용서할 수 없는 건 적호가 아니라 제 자신일 거다.

그래서 김신록은 적호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꼬박꼬박 ‘적호 님’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리플레이’에서 막 깨어났을 때, 얼떨결에 아버지라고 부를 뻔했던 걸 빼면 매번 적호 님이라고 부르던데.’

적호가 그걸 달갑게 여길 리가 없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적호가 아들 주접은 부려도 아버지라고 불러 달라 부탁하진 않을 것 같은데.

김신록이 적호에게 아버지 소리를 할 날은 멀어 보였다.

김신록이 대답할 기색이 없자 부부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어렸을 때 우리와 너는 마주친 적이 있단다. 기억하고 있니?”

호족 부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신록이 장성하기 전의 작고 철없던 시절을 말하는 건가.

김신록은 부부가 초면인 것처럼 굴었는데.

매우 어렸을 때 만났거나, 그냥 부부가 일방적으로 목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부부의 태도를 보니 아닌 것 같다.

“……죄송합니다,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김신록이 면목 없어 하자 부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내가 후예를 유산하고 우리는 몇 년 동안 두문불출했다. 그때, 네가 우리를 찾아왔지.”

“……제가 찾아갔습니까?”

“그래, 분명 우리가 머물던 처소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방비해 뒀는데…… 너는 다른 호족의 언질을 무시하고, 우리가 짜 둔 결계를 모두 파훼한 후 처소로 들어왔지.”

김신록의 어린 시절을 말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천방지축, 사고뭉치라고 말했는데, 정말 여러 사고를 치고 다닌 모양이었다.

김신록은 어리둥절해하다가 부부의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집히는 게 있나 보다.

“혹시 그때 면사를 쓰고 계셨습니까……?”

“그래.”

김신록이 부부를 잊은 건 아니었나 보다.

그저 못 알아봤을 뿐인 것 같았다.

한층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서 황지호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황지호는 기분이 복잡해 보였다.

“이건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군.”

황지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황지호가 어린 김신록이 친 사고를 전부 파악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바쁘신 황호 님께 하나하나 보고할 수는 없었지요.”

“딱 한 번뿐이었으니까요. 보고할 일도 아니었답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설명해 다오.”

황지호가 그렇게 묻자 부부들은 순순히 그들이 김신록을 마주쳤을 때의 일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김신록은 둘을 말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황호 님의 배려로 저희가 호족과 따로 떨어져 첫 거처를 얻은 후의 이야기입니다.”

호족 부부가 웅족과의 결전에서 아이를 유산한 후.

몇 년간 그들은 호족의 영역 한구석에 결계를 치고 틀어박혀 아이를 추모했다고 한다.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채로 스러진 생명이었기에, 장례도 번듯하게 치르지 못한 채 그들의 기약 없는 추모가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호족의 영역 중 황지호의 힘이 아닌 결계가 쳐져 있는 곳에 흥미를 가진 어린 김신록이 등장했다.

다른 호족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강력한 결계가 마음에 걸려 더 궁금하고 가고 싶었나 보다.

“김신록…….”

“…….”

황지호가 이름을 부르자 김신록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김신록은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경황이 없어 보였지만, 나는 내심 대단하다고 느꼈다.

저 호족 부부가 황지호만 한 힘은 없겠지만 그래도 신화시대를 보낸 진족인데, 한참 어린 김신록이 그들이 친 결계를 뚫고 들어가다니.

과연 적호가 아들 부심을 품을 법했다.

“기척 없이 결계를 해제한 걸 보고 믿을 수 없었지. 직접 마주치지 않았으면, 잠입한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

부부는 칭찬하고자 하는 말인 것 같았지만, 김신록은 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부부의 말에 의하면 김신록은 부부와 마주치고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김신록은 보통 담이 큰 게 아닌 것 같았다.

“붉은 머리를 가진 어린 후예를 본 순간, 우리는 곧바로 네가 적호의 아들이라는 걸 알아봤다.”

처음 김신록을 발견한 순간 느꼈던 당혹감은 어두운 생각으로 변해 갔다.

웅족과 배신자의 아들은 살아남았는데 왜 부부의 아이는 죽은 걸까.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면, 적호의 아들처럼 이렇게 재능과 장난기 넘치는 아이로 자랐을까.

격앙된 그들은 김신록을 해칠까 고민했다.

멋대로 부부의 영역에 발을 들인 건 김신록이니, 명분도 나름 있지 않은가.

부부의 사고가 점점 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 부부를 발견한 어린 김신록이 말을 걸었다.

―왜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요?

―우리 아이를 뵐 낯이 없어서 그렇단다.

―아이가 있어요? 어디에 있어요? 같이 놀아도 돼요?

―…….

김신록은 부부에게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어린 김신록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배려 없는 말에 화가 났지만, 아이란 말에 놀 상대가 있지 않을까 들떠 보이는 김신록을 보니 뭐라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김신록이 혼자 이런 곳까지 온 건 놀아 줄 상대가 없어서였을지도 몰랐다.

―우리가 잘못하는 바람에 아이가 만나 주질 않는구나.

―너는 아주 큰 잘못을 한 부모를 용서할 수 있니?

부부는 적호와 웅녀를 떠올리며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아이와 만날 수 없다는 말에 실망하던 김신록이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모르겠어요. 저는 부모님이 안 계시거든요. 진족은 원래 부모 없이 태어난대요. 부모가 있어도 아주 드물게 진족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요.

진족은 신화, 전설, 자연 현상에서 비롯된 이종족을 칭하는 말이니, 부모가 있는 편이 드물었다.

김신록이 알고 있는 지식이 잘못된 건 아니었지만, 그는 진족이 아닌 후예였고 그에게는 부모가 있었다.

김신록은 자신의 부모가 적호와 웅녀인 것도 모르는 데다가 자신을 진족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부부는 점점 김신록이 안쓰럽게 보였다.

김신록을 해할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건 그다음 말을 들은 이후였다.

―그런데 저라면 부모님 얼굴을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러니까 두 분의 아이에게 얼굴을 보여 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김신록의 얼굴에선 짙은 외로움과 부부를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그래서 부부는 김신록을 조용히 돌려보냈다고 한다.

김신록도 제가 저지른 말썽에 대해선 떠들지 않았으니, 여태까지 황지호도 저들이 만난 걸 몰랐던 거다.

“……바로 알아보지 못해 사과가 늦어졌습니다. 그때 허락도 없이 처소에 잠입해서 죄송합니다.”

김신록은 변명하지 않고 바로 사과했다.

워낙 옛일인 데다가 부부가 누군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을 테고, 그땐 가면이 아닌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 변명거리는 많을 텐데.

부부는 손을 저어 사과하는 김신록을 멈추게 했다.

“시험해서 미안하다. 어렸을 때의 네가 우수하고 착한 아이였던 걸 기억하지만, 확인이 필요했단다.”

“우린 웅족이 어떻게 태도를 바꿨는지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너는 참 바르게 자랐구나.”

부부가 마른 손을 뻗어 김신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방금까지 귀기 어린 태도로 김신록에게 고문을 강요하던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김신록은 멍하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황호 님, 저 아이에게 그 웅족을 맡기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계속 지켜보고 있던 황지호가 그 말에 곧바로 긍정했다.

황지호는 근심을 덜어서 그런지 몹시 밝아 보였다.

기분이 지나치게 좋아진 탓일까, 노친네가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이 선택을 한 건 조의신과 관계가 있나?”

조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신록이 번뜩 내 쪽을 쳐다봤다.

왜 굳이 김신록이 있는 앞에서 저걸 말했는지 모르겠다.

“은인이 한 부탁이 계기가 되었지요. 하지만 이후에 한 말과 행동은 다 우리가 생각해 멋대로 행한 것입니다.”

“부탁이라…….”

그 말에 부부가 하얀 가면을 쓴 얼굴을 들어 내 쪽을 돌아봤다.

부탁에 관해 말해도 되겠냐는 뜻 같았다.

어차피 숨길 수도 있는 게 아니니 고개를 끄덕였다.

“은인께서 어제 저희에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직접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면서요.”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탁이었지만, 은인이 하신 말씀이니까요. 게다가…….”

호랑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저희와 비슷한 눈을 한 아이가 부탁하니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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