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75화 (473/925)

68. 다시 시작 (5)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옛 한국 지부장의 말투와 내용이 성국언을 연상하게 만들어서 호감이 갔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대범함과 호탕함은 집안 내력이었구나.

사후를 대비해 이렇게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 것도 그렇고, 옛 한국 지부장은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다.

저분이 계속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장 자리에 있었다면 플레이어의 처우가 더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다.

[보스 룸에 들어왔으면 그만한 각오를 했을 텐데…… 당황한 것 같군. 한 명을 제외하고.]

옛 한국 지부장의 AI는 ‘한 명’이라고 말할 때 내 쪽을 봤다.

그저 성국언의 할아버지가 할 법한 제안이라고 생각하고 납득했을 뿐인데, AI의 눈에는 내 태도가 침착해 보였나 보다.

[무작정 싸우자는 건 아니다. 조건을 몇 개 달아 두고 싶군.]

옛 한국 지부장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1대1 싸움은 보스 룸 안에서 이루어지며, 참관은 허용되지 않는다.

둘째, 패배 시 재도전을 허용하지 않는다.

셋째, 패배한 자는 조언을 금한다. 조언을 들은 자는 즉각 패배 처리한다.

[내 조건은 이상이다. 작전 회의는 허용하겠다. 준비가 되면 이 문을 열고 들어오도록.]

조건은 세 개나 되었지만 전부 대련 과정의 보안을 위한 것들뿐이었다.

대체 옛 한국 지부장은 어떤 능력을 사용하고 있기에 이렇게 보안에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그가 단서를 쥐고 있고, 선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싸움에 응하지 않았을 거다.

‘석연치 않은 조건이 있어도 물러설 수 없어.’

할 말을 마친 옛 한국 지부장은 다시 보스 룸의 문을 닫아 버렸다.

기계음이 완전히 멎은 뒤.

계이담이 갑자기 손을 들었다.

“…….”

“이담아, 네가 가게?”

성시완의 물음에 계이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이담은 제일 먼저 보스 룸에 들어가고 싶나 보다.

저 비열한 좀생이가 웬일로 자진해서 나선 걸까.

‘꼴에 이능을 봉인하는 광림이 있다고 나서는 건가.’

계이담은 협회의 스카우트를 받을 정도로 대(對) 플레이어에 있어서 아주 유효한 이능을 가진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능이 좋아 봤자 뭐 어쩌겠는가.

그 이능을 사용하는 게 ‘계’새끼인 이상 한계가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선 성시완도 같은 의견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담이는 나한테도 지고 의신이한테도 졌잖아.”

쏟아지는 팩트 폭력에 계이담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내가 더 뭐라고 하기 전에 성시완의 다정하면서도 냉정한 말이 계이담을 후벼 팠다.

“할아버지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는 잘 못 들었지만, 엄청 셀걸. AI의 나이가 젊은 걸 보니까 전성기 시절로 설정해 둔 것 같아. 보통 힘으론 못 당해.”

반박할 수 없는 말에 밀린 계이담이 손을 완전히 내렸다.

계이담이 납득한 걸 확인한 성시완이 말했다.

“내가 먼저 나갈게.”

성시완의 실력은 직접 눈으로 봤으니 잘 알지만, 조금 걱정되었다.

옛 한국 지부장이 대체 뭘 준비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차라리 버리는 패인 계이담을 먼저 집어넣고 얼마나 다치는지 보고 상대를 가늠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계이담을 보니, 흠칫하고 몸서리쳤다.

저렇게 쫄보인 주제에 왜 아까 전엔 먼저 가겠다고 나댄 건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얘기를 자주 들어서 어떤 분인지 늘 궁금했어. 싸워 보고 싶어.”

그 말에 성시완도 새삼 성국언과 같은 핏줄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이 집안 사람들은 주먹으로 대화하는 데에 익숙한 걸까.

할아버지와 직접 싸워 보고 싶다는 걸 막을 수도 없어서 결국 먼저 대표로 나선 건 성시완이 되었다.

보스 룸의 문 앞에 선 성시완이 스트레칭을 하고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그러면 다녀올게!”

성시완의 목소리에서 긴장감과 기대감이 느껴졌다.

성시완이 보스 룸의 문 안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문이 닫혔다.

참관을 허용하지 않으니 다른 파티원은 보스 룸 밖에서 기다리라는 뜻인 것 같다.

덜덜덜.

불쾌한 진동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기둥에 기대선 계이담이 다리를 떨며 보스 룸 문을 보고 있었다.

그 보기 흉한 모습에서 초조감이 느껴지는 게 성시완을 걱정하는 티가 났다.

저놈이 처음에 가겠다고 나선 건 혹시 성시완을 걱정해서 그런 걸까?

‘……‘계’새끼가 성시완을 배신하지는 않겠구나.’

군에 있을 때 이놈이 뒤통수를 얼마나 쳤던가.

‘계’새끼는 툭하면 제가 한 실수를 후임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발을 쑥 빼곤 했다.

참 사소한 배신에 도가 튼 놈이었는데, 저렇게 성시완 걱정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놀랍고 신선했다.

계이담은 답답한 건지 계속 다리를 떨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야.”

혼자 궁상이나 떨 것이지 왜 나를 부르는 건가.

계이담은 들으나 마나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데없는 개소리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계’새끼와 말을 섞기 싫었지만, 말하기로 했다.

“닥쳐.”

“…….”

‘계’새끼가 운을 떼기 전에 닥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같은 공간에 둘이 있는 것도 열받는 일인데 목소리까지 듣기는 싫었다.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 계이담이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된 거 연습을 가장해서 팰까?’

이곳은 가상 이계 속 아닌가.

다소 과격한 대련을 해도 문제없을 거다.

아까 생각해 둔 얼차려를 해 보면 어떨까.

고민하며 ‘계’새끼를 노려보는데, 살기라도 느낀 걸까.

계이담이 다리 떠는 걸 멈추고 긴장한 얼굴로 나에게서 몇 걸음 더 떨어졌다.

우우웅……!

체감상 1시간 정도 흘렀을 때, 기계음이 들렸다.

보스 룸이 열리는 소리에 멀찌감치 서 있던 계이담이 문 쪽을 쳐다봤다.

빛 사이로 성시완이 느리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시완이 형!”

성시완의 새파란 안색을 본 계이담이 허둥지둥 그쪽으로 달려갔다.

나도 성시완에게 가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데…… 이능파가 흐트러져 있어.’

성시완의 몸에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니 계이담이 하는 꼴이 거슬렸다.

‘시완이 형’이라니…….

‘계’새끼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성시완한테 뻔뻔하게 형이라고 부르는 꼬락서니가 참 뭣했다.

그렇다고 말을 놨으면 그건 그거대로 같잖았겠지만.

결국 ‘계’새끼가 뭘 하든 꼴 보기 싫었을 거다.

[내 손주치곤 나약하군.]

AI의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손주를 상대하는 거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재능은 있지만 평화로운 시대에서 자라난 탓일까…… 내 성에 차지 않는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플레이어에게 단서를 내줄 순 없다.]

성시완은 할아버지의 꾸중을 들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계이담은 그 말에 울컥한 듯했으나 괴로운 기색이 역력한 성시완을 걱정하는 걸 우선시하기로 한 건지 성시완을 살폈다.

성시완을 가만히 응시하던 옛 한국 지부장이 등을 돌렸다.

[다음 도전자를 기다리겠다.]

우우웅……!

보스 룸의 문이 기계음과 함께 다시 닫혔다.

AI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조금 진정한 성시완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졌어.”

“제가 갔어야 했는데…….”

“……아니야, 내가 가서 다행이야.”

옛 한국 지부장이 제시한 조건 때문에 성시완은 자신이 어떤 일을 겪고, 왜 졌는지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성시완으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내긴 힘들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지? 정말 단순히 대련한 것뿐일까?’

성시완은 겉으로 보기에 다친 곳이 없지만, 실제로 대련 중에 어땠을지는 모른다.

전투의 흔적을 지워 어떤 이능을 사용했는지 감추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AI가 성시완을 퇴장시키기 전에 회복시켰을 것이다.

‘보스 에너미의 자리에 자신의 기억을 본뜬 AI를 넣었는데,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겠지.’

답을 얻기 위해선 저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성시완이 졌으니 남은 건 나와 계이담 둘뿐.

“……양호실로 갈까요?”

“하하하, 그 정도는 아니야.”

계이담은 지금 성시안이 걱정돼 싸울 정신이 없어 보였다.

성시완이 클리어하지 못한 걸 계이담이 해낼 리 만무하니 저놈을 보내 봤자 아무 소용 없을 거다.

성시완이 안정을 찾은 걸 확인한 후 말했다.

“제가 다녀올게요.”

“……의신아.”

성시완이 나를 보며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실수를 하면 나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실격될 테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중요한 단서가 걸려 있잖아요. 여기에서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성시완은 나를 말리는 걸 포기했다.

성시완이 힘없이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조심해.”

*    *    *

조의신이 보스 룸 문 너머로 사라진 후.

성시완은 매우 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진 바람에 후배가 싸우러 간 게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계이담이 성시완을 위로했다.

“시완이 형의 할아버지니까 어쩔 수 없죠. 저쪽이 경험…… 아니, 입력된 정보량이 많을 테니 비슷한 능력을 지녔다면 상대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성시완은 계이담의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위로해 줘서 고마워.”

성시완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노골적으로 말을 돌렸다.

자신도 모르게 방금 치른 전투에 관해 말할까 봐 아예 화제를 바꿔 버린 것 같았다.

계이담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방금 성시완의 반응을 다시 떠올렸다.

성시완은 ‘비슷한 능력’이라는 말에 반응한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저 AI가 사용한 능력은 시완이 형의 이능과 비슷한 구석이 없는 건가?’

플레이어는 성장 환경, 혈통 탓에 보통 가족과 비슷한 이능을 타고난 경우가 많다.

사촌지간인 성국언과 성시완은 둘 다 같은 도장에서 권법을 익혔다.

그래서 그들의 할아버지라는 AI도 성시완처럼 권법을 쓸 줄 알았는데, 계이담의 예상이 틀린 듯했다.

단시간에 성시완이 이 정도로 피폐해지는 능력이라니.

계이담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뭐, 그 독종 새끼라면 어떻게든 하겠지.’

계이담은 jo2god111의 공략 일지를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    *    *

보스 룸 안.

옛 한국 지부장이 나를 맞이했다.

[셋 중 가장 어린 플레이어가 두 번째로 나올 줄은 몰랐군.]

따지고 보면 성시완이 셋 중에서는 가장 어린데, 그걸 밝히기는 곤란했다.

옛 한국 지부장이 인사치레를 하는 사이에 나는 주변을 확인했다.

타워 형태의 이계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환경’이다.

적에게 유리한 환경을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게 타워 공략의 기본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게 없어. 아무것도 없는 실내 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이능파의 밀도도 정상이고, 저 한국 지부장 AI가 성시완을 월등히 뛰어넘을 만큼 강하다는 인상도 들지 않았다.

‘특별한 이능을 보유한 게 틀림없어. 바로 이능파로 방어할 준비를 해야겠네.’

내가 옛 한국 지부장을 관찰하는 사이, 상대도 나를 평가한 것 같았다.

옛 한국 지부장이 나를 훑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종합 능력치도, 이능파의 질도 훌륭하다. 내 손주도 제법이었지. 내 광림 앞에선 단련된 신체도, 우수한 이능도 무용지물이지만.]

앞에서는 그렇게 냉혹한 평가를 내리더니 뒤에서는 이렇게 칭찬할 줄이야.

그런데 그 제법인 손주를 대체 어떻게 제압한 걸까.

단련된 신체, 우수한 이능도 통하지 않는다면 그건…….

‘설마, 옛 한국 지부장의 광림은…….’

이 세계에 온 이후부터 가장 경계하던 타입의 이능이 있었다.

그 이능을 극복하기 위해 대비하긴 했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자, 싸움을 시작하지!]

내가 무언가 짐작해 냈다는 걸 알아챈 걸까, 곧바로 옛 한국 지부장의 AI가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방어해야 해, 아니, 상대의 이능이 발현되기 전에 쓰러뜨리는 게 가장……!’

그러나 내 사고 속도보다 빠르게 옛 한국 지부장의 광림이 주변을 잠식했다.

이미 시야 안에서 옛 한국 지부장은 사라져 있었다.

그 대신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이 확장되고, 색이 피어나고, 뒤틀리고, 뒤집히고, 변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변화하는 건지,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여기는…….’

변화가 멈춘 후, 일변한 주변 풍경을 보다 경악했다.

손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체스대회장……!’

그것도 내가 마지막으로 출전한 체스대회장이었다.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로 승부에 몰두했던 장소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7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