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다시 시작 (1)
향록은 황지호가 권하는 대로 냉큼 신발을 벗고 자리를 잡았다.
캐리어가 열리자 옥으로 된 작은 절구, 탕기에 이어 수상한 약초와 가루들이 진공 포장된 팩이 줄줄 나왔다.
“황호가 이번에 한 의뢰는 까다로워서, 직접 진맥을 한 다음에 조제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재료를 가져왔어!”
향록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캐리어 안의 내용물을 늘어놓았다.
향록은 까다로운 의뢰를 받았다며 뭐라 하긴 했지만, 몹시 신나 보였다.
황지호의 의뢰가 향록의 도전 의식에 불을 지핀 것 같다.
황지호는 향록의 태도에 흡족해하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적호는 평범한 회복 아이템이 통하지 않는다. 상위 존재의 권능을 빌린 광림만이 적호를 치유할 수 있지. 평범한 영약으로는 안 된다.”
“광림을 쓰면 지치지만, 특별히 광림을 써서 조제할게!”
녹족의 수장을 오라 가라 하며 광림을 쓰게 하는 거면 한두 푼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황지호는 이번에도 돈지랄을 했나 보다.
황지호가 적호에게 돈을 쓰는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문제는 그 돈지랄의 대상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거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부담스러운 것보다 그 엄청난 맛의 영약을 또 먹을 생각에 어질어질했다.
“조의신은 그동안 영약을 꽤 먹었지. 부작용이 없게 조정하려면 좀 까다롭겠네. 약재가 많이 들어갈 것 같은데.”
“보수는 넉넉히 지불하겠다. 네 힘과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도록.”
“응! 아, 현금이 아니라 저번처럼 실험체를 줘도 괜찮아.”
황지호와 향록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위기감이 커졌다.
망한 요리에 재료를 넣으면 넣을수록 더 맛이 이상해지듯이, 영약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저번보다 더 힘이 들어가고 약재가 많이 들어가면 더 맛이 없지 않을까?
그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급해졌다.
‘황지호는 아직 전무영의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을 파훼하지 못했어. 아직 도망칠 여지는 있겠지.’
나도 모르게 냉정하게 도주의 가능성을 따져 보고 있을 때였다.
품 안에 있던 온기가 꿈틀거려 정신이 들었다.
끄응……?
나의 천사가 나에게 멍하니 있지 말고 쓰다듬어 달라며 꼬리를 흔들었다.
올무를 두고 도망갈 수는 없는데, 큰일 났다!
아니지, 올무를 데리고 도망가면 되지 않나?
천사를 모실 만한 장소를 생각하고 있을 때, 시선이 느껴졌다.
“…….”
백호군이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영약의 맛을 아는 백호군은 내 속을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약을 못 먹겠다고 도망치려는 한심한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수치심을 느꼈을 때였다.
“나는 너를 돕겠다.”
백호군이 입술만 움직여 그렇게 말했다.
백호군은 여차하면 내 도주를 도울 생각인가!
황지호만 있었다면 모를까, 이래서야 도망칠 수 없다.
나의 천사 올무나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 백호군을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황지호는 나를 놀리겠다는 마음이 어느 정도 섞여 있었지만, 올무와 백호군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내 도주 의욕은 금방 꺾였다.
“적호, 적연으로 나나 백호의 눈을 속일 수 없는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적호도 나처럼 도주할 생각을 했나 보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했다.
향록은 그사이에 준비를 마친 건지 진맥을 시작했다.
먼저 진맥을 받은 건 황지호에게 도주를 시도하려다 걸린 적호였다.
황지호는 진맥 과정과 향록이 준비한 재료들을 보다가 말했다.
“가져온 재료만으로는 양이 부족할 것 같은데.”
“재료를 다 들고 올 수가 없었어. 일단 오늘 것만 만들고 남은 일주일분은 돌아가서 만든 다음에 보낼게!”
영약을 일주일은 먹어야 한다는 뜻인가!
향록에게 진맥을 받던 중인 적호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향록은 적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진맥을 계속하며 말했다.
“적호가 마실 영약은 아마 효과가 그리 없을 거야. 짊어지고 있는 힘이 너무 커. 그래도 참고 지정한 시일 내로 전부 마셔야 해. 영약에 오랜 시간 힘이 담기긴 힘드니까.”
효과는 크지 않지만 맛없는 영약을 기한 내로 다 마셔야 하는구나.
적호가 느낄 고충이 남 얘기가 아니었기에 마음이 아팠다.
적호의 진맥이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향록은 저번에 그런 것처럼, 이능파를 실은 작은 손가락을 움직여 맥을 짚었다.
이능파를 실어 목 쪽의 맥을 짚어 보던 향록이 침음했다.
“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향록은 진맥을 마친 건지 손을 떼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와 향록 둘 다 방석 위에 정좌했는데,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향록이 나를 올려다보는 모양새였다.
향록과 시선을 맞춰 주고 싶은데 둘 다 앉은 자세라 어찌할 수 없어 미안했다.
흉악한 맛의 영약을 만드는 녹족의 수장이었으나 어린아이가 열심히 약을 만드는 걸 생각하니 싫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향록이 생각을 정리했는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조의신, 혹시 숨 쉬기 싫어?”
“……네?”
갑자기 저게 뭔 소리인가.
죽고 싶냐는 뜻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저버리고 죽는단 말인가.
나는 즉각 부정했다.
“아뇨.”
당연한 대답을 했을 뿐인데, 향록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향록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그래? 호흡이 불편해질 땐 꼭 불러야 해.”
나와 향록을 지켜보던 황지호가 물었다.
“조의신에게 무슨 이상이 있나?”
“아니, 아파 보였는데 이상이 없어.”
이상이 없으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향록의 질문이 워낙 묘했던 탓일까, 황지호에 이어 백호군도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백호군은 눈에 안 띄게 검지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설마 그걸 의심하는 건가?’
백호군과 예전에 체스를 뒀을 때, 백호군이 내 이능파를 진정시키기 위해 검지로 이마를 짚었다.
그날 이런 대화를 나눴다.
―너는 체스를 둘 때 이능파로 네 숨통을 누른다.
―네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의 버릇이라면 다른 이들도 눈치챘겠지. 그러나 그 버릇이 네게 고통을 주는 건 변함이 없다. 고쳐라.
설마 내가 무의식중에 또 숨통을 누른 걸까.
최근 체스를 둔 적은 없는데…….
굳은 얼굴로 약재를 응시하고 있던 적호가 침묵을 깼다.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군요. 뭐, 이상이 있더라도 영약을 먹으면 나아지겠지요. 설마 그 맛을 참고도 아무 효능이 없겠습니까.”
“그 맛이라니! 내 약은 처음 먹는 거잖아.”
“……옆에서 먹는 걸 봤습니다. 먹은 이들의 반응이나 냄새만 봐도 맛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음…… 맛이 없는 건 어쩔 수 없긴 한데, 내가 직접 만드는 건데 효능이 없을 리가! 적호의 영약은 더 공들여 만들어야겠다.”
향록이 적호의 말에 의욕을 드높였다.
적호가 먹게 될 영약은 더 맛없고, 뛰어난 효능을 지니게 될 것 같았다.
향록의 반응을 보고 적호가 뒤늦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시음한 뒤의 반응을 보고 싶으니까 내가 조제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기다리는 동안 약차 마실래?”
향록이 보온병을 꺼내자 황지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찻잔을 준비했다.
향긋한 약차를 한 모금 마시니 전신에 온기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맛은 물론이고 이 정도면 효과도 뛰어난 것 같은데, 왜 약차를 놔두고 사약 같은 영약을 마셔야 하는 걸까.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향록은 쉬지 않고 떠들며 조제를 이어 갔다.
향록은 TC 연구소에서 제천대성과 마주친 이야기를 해 줬다.
“제천대성은 맛없다고 불평하면서도 약을 잘 먹더라! 직접 약을 만들 때는 맛에 신경 쓰는 것 같지만.”
향록은 맛을 두고 불평하는 적호 때문에 제천대성 이야기를 꺼낸 것 같은데, 그 덕에 제천대성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제천대성은 그날 이후에 향록과 연락할 일이 있었나 보다.
향록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얼마 전에는 직접 환약을 만들려는 건지 귀한 약재를 융통해 달라고 연락했는데, 재료를 보아하니 맛에 신경 쓰는 것 같긴 했어.”
아마 제천대성이 만든다는 환약은 무지기를 치료하기 위한 약일 거다.
유상희가 치료했다곤 하지만, 무지기는 오랜 기간 쇠사슬에 묶여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의 에너지원으로 쓰이지 않았던가.
무지기가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의술에 능한 제천대성이 돕고 있을 거다.
‘향록과 달리 제천대성은 맛에도 신경 쓰나 보네.’
제천대성과 무지기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은 덕에 마음은 훈훈했지만, 앞으로 열릴 사약 파티를 생각하면 고통스러웠다.
착잡한 기분의 나와 적호를 두고 향록은 척척 영약을 완성해 갔다.
“조금 떨어져 있어.”
파아앗!
향록은 광림을 발동시키기 전, 이능파로 짜인 얇은 천을 불러내 주변을 감쌌다.
늘어놓은 약재와 도구, 향록의 모습이 천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조제 과정을 공개하기 어려운 건가?”
“아니, 어차피 내가 직접 조제 방법을 전수해도 따라 할 수 있는 약제사는 몇 없는걸.”
향록은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말하곤, 천으로 가린 건 미세한 이능파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신화시대를 산 호랑이들과 신수가 눈앞에 있어서 저런 천을 준비했나 보다.
이능파의 천 뒤로, 향록은 상위 존재의 힘을 빌린 광림을 발동해 영약을 완성시켰다.
향록의 영약 제조 과정은 신비롭고 섬세했으나 결과물은 사약 내지 독약 같은 맛의 무언가라는 게 참 공교로웠다.
“……저녁 식사가 아직입니다만.”
“식전에 먹어도 괜찮아.”
적호의 마지막 발악은 무의미하게 끝났다.
나는 빠르게 포기하고 옥으로 된 사발을 받아들였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황명호 대저택의 한옥 별채에서 눈을 떴다.
‘묵고 갈 생각은 없었는데…….’
저녁을 먹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대로 저택에서 숙박하였다.
향록의 영약 조정이 길어져 시간이 늦은 탓도 있지만, 미각의 지옥을 맛보고 기력을 잃은 탓도 있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지옥 속에서 지내야 하나!’
황지호가 건네는 배숙과 향록이 준비한 약차만으로는 과도한 맛없음을 극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향록의 말에 의하면 적호 몫의 영약은 내 것보다 더 맛이 없다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견딘 건지 모르겠다.
과연 전설계 호족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자, 아침 식사를 하지. 영약과 식사, 원하는 것을 먼저 들도록 해라.”
방에 준비되어 있던 새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황지호의 처웃는 소리가 들렸다.
적호는 이미 달관한 듯 무표정으로 영약이 들어 있는 파우치를 집어 들었다.
나도 적호를 본받아 영약을 먼저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아침 영약 시간이 지나갔다.
“이제 곧 주말이니 또 저택에 오지 않겠나? 어차피 향록이 보낸 영약을 받아 가야 할 텐데.”
등굣길에 황지호가 하는 소리를 들으니 주말에 대한 기대감이 곤두박질쳤다.
주말이고 뭐고 영약은 안 먹었으면 좋겠다.
황지호는 아침부터 기분이 몹시 좋은 듯 계속 말을 붙였다.
“오늘부터 등교하는 이가 있더군.”
등교라는 말에 솔깃했다.
설마 우리 반의 등교 거부자 중 누가 등교를 시작하나?
“계이담이 어제 치료를 마쳐서 퇴원했다. 오늘부터 등교를 다시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안 궁금했던 악플러의 등교 소식에 솔깃한 기분이 땅으로 처박혔다.
오늘은 정말 최악의 아침이다.
“하하하하! 이 정도로 싫어하다니. 네가 기뻐할 만한 등교 소식도 있다.”
황지호의 처웃는 모습에 내 기대치는 0으로 떨어졌다.
“도원우가 다시 등교할 예정이다. 오전에는 못 와도 오후에는 등교할 거다. 아, 다른 한 명은 저기에 있군.”
1학년 0반 교실 앞, 유상훈이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