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틈 (12)
부부는 내가 어젯밤 부탁했던 사항을 언급하며, 내가 부탁한 건 ‘기록을 보는 것’일 뿐임을 강조했다.
내가 나선 탓에 부부가 김신록을 몰아붙였다고 여겨질까 봐 걱정한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상 내가 그런 부탁을 해서 부부가 이 자리에 나온 것 아닌가.
원인은 나인 거나 다름없었다.
“은인의 부탁으로 저희는 여태까지 웅족의 고문 내역에 관해 살펴보았답니다.”
“흠잡을 곳이 없더군요. 고문의 내용과 결과만 보면, 저 아이가 한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지나치게 훌륭했던 탓에 이런 촌극을 벌였지만요.”
황지호와 김신록에게 사정을 모두 전한 호족 부부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어젯밤에 오랜만에 동족들을 만나 은인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호족 부부는 나에 관해서도 알아본 건가?
그런 부탁을 했으니 알아보는 게 당연하겠지만.
하지만 뒤에 이어 나온 말은 당연하게 들리지 않았다.
“다음에는 저희도 꼭 은인의 가족에게 꽃을 올리겠습니다.”
“저희는 황호 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한, 계속 호족의 가든에서 지낼 예정이에요. 디바이스로는 통신이 안 되니 다음엔 서신을 보내 주세요.”
……호족 부부는 봉안당에 왔던 호족과 이야기했던 모양이다.
이 세계의 시간 기준으로 우리 가족이 1주기를 맞이했을 때, 호족들이 잔뜩 오지 않았던가.
호족 중 누군가가 언급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황지호가 말했다.
“알았다. 다음에는 너희를 부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호족들은 정말 내년에도 우리 가족을 위해 꽃을 올릴 생각인가 보다.
가족을 추모해 줄 이가 늘어난 건 감사한 일인데, 호족 부부에게 저 말을 들으니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러면 그 웅족의 고문은 김신록에게 맡기겠다. 죽호에게 전해 둬야겠군.”
“저희도 참관하겠습니다.”
“여전히 그 웅족은 너희들의 관할이니 죽이거나 미치게 하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황지호의 말에 부부는 먼저 죽림으로 가 있겠다며 자리를 떴다.
부부에 이어 우리도 은영관 밖으로 나섰는데, 김신록은 고문 준비를 하겠다며 은영관에 남기로 했다.
황지호에게 인사를 한 후, 김신록이 내게 말했다.
“조의신 군, 고맙습니다. 늘 조의신 군에게는 신세만 지는군요.”
……그게 고마워할 일인가?
김신록과 부부의 대화를 눈앞에서 본 입장에선 과연 감사받을 입장인지 알 수 없었다.
대놓고 그 말을 할 수 없어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니에요. 웅족의 고문 잘 부탁드립니다.”
“네, 맡겨 주십시오.”
김신록은 처음 이 자리에서 봤을 때보다 밝아져 있었다.
웅족의 고문을 허락받아 의욕이 넘치는 듯했다.
일이 잘 풀렸다는 생각에 안심하니 힘이 빠졌다.
“조의신, 오늘은 저택에 들르지 않겠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지.”
오늘 당장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는 없으니, 평소 같았으면 거절했을 거다.
그런데 오늘 내가 호족 사이를 헤집은 걸 생각하면, 그냥 거절하기가 좀 그랬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는데, 평소 같았으면 이 모습을 보고 처웃었을 황지호가 웃질 않았다.
“은영관 정문 앞에 에어 셔틀을 대기시켜 뒀다. 타고 가지.”
“어.”
황지호가 먼저 올라탄 에어 셔틀 안.
나는 황지호와 마주 보고 앉았다.
황지호는 호족 부부와 김신록이 자리를 뜬 이후로 묘하게 말수가 적었다.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에어 셔틀이 부상했을 때,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그 부부와 같은 눈이라…….”
황지호가 내 눈을 응시하며 그렇게 말했다.
내 눈앞에 부부나 김신록이 없으니 지금은 그런 눈을 하고 있진 않을 텐데.
황지호는 생각에 잠겨 있다 말했다.
“이전 세계에서 너는 성인이 된 지 꽤 지났다고 들었다. 내 나이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지만.”
노친네가 자신의 나이가 많은 건 잘 알고 있는가 보다.
왜 갑자기 부부와 눈이 닮았네 마네 하다가 나이 얘기를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황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조의신, 설마 너는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황지호는 말을 다 맺지 않았다.
에어 셔틀이 황명호 대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차 내부는 계속 조용했다.
침묵이 무거워서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애썼다.
‘오늘 대저택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걸까. 아마 웅족의 고문에 관한 이야기겠지. 거기에서 나오는 정보에 따라 어떻게 움직일지 사전에 정하면 나중에 변수가 생겼을 때 대응하기 편할 거고…….’
황명호 대저택 대문 앞에서 내린 후에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황지호는 따라오라는 듯 앞장서서 걸었다.
‘오늘은 식사를 한다고 했으니 본채 쪽으로 가나? 아니, 이야기를 하려면 은호의 별채 쪽으로 가는 게 편할 텐데…… 어차피 은호도 알아야 할 내용이니까.’
은호의 후예들이 지내는 본채.
은호가 머무는 현대식 별채.
둘 중 한 곳으로 향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황지호는 한옥 별채 쪽으로 걸었다.
황명호 대저택 부지에서 몇 번 본 세살창문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할 때,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황지호가 말했다.
“오늘은 별 얘기를 할 생각이 없다. 은인에게 내가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쉬게 할 생각이다.”
은호는 은호의 후예나 다른 호족과 마주치거나, 자신의 흔적이 드러나는 걸 염려해 별채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은호의 후예를 만날 생각이었다면 본채로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은호나 은호의 후예와 만날 일이 없나?
정말 식사만 하려고 부른 건가?
……황지호가 딱히 할 말이 없었으면 그냥 기숙사로 갈 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간다고 할까?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건 예의가 아닌데.’
오늘 지은 죄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국 한옥 안으로 들어갔다.
속으로 빨리 밥을 먹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한옥 별채 안에서 들린 소리에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잊고 말았다.
왕왕!
천사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한 천사는 내가 왔다는 걸 아는 건지, 반갑게 나를 맞이하며 달려 나왔다.
올무는 어떻게 저 작은 귀로 내가 오는 소리를 듣고, 저 작은 발로 이렇게 빨리 달려올 수 있는 걸까.
올무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천재임이 틀림없었다.
“신수를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대기시켜 뒀다. 잘한 것 같군. ……조의신 네가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황지호가 뒤에서 뭐라 말하긴 했지만, 올무의 안부를 묻고 올무의 천재성에 감탄하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올무와 감동의 재회를 한참 나눌 때였다.
“황호, 조의신, 안녕하십니까.”
방 안에는 천사 외에도 누군가가 한 명 더 있었다.
적호였다.
적호는 어제 봤을 때에 비해 퀭한 눈을 하고 있었다.
황지호가 함께 식사를 하고자 하는 이 중엔 적호도 있었나 보다.
‘……은영관에 있던 게 아니었구나.’
적호가 죽림에서 그랬던 것처럼 적연으로 몸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적호의 표정과 이 상황을 보니 그는 여태까지 황명호 대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적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마무리했습니까?”
“그래, 김신록이 웅족의 고문을 맡기로 했다.”
“그렇습니까?”
적호가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 아들 걱정을 하고 있었나 보다.
황지호는 부부와 나눴던 대화와 내가 한 일에 관해 간략하게 전했다.
적호는 잠자코 그 말을 들었다.
적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들이 심적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게 안타까운 듯했다.
그 모습을 보던 황지호가 물었다.
“어린 김신록이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알고 있었나?”
적호는 어린 김신록을 떠올렸는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었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적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지 못했습니다. 제 아들과는 옛이야기를 많이 하지 못했으니까요. 또, 부부와는 형틀에 묶이기 전 대화를 나눈 걸 마지막으로 어떤 연락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 그 부부와 이야기했었나?”
황지호는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적호가 형틀에 묶이기 전에 부부와 만났다는 걸 몰랐나 보다.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했으니 만났다고 하긴 어렵지만요.”
적호는 그때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스스로 형틀에 묶이기 전, 부부에게 사죄를 하기 위해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적호와 만나는 걸 거부했다.
적호와 만나는 것은 물론, 사죄를 받는 것도 거절했다.
“저를 만날 생각이 없다고 하더군요. 사죄를 들어 달라 강요할 수 없어 물러났습니다.”
“……그랬나.”
적호는 그 이후로 부부를 찾아가지 않았나 보다.
내 주변엔 제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협박하듯 사과를 하며 용서를 강요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적호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겪은 일을 부부가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호의 말을 끝으로 한옥 별채가 정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누가 왔군요.”
적호가 고개를 들어 바깥을 봤다.
황지호는 사전에 누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태연하게 말했다.
“기다리던 손님이 왔군.”
기다리던 손님?
이 식사회에 초대받은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나 보다.
머릿속으로 후보를 몇몇 꼽아 봤는데, 그럴싸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곧 미닫이문이 열리고, 손님이 등장했다.
“…….”
등장한 건 백호군이었다.
예상외의 등장이었다.
백호군이 한옥 별채에 와도 이상하지 않지만, 황지호가 손님으로 표현할 만한 대상은 아닌데.
왕왕!
한편, 품 안에 있던 올무가 백호군을 보고 반갑게 짖었다.
그러나 순간 무엇을 감지한 건지 금방 짖는 걸 멈추고 경계하는 눈으로 백호군의 뒤를 바라봤다.
“……황호, 설마!”
적호의 경악한 목소리가 한옥에 울려 퍼졌다.
황지호는 그 반응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하! 이제 알아챘나 보군.”
황지호는 뭐가 좋은지 처웃기 시작했다.
황지호는 백호군 뒤에 있는 손님에게 말했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 이만 들어와서 앉지.”
나는 백호군의 뒤편에서 등장한 누군가를 보고 숨 쉬는 걸 순간 잊고 말았다.
황지호는 내 반응이 몹시 마음에 드는지 아주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의신, 오늘은 음식만 대접하려는 게 아니다.”
그 손님은 체구가 작은 탓에 백호군의 뒤에 서 있으면 잘 보이지 않았다.
곧 백호군의 뒤쪽에서 예의 그 손님이 등장했다.
그 손님은 작은 팔다리를 크게 휘적이며 등장했는데 본인의 체구만 한 캐리어를 뒤에서 끌고 오고 있었다.
“안녕, 황호! 적호! 그리고 신수랑 인간도 안녕!”
등장한 손님은 향록이었다.
향록은 지나치게 밝은 얼굴로 나와 적호를 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황지호는 나와 적호에게 그걸 줄 생각인가……!
“오늘은 인간 외에도 전설계 호족의 영약을 짓는다고 했지? 재료를 잔뜩 준비해 왔어. 바로 영약을 준비할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