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틈 (11)
어젯밤, 천익산.
나와 호족 부부는 천익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밤중에 부부를 산으로 불러내는 건 마음에 걸렸지만, 둘과 이야기할 만한 장소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어두울 때 산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좀 그렇긴 한데, 천익산에는 우기환 일당이 돌아다니니까 더 그렇다.’
그래도 수능이 일주일 정도 남았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수능 응원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는 김유리의 말에 의하면, 3학년 0반 중에서도 수능 응시자가 꽤 있다고 한다.
수능 날까지 공부를 하고 집중력을 가다듬어야 할 텐데, 과연 이 늦은 시각에 고3이 천익산에 올 리가······ 있었다.
천익산을 올라가던 중, 우기환 일당을 발견해 몸을 숨겼다.
수능이 며칠 남았다고 저놈들이 여기에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
“오늘의 야간 비밀 트레이닝은 이걸로 종료한다. 해산!”
“수고했다!”
비밀 트레이닝을 하는 놈들이 저렇게 우렁차게 목소리를 내도 되나?
수능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큰 시험의 압박감이 더해져 3학년 0반의 미치광이력이 더 올라간 것 같다.
우기환 일당이 배가 고프다며 학교 앞 편의점으로 사라진 후에야 다시 천익산을 오를 수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어둠 속에서 미동도 안 하고 서 있는 부부가 보였다.
‘······다른 데서 보자고 할 걸 그랬나?’
늦은 시간에 저 모습으로 산을 오른 부부를 생각하니 뒤늦게 후회했다.
죽호에게 부탁해서 죽림에서 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조의신, 또 보는군요.”
“생각해 보니 아이가 산에 혼자 돌아다니기엔 늦은 시간이라 마중을 가야 하나 고민했어요.”
아이라고는 해도 일단 고1에 내용물은 훨씬 더 나이를 먹었는데.
5천 년 정도를 산 부부에 비하면 아이라고 불려도 어색하진 않았지만.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죄송해요.”
인사를 했더니 부부가 말을 뚝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부부는 나를 진짜로 아이 취급 하는 건지 기특해하는 말투로 말했다.
“조의신은 예의 바르군요.”
“가면을 써서 그런지 보통 인사도 잘 못 하는 아이들이 많거든요.”
“아이들과 만나고 이야기할 기회가 많은 건 아니지만요. 긴 세월을 살았는데도 횟수가 열 번을 넘지 않네요.”
가면에서 느껴지는 위압감도 상당하지만, 아마 가면 탓만은 아닐 거다.
부부의 말투나 몸짓, 가면의 틈 사이로 보이는 눈빛에서는 시종 짙은 슬픔이 묻어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그 강렬한 감정과 마주치면 공포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이 만난 몇 안 되는 아이들이 인사도 제대로 못 했던 거겠지.
얼어 버린 아이들과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몰라 하는 부부를 생각하니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조의신······.”
부부가 나를 보다가 침음했다.
부부를 앞에 두고 딴생각을 너무 길게 한 것 같았다.
반성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디바이스를 통해 말씀드린 대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은인의 부탁인걸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디바이스로 말할 수 없는 부탁인 걸 보니 아마 힘을 쓰는 일이겠지요?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답니다.”
부부는 내가 호족의 전투력을 빌리려 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부부의 말만 들으면 아이템을 부수어 달라거나 사람을 처리해 달라는 요구 따위가 떠올랐다.
내가 하려는 부탁은 그런 게 아니다.
“디바이스를 통해 말씀드릴 수도 있는 내용이었어요. 그래도 직접 뵙고 이야기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요.”
“······그래요?”
“어떤 부탁이죠?”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은 일단 삼켰다.
어차피 사과는 나중에 또 해야 할지 모르니까.
“적호 의 아들, 김신록 선생님이 여태까지 한 웅족의 고문 기록을 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네······?”
부부는 긴 세월 연을 맺은 황지호가 적호를 언급했을 때에도 그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걸 앞에서 보고도 나는 부부를 불러내 이런 부탁을 하고 있으니, 마음에 참 걸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당혹스러워서 제대로 생각을 못 했는데.”
“은인께서는 그 아이가 웅족의 후예이기도 하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그 애가 웅족을 고문한다고요?”
“······후예는 핏줄이 이어진 진족을 공격할 수 없답니다.”
“고문은 고통을 주는 행위잖아요.”
부부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김신록은 웅족을 고문했고 성과도 냈지만 이 부부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호족 부부는 복수의 대상이 된 웅족이 붙잡힌 것과 거의 동시에 죽호의 가든에 들어가 지냈으니 소문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그들이 밖에 나왔다고 하지만, 황지호조차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상황이다.
누가 저 부부에게 적호의 아들의 이력에 관해 이야기하려 하겠는가.
‘호족 중에는 그런 짓을 할 이들이 없겠지.’
내 주변에는 별생각 없이, 재미로, 그냥 혹은 고통을 줄 목적으로 가족을 잃은 사건에 관해 언급하는 이들이 많았다.
많은 이들이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사건에 관해 들이대며 내 반응을 지켜보곤 했다.
그에 반해 호족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악역을 맡을 누군가가 필요했다.
‘은인이라는 방패를 이용해서 이런 말을 하다니······.’
죄책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후예는 근원이 이어진 진족을 물리적으로 공격할 수 없죠. 하지만 그 룰에는 허점이 있습니다. 김신록 선생님은 그 틈을 찾아내 여태까지 웅족을 고문하셨습니다.”
“틈······?”
나는 김신록이 한 고문에 관해 설명했다.
대상이 애착을 느낀 소유물을 대신 고문하고 파괴한 것.
대상이 정신적, 물리적으로 고통받는 상황을 방치하고 김신록을 의존하게 만들어 간접적으로 고문한 것.
김신록이 웅족을 대상으로 한 고문을 듣던 호족 부부의 눈이 점점 가라앉았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김신록 선생님께서 전부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고문에 사용한 수단과 과정, 얻어 낸 정보와 웅족의 현황 모든 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김신록은 꼼꼼하게 여태까지 한 고문 과정을 모두 정리했다.
김신록이 작성했다는 보고서만 열람했는데, 영상 기록을 보지 않아도 눈에 그려질 만큼 서류 작성이 훌륭하게 되어 있었다.
김신록이 후예로서의 패널티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거듭했을까.
다른 호족이 용을 써도 얻을 수 없었던 정보를 웅족의 후예가 얻은 셈이니, 노력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한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호족 부부가 붙잡은 웅족은 흑막과 가깝게 지냈다는 거물이야. 다른 웅족보다 고문하기 까다롭겠지.’
어쩌면 김신록이 뒤늦게나마 다른 웅족을 고문하게 된 것처럼, 시간을 들이면 황지호가 천천히 부부를 회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
흑막에 관해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파악해야 나도 대응책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러니 김신록이 그 웅족을 맡게 하도록 움직이기로 했다.
“······은인께서는 그 아이에게 고문을 맡기고 싶어서 저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건가요?”
부부의 말대로였지만, 그게 내 의도의 전부는 아니었다.
‘김신록이 호족 사이에서 인정받게 만들어야 해. 인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살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만들어야 할 거야.’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은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시험을 치러 온 중학생을 죽여 은광고에 먹칠을 할 의도도 있었겠지만, 이야기를 꼬이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은 김신록의 죽음이다.
김신록의 죽음을 계기로 적호와 황지호는 갈라섰고, 황지호는 이번 사건에 개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플마고 때를 생각해 보면, 적호와 백호군을 제외한 다른 호족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 그래서 나도 김신록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지 못한 거고.’
용족의 후예, 염준열이 죽었을 때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랬다.
용족의 수장 청룡을 중심으로 용족이 결집하여 국가 권력과 맞섰고, 용왕신이 가호를 거둘 때까지 여의도가 불타지 않았던가.
그때 일을 생각하면 김신록의 입지가 뚜렷하게 보였다.
김신록은 플마고에서 어린 학생들을 지키지 못하고 사망한 교사 취급을 받고 끝났다.
‘김신록의 생존 확률을 올리고, 호족이 김신록을 보호할 여지를 남길 필요가 있어.’
흑막은 언젠가 반드시 김신록을 죽이기 위한 수를 둘 것이다.
물론 황지호, 적호, 백호군은 김신록을 보호하려 들겠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흑막은 그 셋이 김신록을 아낀다는 걸 알고 호족 사이에선 입지가 그리 좋지 못한 것도 알고 있다.
언젠가 김신록을 죽이기 위해 움직인다면, 그 틈을 노릴 가능성이 크다.
내가 흑막이라면 반드시 그런 수를 둘 거다.
실제로 플마고 속에서 김신록은 그렇게 죽지 않았는가.
‘김신록의 입지가 바뀌었다는 걸 흑막이 알지 못한다면, 허를 찌를 수 있겠지.’
흑막을 잡기 위한 수를 짜기 위해 부부의 감정을 무시하는 꼴이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자리에서 부탁을 하기로 했다.
저 부부가 김신록에게 웅족의 고문을 허락해 주고 성과를 낸다면, 다른 호족들이 김신록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부부는 내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들이 화를 내거나 때리면 한 대 맞을 각오도 하고 있었는데, 부부는 내 눈만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달이 구름 속에 묻혀 주변이 더 컴컴해졌을 때쯤 부부가 말하기 시작했다.
부부는 잠시 내게서 시선을 떼고 서로를 바라봤다.
“당신은 늘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군.”
“같은 아픔을 겪었으니, 우리의 사고가 비슷하게 흐를 수밖에 없지.”
“······만약 황호 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면, 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을 텐데.”
부부는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부부는 측은한 걸 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어둠 속, 죄책감과 동정심, 슬픔이 뒤섞인 눈을 한 부부가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은인이 우리와 같은 눈을 하고 말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네요.”
“생각해 보겠다는 말도 나오지 않아요.”
내가 부부와 같은 눈을 하고 있다고?
믿기 어려웠지만, 부부가 거짓말을 할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저 부부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나 보다.
순간 먼저 떠난 가족들이 떠올라 눈앞이 어두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이 어둡다 보니 시야가 그렇게 흐려지지는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와 나는 한참 동안 서로를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만약 지금 내 손에 저 부부가 쓴 흰 가면이 있었다면 가면을 쓰고 부부와 얼굴을 마주했을지도 모르겠다.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힘들었다.
“은인의 부탁을 듣겠습니다.”
“기록을 본 후에 어떤 결정을 내릴지 말씀드릴게요.”
앞으로 김신록을 두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부부는 일단 고문을 한 기록을 살펴보겠노라고 답했다.
저 대답을 들으니 긴장이 풀렸다.
한숨을 삼키는 나를 두고 부부가 등을 돌렸다.
“다음에 봐요, 조의신.”
어둠 속에서 부부가 먼저 자리를 떴지만, 나는 그 자리에 남아 계속 서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