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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79화 (477/925)

68. 다시 시작 (9)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더니 정말 늦어 있었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내 무릎 위에 올무가 앉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앞에는 16세 모습의 은호가, 옆에는 나를 기다린 것으로 추정되는 백호군이 있다.

도망치기에는 너무나도 늦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빨리 기숙사로 돌아갈걸…….’

황지호가 기분 나쁠 정도로 거하게 처웃으며 영약을 준비했다.

약탕기에서 올라오는 영약 냄새에 골이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영약 냄새가 독해서 그런지 올무가 내 무릎 위에서 몇 번 재채기를 했다.

나의 천사를 달래 주며 우울한 기분에 잠겼다.

‘냄새보다 맛이 더 지독할 텐데…….’

……그런데 적호 몫은 없나?

같이 마시는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그나마 나을 것 같은데.

앞에 적호가 있는데 왜 노친네는 내 것만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는 제 아들이 준비해 준 영약을 먹었습니다. 영약을 준비한 타이밍도, 온도도 아주 적당했죠.”

적호를 돌아보니 흐뭇해하는 얼굴로 아들 자랑을 시작했다.

효자라며 대놓고 아들 자랑을 하자 김신록이 쑥스러워했다.

기특한 아들 덕에 적호는 기꺼이 영약을 마신 것 같다.

‘……나도 노친네가 아니라 올무가 끓여 주면 달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올무는 천재니까 영약 정도는 어렵지 않게 달일 것이다.

하지만 영약 냄새 맡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우리 올무를 괴롭히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냥 노친네가 끓여 주는 영약을 참고 먹어야 했다.

“자, 다 됐다. 식기 전에 마시도록. 미지근해지면 더 마시기 힘들 거다.”

“……잘 마실게.”

“하하하하! 은인을 위해 이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잘 마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약 사발을 받아 드니 호랑이들이 다 나를 쳐다봤다.

시선이 따가워서 눈을 질끈 감고 내용물을 삼켰다.

‘맛없어……!’

향록이 구현한 참신한 맛없음이 입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대체 왜 이런 걸 먹어서 미각을 괴롭히는 거냐고 뇌가 격렬하게 항의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 모금씩 넘길 때마다 이능파의 흐름이 안정되었으나 정신은 그렇지 못했다.

견디기 어려운 맛없음에 미각 외의 모든 감각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미각이 둔화되었다면 나았을 텐데, 향록이 무슨 수를 쓴 건지 이 지저분한 맛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저 먼 곳에서 나를 부르는 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신이 형, 상투과자 드실래요? 유자소를 넣어 만들었는데 맛이 괜찮아요. 여기 탄산이 들어간 오렌지 음료도 있어요.”

눈을 깜빡이니 은호가 앞에 있었다.

잠깐 이세계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비어 있는 약 사발을 본 후에야 겨우 안심했다.

은호가 내미는 상투과자를 한입 베어 먹으니 겨우 미각 외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조의신, 너는 지난밤을 매우 바쁘게 보낸 것 같더군.”

황지호는 그 말을 하며 수고한 나를 위해 영약을 달여 준 거라고 했는데, 전혀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말없이 움직인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런 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약 자체가 몸에 좋은 건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저 밤을 새운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네가 이 정도로 깊게 잘 리가 없지. 별일이 없었다면 신수가 눈을 떴을 때 같이 일어났을 거다.”

왕왕!

무릎 위에 있던 천사가 황지호를 향해 불만스럽게 짖었다.

왜 자신을 끌어들이냐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나도 같이 항의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황지호는 감히 올무의 항의를 무시하고 은호에게 말을 걸었다.

“백호와 은호는 조의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는 것 같던데…….”

황지호는 그렇게 말하며 은호를 바라봤다.

백호군이 그 자리에 있던 건 은호의 지시 때문이었나?

“의신이 형이 바쁘셨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겪으신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

은호는 모호하게 답변하고 백호군은 평소처럼 침묵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데, 지금 나오고 있는 화제가 그다지 내키는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길게 추궁할 수 없었다.

호족이 운영하는 은광고에, 진족과 후예를 선별해 배제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밝힐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황지호가 직접 뽑았다는 교장, 황보윤도 그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데 그걸 다 말하기에는 상황이 복잡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어.’

데이터 칩의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옛 한국 지부장이 목숨을 던진 중요한 비밀이 담겨 있을 거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대책을 세우고, 상대와 맞서야 할 텐데 호족의 도움을 받아야 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밝힐 수 있는 부분만 우선 언급하기로 했다.

“출처를 밝히기는 힘들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었어. 아직 확인을 안 한 상태라 보고할 게 없어. 분석을 마치는 대로 말할게.”

신중하게 내 생각을 정리해 말했다.

할 말을 다 했는데 호랑이들은 내 말을 더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가 탄산음료에 이어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다 비울 때까지 호랑이들은 말이 없었다.

호랑이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황지호였다.

“……그게 끝인가?”

……끝은 아니지만 이 이상 아직 말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뭘 더 말하면 좋을까 고민했지만, 밝힐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황지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니 호랑이들이 복잡한 표정을 했다.

은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의신이 형이 저렇게 답변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

“조의신…….”

내가 한 말 중에 실수한 부분이나 부족한 점이 있었나?

되짚어 봐도 ‘아직은 밝힐 수 없는 사항’ 외에는 책잡힐 게 없었다.

황지호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지금 우리가 궁금했던 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움직였냐가 아니다. 네가 어떤 일을 겪은 건지 걱정했다.”

다른 호랑이들의 표정을 보니 황지호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걱정했다는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숨기는 게 있는데, 호랑이들은 나를 걱정하다니.

최대한 빨리 이번 사건을 정리해서 호랑이들에게도 그 내용을 전해야겠다.

진족과 후예를 선별해서 공격하는 건도 전할 수 있으면 전하고…….

‘데이터 칩을 확인하고, 황보윤 교장에게 면담을 청해서 이야기하고, 성시완과도 대화를 하고, ‘계’새끼는 무시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침묵은 점점 무거워졌다.

한숨 소리가 작게 들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의신,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노친네가 한 말이 많은데 그중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또 내 얼굴에서 생각이 드러난 건지 황지호가 한마디 더했다.

“네 의사와 안위 모두 고려한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한 것 말이다.”

진작에 그 말을 집어서 말하면 어디 잘못되나.

황지호가 그 말을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황지호는 내 생일 즈음, 영국까지 반 아이들을 태운 전용기를 끌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네 생각은 짐작하고 있다. 내가 말리거나 같이 갈 거라고 생각해서 입을 다문 거겠지.

―앞으로 이런 계획은 일찍 말하도록. 네 의사와 안위 모두 고려한 방안을 모색하겠다.

그 말을 듣고 알았다고 답하긴 했는데, 이번 건은 내가 영국에 갔을 때와 비교하기 힘들었다.

일단 은광고 안에서 벌어진 일이니 딱히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진족과 후예는 접근 불가능한 장소에 이계 시뮬레이터가 있지 않았던가.

호족의 도움을 빌리기도 곤란한 상황이라 말하는 게 불가능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황지호에게 미리 말할 수가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멀군. 죽림으로 가기 전에 저녁이나 들지.”

“그러죠. 의신이 형은 오늘 한 끼도 안 드셨을 테니 배고프실 거예요.”

다과와 영약을 먹어서 딱히 배고프지는 않았으나 불편한 화제를 벗어날 겸 얌전히 저녁을 먹기로 했다.

황지호가 미리 요리를 해 둔 건지 식사 준비는 금방 끝났다.

서리버섯 구이를 시작으로 가을 제철 한식 요리가 나왔는데, 전부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올무용 식단도 준비되어 있어서 그런지 정말 완벽한 저녁 식사였다.

미리 영약을 먹은 덕에 저녁 식사 후에 영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점도 이 식사 자리를 더욱 멋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다녀오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가겠습니다.”

죽림으로 향할 시간이 되었다.

동행하지 않는 적호와 은호는 별채에서 우리를 배웅했다.

적호는 우리에게 인사를 마친 후에는 김신록에게 아주 긴 작별 인사를 했는데, 아들 걱정을 얼마나 하는지 잘 느껴졌다.

‘적호는 적연으로 모습을 숨기고 따라올 수 있을 텐데…… 그냥 대기할 생각인가 보구나.’

적호는 호족 부부의 마음을 고려해 그냥 이곳에 있을 예정인 것 같았다.

“이쪽이다.”

죽림은 학교 서문 쪽에 있으니 좀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황명호 대저택 주변에 죽림으로 이어지는 샛길이 있었다.

척 보기에는 길이 없는 산길이었으나 황지호가 앞서 걸으니 길이 척척 열렸다.

길 주변에서 이능파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게 일종의 결계가 이 길을 숨기고 있나 보다.

점점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진다고 느꼈을 때, 어느덧 우리는 죽림 한복판에 있었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나무 그늘에서 죽호가 소리 없이 나타나 인사했다.

죽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게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호족 부부를 기다리는 사이, 황지호가 죽호에게 말을 걸었다.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는군. 무슨 일이 있었나?”

“사실, 오늘 제자가 처음으로 제 도움 없이 광림 발현에 성공해서요.”

“김유리가? 축하할 일이군.”

“네! 어찌나 기뻐하던지 저도 덩달아 기뻐져서…….”

죽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나게 제자 이야기를 했다.

호족의 수석 주술사를 감탄시키다니 역시 우리 반 반장,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웠다.

김유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을 하고, 성과를 거둔 이야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들었다.

“안녕하세요…….”

“백호 님도 오셨군요.”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사이, 호족 부부가 등장했다.

호족 부부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음성이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호족 부부는 깍듯하게 인사하는 김신록에게도 화답해 주었다.

조마조마해하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던 죽호가 안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가든에 들어가기 전,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죽호는 호족의 가든 내에서 지켜야 하거나 기억해 둬야 할 점을 몇 가지 언급했다.

첫째, 이능압이 높은 편이니 항상 이능파로 스스로를 보호할 것.

둘째, 가든 안에서는 시공간축 왜곡 때문에 디바이스 통신이 안 된다는 점.

“시공간이 뒤얽혀 있어서 멀리 떨어진 분과 의사소통할 때는 아이템을 쓰거나 높은 레벨의 스킬을 사용해야 해요.”

“그냥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개별 행동을 삼가는 게 좋겠군.”

황지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흘끗 내 쪽을 봤다.

……딱히 이곳에선 따로 행동할 마음이 없는데.

그 외에도 몇 가지 주의할 점을 언급한 죽호가 유독 굵고 길게 자란 대나무 앞에 섰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죽호가 청죽의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이능파를 흩뿌렸다.

그러자 바람 한 점 없는 죽림의 대나뭇잎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아아아…….

이파리가 내는 소리가 죽림을 가득 메운 후, 이공간이 열렸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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