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74화 (472/925)

68. 다시 시작 (4)

토요일, 해가 진 후.

선도부회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선도부회관 지하로 향하는 동안 나와 성시완은 대화를 나눴지만, 계이담은 입을 꾹 다문 상태였다.

나한테 걸리기 전까지는 정체가 들킬까 봐 입을 다물었고, 걸린 후에는 괜히 트집 잡혀서 처맞을까 봐 입을 다무는 것 같았다.

‘저놈이 계속 입을 다무는 바람에 분위기가 엉망이 되면 그건 그것대로 처맞을 이유가 될 텐데.’

하지만 성시완이 뛰어난 화술로 분위기를 이끈 덕에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성시완은 가끔 계이담에게도 말을 걸었는데,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것으로 대답할 수 있는 화제를 던져 그가 소외되어 있지 않도록 배려했다.

어쩌다가 ‘계’새끼 같은 악플러에게 저런 좋은 선배가 붙은 건지 모르겠다.

“아, 도착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이계 금속으로 뒤덮인 방에 도착했다.

성시완이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 앞에 섰다.

“구형과 신형 이계 시뮬레이터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뭔지 알아?”

“디스플레이 말씀하시는 건가요?”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는 LCD를 쓰고 최근에 나온 시뮬레이터는 홀로그램을 사용한다.

구형 신형 모두 이계 금속을 소재로 사용하니 외형상 가장 큰 차이점은 이계 금속이 아닌 부속품일 거다.

성시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홀로그램과 LCD의 차이도 크지.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신형과 구형의 근본적인 차이라는 말에 답이 떠올랐다.

“성능이군요.”

“맞아.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는 SSR급 이계가 지닌 기믹을 구현하지 못해. 그때 우리가 공략했던 탑에선 에너미밖에 나오지 않았잖아.”

이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에 입력된 시뮬레이션 시나리오의 희귀도는 SSR급이다.

그러나 구형의 한계상 SSR급 이계에서 발견되는 시간 왜곡, 공간 압축, 물리 법칙 무시 현상,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미션 등을 구현할 수는 없다.

따라서 구형의 경우, 단순한 이계의 형태와 SSR급에 상당하는 에너미의 위력 정도밖에 재현할 수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저번에 이곳의 구형 시뮬레이터를 가동했을 때, 복잡한 기믹을 수행하지 않고도 수월하게 보스 룸에 도달했던 거다.

대화를 하는 사이,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가 시나리오 로딩을 마쳤다.

“자, 공략을 다시 시작하자!”

성시완이 ‘시뮬레이션 시작’ 버튼을 누르자 시계가 일변했다.

검은 이계 금속이 수십 가지의 색으로 변화하다가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을 뿜었다.

파아앗!

빛이 잠잠해져 눈을 다시 떴을 때, 우리는 시뮬레이터가 구현한 이계 안에 있었다.

SSR---급의 하강형 타워 시뮬레이션.

한층, 한층 밑으로 내려가며 공략하는 이계로 층마다 변하는 환경 속에서 플로어 마스터급 에너미를 상대해야 하는 게 특징이다.

농무(濃霧), 혹한, 늪, 열사(熱砂) 지대 등등 다양한 환경이 존재하는데 보통 플로어 마스터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어 있다.

‘그래서 기믹을 수행해 환경을 역전시키거나 플로어 마스터 에너미를 다른 층으로 유도하는데……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 속에선 그럴 필요가 없겠지.’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라 그런지 환경을 구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고, 공간 왜곡 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나나 성시완은 웬만한 에너미는 환경의 유리, 불리 여부와 상관없이 토벌할 수 있다.

한 번 와 보기도 했으니 금방 보스 룸 앞에 도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조금 달랐다.

“저번과 같은 이계 시나리오를 세팅했는데, 많이 다르네. 의신이가 오자고 한 이유가 있구나.”

같은 희귀도의 이계인데 지난번과 에너미의 숫자도, 위력도 다르다.

지난번에는 성시완에게 급소를 얻어맞자 한 방에 바로 소멸한 에너미가 이번엔 스틸레토로 후속타를 날린 후에야 쓰러졌다.

‘아마 내가 가지고 온 그 아이템 때문인가 본데.’

이계 시뮬레이터는 사전에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무기, 소모 아이템을 스캔해 시뮬레이션 중 사용할 수 있게 한다.

내가 가져온 아이템 카드는 ‘이무기의 귀천’.

나는 지익회관에 오기 전에 아이템창에서 ‘이무기의 귀천’ 카드를 꺼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아마 이계 시뮬레이터는 그 아이템을 감지했을 거다.

“가세하겠습니다.”

근접 공격에 특화된 성시완을 지원하기 위해선 원거리 공격을 하는 게 좋을 거다.

후보로 꼽을 수 있는 무기는 활과 총…… 아니, 총은 저 ‘계’새끼와 겹치니 그만둬야겠다.

저놈이랑 같은 공간에서 같은 무기를 쓴다는 생각만으로 매우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손에 든 건 롯드였다.

〈스킬 ‘만물 사용’이 발동했습니다.〉

〈경고, 에너미가 접근 중입니다.〉

SR급 아이템, ‘염화의 불꽃을 지피는 롯드’가 실체화되기 무섭게 에너미 접근 메시지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지체 없이 몸을 굴리자 ‘카아앙!’ 하고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길게 에너미의 발톱 자국이 새겨졌다.

“하압!”

퍼억!

에너미가 다시 발톱을 빼 들어 나를 노리기 전에 기합 소리와 함께 시원한 타격음이 들렸다.

철로 된 에너미가 이능파로 감싼 주먹에 견디지 못하고 우그러지고, 부서졌다.

단숨에 에너미를 날려 버린 성시완이 웃으며 말했다.

“와, 이담이가 꼼짝도 못 할 만하네. 움직임을 보니까 마법만 잘할 것 같지 않은데. 캐스팅까지 몇 초 필요해?”

지금은 내가 아니라 성시완이 칭찬받을 상황인데.

파티원을 격려하는 데에 이어 내가 든 롯드를 보고 바로 캐스팅 시간을 벌어 주겠다고 하는 게 훌륭했다.

한 박자 늦게 이능총을 꺼내 얼타고 있는 계이담과는 몹시 비교되었다.

성시완과 나, 아주 가끔 계이담이 에너미를 처리하며 공략을 진행한 결과.

저번보다 몇 배의 시간을 소모하여 보스 룸 앞에 도착하였다.

“이번엔 지난번과 달리 기척이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에너미는 아닌 것 같은데…….”

시스템 메시지 상에도 에너미 접근 알림이 뜨지 않는 걸 보니 문 너머에 에너미가 없는 건 확실했다.

문 너머에는 에너미 대신 옛 한국 지부장이 준비한 안배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일단 들어가 보죠.”

“그래.”

성시완이 문 앞에 손을 올리자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우우웅……!

[이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인간뿐.]

문 앞으로 떠오른 문구에 계이담을 봤다.

저놈은 인간 같지도 않은 악플러 ‘계’새끼인데 저 문을 통과할 수 있다니.

혀를 차고 싶은 걸 참으며 빛으로 가득한 문 너머를 주시했다.

빛 속에 사람이 있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빛이 점점 잦아들어 얼굴이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다.

문 안쪽을 응시하던 성시완과 계이담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국언이 형?”

“성국언 국회의원?”

이쪽을 가만히 보는 성인 남성은 성국언과 몹시 닮아 있었다.

굵직한 인상의 얼굴에 양복을 차려입고 있는 게, 포스터와 뉴스를 통해 본 성국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잘 뜯어보면 여기저기 다른 부분이 보였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과 이 장소.

두 가지를 고려해 나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에요, 저건 성국언 선배님이 아닌 다른 사람을 원형으로 한 AI입니다.”

계이담은 여전히 저 인물이 성국언으로 보이는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저 멍청한 놈은 플마고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구분하지 못하나?

하긴 악플이나 달고 진상 짓이나 하고 다녔을 테니 제대로 게임 할 시간이 있었겠나.

내가 계이담을 한심한 얼굴로 바라보는 사이, 성시완은 저기에 있는 AI의 정체를 알아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같아!”

성시완이 그의 할아버지, 옛 한국 지부장을 알아보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 건 겉으로 보이는 나이대 때문인 것 같았다.

AI로 구현된 옛 한국 지부장은 예전에 보스 룸 앞에 떠오른 영상 속 모습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왜 굳이 젊은 모습으로 등장하도록 프로그래밍한 거지?’

옛 한국 지부장의 AI는 성시완의 말을 듣고 보유한 정보를 바탕으로 연산을 한 후, 말했다.

[할아버지라…… 내 손주가 왔나 보군. 내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손주가 없었는데.]

옛 한국 지부장의 씩 웃는 모습이 성국언과 정말 닮아 있었다.

성국언과 나란히 세워 뒀으면 누가 진짜 성국언인지 알아볼 수 없었을 거다.

[여기에 온 걸 환영한다, 후배들아.]

AI는 말을 잇지 못하는 성시완과 달리 감상에 젖지 않고 준비된 대사를 읊었다.

새로운 정보가 주어지면 사전에 입력된 정보를 바탕으로 연산하여 반응하지만, 결국 그뿐인 셈이다.

[이 AI, 내가 실행됐다는 건 너희들이 특정 아이템을 보유하고 보스 룸까지 클리어했다는 뜻이겠지.]

‘특정 아이템’이라는 말에 계이담이 이쪽을 흘끗 봤다.

시선이 기분 나빠 눈을 돌리라는 의미를 담아 노려보니 계이담이 바로 눈을 깔았다.

[경복이의 신뢰를 얻어 손에 얻은 건지, 아니면 경복이의 추적을 뿌리칠 만큼 우수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뛰어난 플레이어라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경복이라 하면, 혹시 홍경복 선생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성시완의 말에 옛 한국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시완은 질문하고 싶은 것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나를 봤다.

대체 홍경복한테 무슨 아이템을 어떻게 받아 온 건지 궁금한가 보다.

성시완은 일단 그 궁금증을 누르고 옛 한국 지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국언이 형은 한반도를 노리는 진족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침략은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지력을 품은 은광고에서 시작될 거라고 했죠.”

[…….]

“할아버지가 은광고 지하에 AI를 준비한 건 그 침략과 관련이 있나요?”

진족과 후예를 배제한 은광고의 비밀 결사.

높은 희귀도의 이계 시뮬레이션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도달할 수 없는 이곳.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얻을 수 없는 ‘이무기의 귀천’을 보유해야 등장하는 AI.

그리고 비밀 결사에 관해 조사를 의뢰한 성국언이 했던 ‘진족의 침략’에 관한 언급.

이들을 종합해 보면 옛 한국 지부장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명확했다.

‘신뢰할 수 있는 강한 플레이어가 이곳에 오는 걸 기다렸던 거야. 진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옛 한국 지부장은 진족과 혼을 묶은 계약서를 작성해 거래에 응했다.

그래서 평범한 방법으로 단서를 남길 수 없었고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진족의 눈을 속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플마고에서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단서를 전달하는 데에 실패했다.

‘지금은 달라.’

이제 옛 한국 지부장이 남긴 단서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옛 한국 지부장의 신중함은 내 상상 이상인 듯했다.

[아직 말할 수 없다. 여기에 도달한 것만으로는 부족해. 이 단서를 손에 넣은 플레이어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여기에 도달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이곳까지 올 수 있는 플레이어도 얼마 없을 텐데 대체 여기에서 무엇을 더 요구할 생각인 건가.

보스 룸 안, 옛 한국 지부장은 보스 에너미로 설정된 AI답게 이쪽을 보며 호전적으로 웃었다.

[지금부터 1대1로 싸우자. 나를 쓰러뜨리면 답을 알려 주겠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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