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티끌 (1)
죽림으로 떠난 이들을 배웅한 이후, 은호와 적호는 대청으로 돌아와 차를 마셨다.
은호는 영 진정하지 못하는 적호를 위해 차를 준비했으나 효과는 그리 없었다.
차를 마시는 내내 적호는 죽림 쪽을 돌아보며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김신록을 배웅할 때 긴 작별 인사를 하며 조언과 당부의 말을 계속 늘어놨는데도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드님이 많이 걱정되시나 봐요.”
“제 아들이 호족의 가든에 들어가는 건 처음입니다.”
가든이란 이계를 지배한 주인에 의해 재구성된 이계.
즉, 호족의 가든은 호족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계나 다름없었다.
후예는 근원이 이어진 존재에게 저항할 수 없고, 김신록은 호족의 후예였다.
적호의 눈엔 아들이 맨몸으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가든의 주인인 죽호는 물론, 적호가 신뢰하는 친우인 황호와 백호가 동행하는 걸 알고 있어도 적호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호족의 가든은 불안정해 저번에 서신을 보낼 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공간이 뒤틀려 아들이 고립되면 어찌합니까.”
“그 이야기는 들었어요. 수석 주술사의 제자가 강력한 힘을 발휘해 이를 수습하느라 가든에도 영향이 갔다고 했죠.”
“네, 그러니 이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사전에 죽호와 그 제자의 이능파 안정도를 테스트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은호는 이능파 검사 결과표를 제시하며 적호를 안심시키려 했다.
적호는 이미 몇 번이나 봤던 그 결과표를 다시 샅샅이 훑어보며 은호의 말을 들었다.
“아드님을 배웅하실 때 좋은 조언을 많이 해 주셨잖아요? 설령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적호 님의 말을 떠올려 상황을 극복하겠죠.”
“……잘 생각해 보니 하려고 했던 조언을 몇 가지 빠뜨린 것 같습니다.”
“영리한 아드님이시니 적호 님이 하셨던 조언만으로도 충분할 거예요.”
은호는 그 말을 시작으로 김신록의 칭찬을 이어 갔다.
은호의 입에서 김신록의 활약상과 칭찬을 한참 들은 후에 적호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적호가 차맛을 제대로 음미하는 걸 본 은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차 한 잔을 더 준비했다.
찻물이 끓는 사이, 적호가 물었다.
“……은호,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적호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은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적호를 응시했다.
은호는 방금까지 나누던 화제, 적호의 망설이는 태도 등을 고려해 그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짐작해 냈다.
‘……적호 님은 그 이야기를 하시려는 거구나.’
적호가 먼 옛날 사랑에 빠져 제 자신을 완전히 바꾸고, 긴 세월 죄인으로 지냈다 해도 그 불같은 성정은 여전했다.
황호, 백호와 다르게 적호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니 은호는 언젠가 적호가 그 화제에 관해 꺼내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당신의 후예가 그립지 않습니까?”
적호의 모든 말에 물 흐르듯 받아치던 은호의 말이 처음으로 막혔다.
은호는 적호의 말을 예상했는데도 입술을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저는 형틀에 묶여 있는 내내 아들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보고 싶고, 걱정되고, 궁금했습니다. 제 죄의 무게를 알고도요.”
“…….”
“대체 무슨 연유로 후예의 존재를 숨겼고, 지금도 당신의 손주들을 보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적호가 품은 의문은 아마 다른 이들도 모두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은호가 눈을 떠 준 것만으로도 기뻤고, 그가 후예의 존재를 알고도 찾지 않으니 배려해 준 것일 뿐.
그러나 언제까지나 배려에 기댈 수는 없었다.
계속 후예의 존재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이 저택에 내 후예가 셋이나 있고, 그중 둘은 내년에 은광고에 입학하니 더 숨기기 힘들겠지.’
은호는 식기 시작한 찻물을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은발의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옥토연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기 전, 마지막으로 품에 안아 들었던 온기가 생생했다.
은호는 애틋함과 동시에 분노와 죄책감도 동시에 느꼈다.
은호는 뒤끓는 심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골랐다.
“이 이야기는 황호 님과 백호 형님께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알고 있는 건…… 제 아이를 맡았던 토연 님뿐이겠죠.”
옥토연의 이름이 언급되자 적호가 대놓고 불만스러워했다.
적호는 토족이 계속 은호의 후예를 숨긴 사실에 여전히 뒤끝이 남아 있었다.
지금도 적호는 달토끼떡 상표만 봐도 복장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천기(天機)를 읽었다는 걸 기억하세요?”
“……기억합니다.”
은호는 어느 순간부터 천기에 의지하지 않았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점점 신의 힘이 사라졌기에 적호를 비롯한 호족들은 그 영향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시기도 시기였고, 워낙 수수께끼가 많은 힘이었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저는 호족의 수장의 아이가 이 땅을 수호할 전사가 되리라는 미래를 읽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같은 예지를 받은 인간의 무녀와 그 아이를 가졌어요.”
“……그런!”
갑자기 많은 정보가 밀려 들어와 적호가 당혹스러워했다.
몹시 놀란 적호가 인간의 무녀에 관해 떠올리려고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무녀가 존재했다는 건 기억해도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도통 떠올릴 수 없었다.
당시 적호의 눈에는 웅녀와 친우 외의 다른 존재들은 다 비슷하게 보였고 관심도 없었던 탓이었다.
“……어째서 아이의 존재를 숨긴 겁니까?”
“한반도를 노리는 존재가 있다면, 제 아이부터 죽일 테니까요.”
은호의 명쾌한 대답에 적호가 침음했다.
만약 저러한 예지를 받은 아이가 존재한다면, 먼 옛날 웅족은 호신총을 부수는 것보다 후예의 살해를 우선시했을 것이다.
예지의 존재를 숨긴다고 해도 적진에 천기를 읽는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천기를 읽은 누군가는 호족의 수장이었던 은호, 혹은 현 수장인 황호에게 후예가 생기지 않았나 철저하게 감시했을지도 모른다.
은호의 말이 계속되었다.
“인간의 무녀는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습니다. 혼자 남은 저는 이 아이가 전사로서 성장할 때까지만 그 존재를 숨기려 했죠. 하지만…… 새로 예지를 받고 생각을 바꾸었어요.”
“새로운 예지가 있었습니까?”
“네, 제 형님과 친우들이 제 아이를 지키다 죽게 될 거라는 예지였죠.”
적호가 눈을 부릅떴다.
은호가 친우라고 칭하는 존재는 많지 않았다.
그 예지대로라면 은호의 후예를 지키다가 백호, 황호, 청호 그리고 적호가 죽었을 것이다.
“저는 천기를 거스르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 아이가 죽는 날까지 인지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수장의 아이가 될 수 없었죠.”
그렇게 말하는 은호의 눈에는 한 점의 후회도 없었다.
적호는 은호가 무슨 심정으로 제 혈육을 그렇게 밀어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내 아들이 그런 운명을 타고났고, 내가 그걸 알고 있었다면…….’
그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적호는 눈앞이 컴컴하게 변하는 기분이 들었다.
적호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한 후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까? 달토끼에게 맡기는 대신 호족의 양녀로 들인다거나…….”
“그럴 수 없었어요. 아니, 그래서는 안 됐어요.”
은호는 단호하게 적호의 생각을 부정했다.
적호는 은호의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는 건가?’
은호는 차를 한 잔 비울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찻잔이 빈 후에야 다시 대화가 재개되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토연 님도 모르는 이야기예요. ……토연 님은 그 아이를 키웠으니 어느 정도 눈치채셨을지도 모르지만요.”
“옥토연은 아둔하니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적호가 옥토연을 떠올리며 질린 얼굴로 말했다.
은호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입가에 은은하게 미소를 띠었다.
“적호 님의 아드님은 강하고 총명하게 태어났죠.”
“……?”
뜬금없는 이야기에 적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론 적호는 자신의 아들이 강하고 총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 멍청한 옥토연 이야기를 하다가 그 말을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적호의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제 아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은호의 목소리에서 비통함, 분노, 죄책감이 묻어났다.
“제가 그 아이의 어머니…… 배신자로부터 아이를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네? 그 인간의 무녀는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은호는 인간의 무녀가 아이를 낳던 중 사망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어찌 그 무녀가 아이를 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 애초에 그 아이는 옥토연에게 맡겨져 최근까지 생존해 있지 않았던가.
적호가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해 보려 했으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인간의 무녀는 죽지 않았냐는 적호의 물음에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죠. 천기를 거스르고, 제 아이를 해한 대가로요.”
“……!”
“제 아이는 무력하게 태어났습니다. 기(氣)의 흐름이 완전히 막혔고, 신체도 부자유했죠. 그 아이는 전사가 되는 대신, 다른 무언가를 타고나게 되었어요.”
인간의 무녀가 아이를 해쳤다는 말에 이어 저 말을 듣자 적호는 벼락에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은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인간의 무녀는 뱃속에 있는 아이를 해한 것이 된다.
‘전사가 되는 대신 다른 무언가를 타고났다.’라는 말이 적호의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예지가 내려온 이유는…….”
“제 아이가 전사로서 싸울 힘을 잃었기 때문이겠죠.”
적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은호가 자신의 후예를 철저히 숨겼는지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싸울 수 없는 호족의 후예. 그것도 호족의 영웅들을 휘말려 죽게 할 운명을 타고난 아이가 호족 사이에서 무사할 수 있겠어요?”
은호의 시선이 본채 쪽으로 향했다.
자신의 후예들이 있는 곳이었다.
적호는 처음으로 은호의 눈에서 그리움을 읽었다.
* * *
이공간 안으로 한 발 들여놓자 시야가 급변했다.
호족이 관리하는 가든 안.
이곳은 ‘산’이었다.
방금까지 평지의 대나무 숲에 있었는데, 이공간에 들어서니 깊은 산 속이었다.
‘SSR급 ‘진짜’ 이계에 들어온 건 처음이네. 공기가 달라.’
홍천에서 SSR급 이계 공략에 참가한 적이 있지만, 공격대가 아닌 수비대로서였다.
또, 비밀 통로의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가 구현한 이계가 SSR급이긴 했지만 구형이다 보니 한계가 있었다.
규모도, 이능압도 SR급 이계에서 느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이능압은 입장 즉시 느낄 수 없게 되었지만.
파아앗!
황지호가 이계 입장과 동시에 황금빛 결계를 전개했다.
황지호의 손끝이 그리는 결계가 완성에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점점 가벼워졌다.
“결계를 쳤다. 결계 범위 밖으로 나가지 말도록.”
이능파로 몸을 지키는 것 정도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데.
호랑이가 제 영역에서 수장 기분을 내려나 보다.
황지호 주변에서 뻗어 나온 결계는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중심이 이동할 때마다 같이 움직였다.
죽호는 황지호의 결계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자신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수준의 고차원적인 결계라며 감탄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찬사를 쏟던 죽호는 머쓱해하다가 대나무등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어떤 고문을 할 건지 알려 주겠니?”
“후보군이 다양하던데, 어떤 고문부터 시도할지 궁금하구나.”
호족 부부는 이동 중에 김신록에게 말을 걸었다.
김신록은 열심히 오늘 할 예정인 고문에 관해 설명했다.
“오늘은 죽호 님의 도움을 받아 시간축을 왜곡시켜 고문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아마 고문을 받는 대상은 시간을 100배 정도 느리게 느낄 겁니다.”
김신록은 품에서 엄중하게 봉해진 봉투를 꺼냈다.
봉투를 본 호랑이들의 얼굴에 경계심이 어렸다.
“오늘 사용할 재료는 ‘악몽의 티끌’입니다. 악몽 인섬니움이 현세에 남긴 흔적이죠.”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