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90화 (488/925)

70. 진눈깨비 (4)

겨울이 되니 은광고는 조용했다.

사건이 거듭될수록 은광고는 활기를 잃었는데, 날이 추워지니 더 적막해지는 듯했다.

날씨뿐만이 아니라 은광고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집단인 0반 학생들이 잠잠한 탓도 있었다.

1학년 0반의 경우, 등교하는 학생이 없었다.

2학년 0반의 경우, 제갈재걸의 퇴직 이후로 교지 편집부에 싸움을 거는 걸 제외하면 쥐 죽은 듯 얌전했다.

‘0반 학생들이 떠들썩했던 것도 은광고 괴담의 일종처럼 느껴지는구나.’

3학년 0반의 담임 임연화는 동료 교사와 제자들을 잃어 기운이 없었고, 우기환은 그런 임연화에게 승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수능이 지나 3학년들이 이르게 기말고사를 치렀을 때 우기환이 소란을 일으켰다.

고등학교 마지막 정기 시험,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처음으로 도원우와 우기환이 동점을 맞아 공동 수석을 차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도원우 학생이 힘든 시기를 보내느라 컨디션이 흔들렸나 보군. 차기 학생회장 건으로 잡음이 많으니…….’

학생회장 선거 당시, 교사진은 음주 이력이 있는 곽경구 대신 허채아를 지지했다.

허채아가 은광고 게시판에 음주 인증을 하는 바람에 판도가 뒤집히긴 했지만.

결국 차기 학생회장으로 곽경구가 선정되었으나, 여전히 교사진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학생회를 압박하는 듯했다.

그 결과, 은퇴해야 할 도원우가 아직도 학생회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의외의 사태가 발생했다.

‘우기환 학생이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

단독 1등을 놓친 도원우는 가만히 있는데, 우기환이 그럴 리가 없다며 맹렬하게 항의했다.

재채점 결과 1점 차이로 도원우의 단독 1등이 확정되었고 우기환은 처음 차지한 수석을 날려 먹었다.

대체 우기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저렇게 군 건지 전교생이 이해하지 못했다.

“적호 씨, 안녕. 요새 학교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다인이랑 많이 친해졌나 봐. 다인이와는 만났어?”

“……아직입니다.”

“다인이를 만나러 왔나 보네.”

은광고를 둘러보고 있을 때, 용제건이 말을 걸었다.

용제건은 평소대로 이상한 화법을 쓰며 적호를 건드렸으나 그리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겉보기엔 멀쩡하게 웃고 있지만, 용족의 총아다운 총기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은광고 교내에서는 황호와 맺은 교원 계약 탓에 힘에 제약이 걸려 있긴 하다.

하지만 용제건은 예전에 교내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더 쇠약해져 있었다.

적호는 설마 하는 생각에 물었다.

“아직도 소원을 빌고 계십니까?”

“응, 신록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잖아.”

죽은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용제건이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생각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다니.

애초에 이미 적호의 아들은 윤회의 굴레를 지나 먼 곳으로 떠났을지도 모른다.

적호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용제건을 말리지 않았다.

용제건의 육신과 혼이 닳고 있는데도, 적호의 아들이 행여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오히려 용제건을 부추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용제건은 적호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알려 줄게.”

그렇게 말하는 용제건의 목소리에선 패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호는 도망치듯 용제건 주변에서 멀어졌다.

정처 없이 교내를 떠돌던 중, 적호는 안다인을 목격했다.

안다인은 담임 교사 최편득과 대화, 아니, 일방적으로 훈계를 듣는 중이었다.

“교사 말이 우습게 들려? 성적 좀 좋다고 주변에서 치켜세우니까 보이는 게 없지? 엉!”

“죄송합니다.”

“말대꾸를 따박따박 하는 버릇은 어디에서 배웠어! 크흠, 요즘 애들은 말이야…….”

듣자 하니 안다인은 일방적으로 트집을 잡히고 있었다.

트집 잡힌 내용을 들으니, 최편득은 안다인의 성적을 시기해 시비를 건 학생들의 편을 들고 있는 듯했다.

날이 추운데 안다인은 얇은 교복 재킷 하나만을 입고 있었고, 안다인에게 훈계를 하는 교사는 중무장한 상태였다.

보나 마나 어른 앞에서 외투를 입으면 예의에 어긋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한 듯했다.

저 교사는 안다인에게 가르침이 아니라 고통을 주기 위해 이런 곳에서 훈계를 하는 게 분명했다.

‘내 아들의 자리를 대신한 교사가 이런 쓰레기였다니!’

적호가 최편득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서류상으로 최편득을 살펴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들의 자리를 대신한 자를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적호는 안다인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적호는 적연으로 몸을 숨기고 바람막이를 자처해 최편득의 개소리를 함께 들어 주게 되었다.

‘……어디에서 들어 본 말투 같은데.’

적호는 대상의 ‘말’에서도 정보를 모았다.

말버릇, 목소리의 상태 등을 통해 출신지, 교육 수준, 가지고 있는 정보의 수준, 성격, 건강 상태 등을 판단할 수 있으니까.

1시간가량 이어진 생트집을 듣다가 적호는 교사의 말버릇에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접점이 존재한다고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바로 떠올리지 못했지만, 최편득은 어느 진족과 흡사한 말투를 사용했다.

바로 12지 동맹의 일각, 돈족의 수장 저강렵.

‘이게 우연일까?’

12지 수장의 배신으로 사망한 아들.

아들이 맡을 반과 지익회를 차지한 교사.

석연치 않은 사고로 퇴직한 교무부장의 자리를 차지해 승승장구 중인 교사.

서류상으로 청렴하고 유능했던 것과 달리 저열한 실물.

이런 상황에서 마침 그 교사가 12지의 어느 수장과 같은 말씨를 쓴다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심증뿐이지만, 저 교사를 철저하게 조사해 보면 답이 나오겠지.’

적호는 그날 이후로 최편득에 관해 철저히 조사했다.

호족의 협력을 구할 수 없었기에, 적호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나 적호는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모든 역량을 동원해 최편득을 조사했다.

그리고 적호는 최편득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최편득은 부정부패의 산물, 그 자체였다.

촌지, 부정 입학, 문제 유출, 과잉 체벌, 학교 앞 업소 운영 등등…… 최편득은 교사가 제 직위를 이용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왜 좀 더 이르게 생각하지 못했지!’

적호는 당장이라도 이 모든 것을 폭로해 최편득을 끌어내리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돈족의 수장 저강렵에게는 아들의 기일 당시 알리바이가 있다.

즉, 저강렵이 아닌 12지의 수장이 결계를 해제한 셈인데 적호에게는 단서가 없었다.

지금 최편득을 제거하면 그가 잡은 희미한 실마리가 모두 증발할지도 몰랐다.

‘최편득을 미끼로 돈족과 그 뒤에 엮인 수장까지 한 번에 처리해야 한다.’

최편득의 악행을 방치해야 한다는 사실에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적호는 힘들게 견뎠다.

적호의 인내가 결실을 맺은 걸까, 적호는 마침내 정보를 하나 잡았다.

크리스마스 당일, 은광고에서 돈족의 수장과 다른 배신자가 접선할 예정이라고 한다.

‘성탄절 전야와 당일, 은광고는 외부에 개방된다. 그때를 노린 거겠지. 은광고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은광고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와 당일, 학생 자치기구 주최로 자선 이벤트를 열게 되었다.

올해 은광고 축제는 서거한 은광고인들을 기리는 추모식에 가까웠는데, 성탄절에는 좋은 일도 하고 못다 한 축제 분위기를 즐기자는 의미에서 준비한 이벤트였다.

감히 호족의 신역 한복판에서 만날 생각을 하니 배신자들에게 분노를 느꼈으나, 이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12지의 수장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아들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적호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적호가 성탄절을 대비해 천익산에서 이능파를 가다듬고 수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적호, 거기에 있나?”

“……백호.”

성탄절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을 시점, 적호는 백호와 마주쳤다.

적호는 백호가 은광고를 두고 벌어지는 이상한 사건들에 조금씩 엮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백호는 여러 사건을 계기로 안다인이 마음을 품은 상대인 주수혁과 가까워졌다.

주수혁은 상당히 영민한 플레이어로, 은광고를 노리는 거대한 힘에 관해서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고 백호에게도 이를 밝힌 적이 있었다.

백호는 주수혁에게 조력할 생각인 듯했다.

‘백호와 힘을 합치는 게 좋겠지…… 모든 게 분명해지면.’

적호는 백호에게 제안했다.

“성탄절이 지난 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알았다.”

백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게 거짓말인 것 같았다.

적호가 대죄를 짓기 전에도, 후에도 백호는 저렇게 무심하게 구는 듯하면서도 친우의 뜻을 존중했다.

“은광고를 노리는 적이 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

크리스마스 자선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안다인을 비롯한 학생 임원들은 계속 바빴는데, 그 와중에도 안다인은 적호를 초대했다.

안다인은 적호가 범상치 않은 진족임을 알면서도 친한 지인으로서 대해 주었다.

적호는 그 마음을 무시할 수 없어 적연으로 모습을 감추고 안다인의 곁을 따랐다.

안다인의 안내를 받으며 교내 전시물을 구경하다가 적호가 물었다.

“오늘과 내일 밤에 학급별로 공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담임 교사도 참석합니까?”

“아뇨, 최편득 선생님은 못 오신대요.”

“내일도 안 옵니까?”

“네, 부장급 선생님들은 해외 출장을 가신다고 들었어요. 최편득 선생님이 정식으로 교무부장이 되셔서…….”

안다인의 말을 들은 적호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최편득은 속물에 기회주의자다.

마침 자신의 직장에서 높은 분 둘이 만나는데 자리를 비우다니.

저강렵의 말투까지 전부 카피한 최편득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자리에서 얼굴도장을 찍을 법한데, 해외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다는 게 이상했다.

“어……?”

“왜 그러십니까?”

“교문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정문이랑 동문, 서문…… 모든 문 쪽에서 보고가…….”

디바이스를 들여다보던 안다인이 말을 중단했다.

갑자기 통신이 끊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으으으…….

어디선가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차고 올라왔다.

적호는 그 기운에서 어렴풋하게 진족의 기운을 감지했다.

살기를 느낀 안다인은 순식간에 이능 총을 실체화했다.

적호는 안다인에게 말했다.

“여기는 제게 맡기고 먼저 가십시오. 상대는 진족입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1 대 1은 위험해요. 엄호할게요.”

“괜찮습니다. 제 이능은 혼자 싸우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아군이 곁에 있으면 조절하기 힘듭니다.”

적호의 말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단신으로 웅족의 수뇌부를 궤멸시킨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적호는 안다인이 짐이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안다인의 전투 능력이라면 적호의 적뢰에 휘말릴 리가 없지만, 그녀는 통신이 끊기기 전 마지막 보고를 신경 쓰는 듯했으니 먼저 보내기로 했다.

안다인을 먼저 보낸 적호는 의문의 살기와 대치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들이 움직이는 건 내일이 아니었나……!’

설령 하루 일찍 만났다고 해도 뭔가 이상하다.

적호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들이 하는 건 접선이지 습격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설마…… 허위 정보?’

적호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에 사로잡혔다.

그때, 은광고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 눈은…….”

눈이 온다는 예보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눈은 자연적으로 내리는 게 아닌 듯했다.

적호는 눈송이에서 아주 그리운 옛 친우들을 떠올렸다.

적호는 어느 사이엔가 적연까지 풀고 온몸으로 그 눈을 맞고 있었다.

“풍백과 우사, 운사가 어째서…… 왜 그들이…….”

피부에 눈에 닿으니 확실히 느껴졌다.

지금 이 눈은 풍백, 우사, 운사의 작품인 듯했다.

‘아니, 뭔가 이상하다.’

풍백, 우사와 운사는 적호의 장난질에 복수한답시고 늘 적호의 머리 위에 비바람을 뿌리고 먹구름을 드리우곤 했다.

먼 과거의 일이었지만, 적호는 그들이 부리는 술수에 가장 많이 당해 봤다.

그렇기에 적호는 눈에서 희미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적호는 멈춰 서서 멍하니 눈을 맞았다.

그 순간이 적호의 일생에 있어 최악의 불찰이 되었다.

퍽.

뼈와 살이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쇳덩어리의 날이 복부를 관통해 있었다.

적호가 그 무기의 정체를 간파하기 전에 다음 충격이 이어졌다.

퍽, 퍼억, 퍽.

적호가 재생할 수 없도록 상대는 급소 몇 군데를 더 꿰뚫었다.

적호의 검은 옷이 붉게 물들 때쯤, 적호는 서 있을 수 없어 눈 위로 무너져 내렸다.

적호는 회복 아이템이나 스킬이 통하지 않고, 은광고에는 현재 치유 광림 사용자가 없다.

적호는 이제 죽게 될 것이다.

‘아…….’

허망했다.

아들의 복수를 하지 못한 채 적호는 어리석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신역의 아이들과 남겨진 친우들이 위험한데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죽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는구나.’

상대의 허점을 노리려던 건 적호만이 아니었다.

적호가 적진에 깊숙이 파고든 만큼, 상대도 적호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래서 상대는 가장 적호가 방심했을 때를 노린 것이다.

적호는 어떻게든 움직여 단서를 남기려 했지만, 신체도 정신도 점점 무너졌다.

그는 바닥에 뭔가 새겨 보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쌓이는 눈에 묻혀 버렸다.

뚝, 뚝.

흐릿해진 시야 속 적호의 얼굴이 젖었다.

‘비……? 눈이 아니었나?’

죽음이 가까워진 적호의 혼이 흩어지고 있었다.

적호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진눈깨비인가……?’

진눈깨비가 내리는 하늘 아래, 붉은 드레스를 입은 고운 이가 있었다.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려 했지만 그 전에 적호는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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