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진눈깨비 (5)
날이 바뀌도록 적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리플레이 속에서 무슨 일을 겪는 건지, 적호의 상태는 나빠지다가 나아지기를 반복했다.
처음 적호의 이능파 상태가 불안정해졌을 때 김신록의 부고를 들었으리라 추측했지만, 그 이후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지금 적호가 어느 시점에 있는지 모르겠어. 꽤 시간이 지났으니 일어날 때가 된 것 같긴 한데…….’
적호의 리플레이를 시작하기 전, 적호가 등장한 스토리와 퀘스트를 복습해 오긴 했다.
그래도 적호가 겪었던 모든 사건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스마트폰으로 플레이하는 모바일 게임 안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한정되어 있다.
플마고는 다른 게임에 비해 시나리오 파트와 대사 텍스트 분량이 많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모든 캐릭터의 일거수일투족을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비중이 큰 캐릭터라도 축약되거나 아예 생략된 비화가 많을 게 분명했다.
‘적호는 안다인과 친분이 있어도 NPC인 데다가 평소에는 적연으로 몸을 숨겨서 스토리상 자주 등장하지 못했지.’
내가 알고 있는 적호의 이야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름 없는 조연의 리플레이부터 크리스마스이브까지 1년이 넘는 시간, 플마고 속 적호는 내가 모르는 일을 많이 겪었을 거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모든 이야기를 아는 것도 불가능한데, 적호는 플레이할 수 없는 캐릭터, NPC였다.
플마고 속 적호는 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전설 속에 등장하는 호족으로, 제 얘기를 하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적었다.
비밀이 많은 NPC이니 플레이어가 알 수 있는 건 매우 적었다.
‘프롤로그에서 죽은 감독관이 아들이라는 것도, 적호가 검은 옷을 입는 이유도 몰랐으니까…… 정말 나는 아는 게 없구나.’
내가 모르는 일을 파악하기 위해 적호에게 리플레이를 사용한 거지만, 계속 잠들어 있는 적호를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적호의 곁에서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김신록을 보니 더 그랬다.
김신록은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적호의 바이털 사인이 변화할 때마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눈을 뜨고 기절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적호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쉬고 와도 좋다.”
“……전 괜찮습니다.”
황지호의 말에 김신록이 곧바로 답했다.
김신록은 아버지가 눈을 뜰 때까지 자리를 비울 생각이 없는 듯하다.
억지로 부자를 떼어 놓을 생각은 없는지, 황지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나를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조의신, 네게도 물은 거다. 이틀 연속 밤을 지새우게 되다니. 한창 클 나이에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성장에 지장이 간다.”
저 노친네는 내 진짜 나이를 알면서도 저런 소리를 하는 건가?
그때보다 수면을 덜 취하는 건 맞긴 한데, 잘 챙겨 먹은 덕일까 내 키는 예전 세계 시절과 같은 페이스로 성장하고 있다.
키를 자주 재 본 건 아니지만, 기억하는 것과 비슷하게 교복이 짧아지는 감각이 들었다.
어쨌든 내 현재 신체 나이가 10대인 건 맞다.
그래도 교복을 입은 놈한테 저런 소릴 듣는 건 좀 그랬다.
황지호의 말을 무시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눈앞에서 듣고 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대답은 하기로 했다.
“괜찮아. 영약을 먹어서 그런지 멀쩡해.”
황지호는 방과 후에 기어코 나를 찾아와서 저녁을 먹이고 영약도 먹였다.
그걸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영약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해 버렸다.
“효과가 괜찮은 걸 보니 더 자주 먹여야겠군. 그래도 수면은 제때 취하도록.”
저 노친네도 언젠가 그 지옥의 맛을 봐야 하는데.
거친 생각을 하고 있자니 김신록이 말을 걸었다.
“적호 님은 언제쯤 일어나실 것 같습니까? 꿈에서 적호 님이 보낸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첫 번째 질문은 답하기 곤란했지만, 두 번째 질문의 답은 알고 있었다.
“언제 일어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꿈속에서 1년 정도 지내실 거예요.”
“1년…….”
진족과 후예에게 있어 1년은 극히 짧은 순간일 거다.
특히 5천 년가량을 살아온 호랑이들에게 있어선 빈말로도 긴 시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문제는 기간이 아니라, 그 1년이라는 시간이 지닌 의미가 문제였다.
“네가 없는 세계에서 적호는 1년 더 생존했나 보군.”
황지호가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판단했다.
김신록도 그걸 깨달았는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적호 님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시겠군요…….”
“붉은 형틀은 죽음보다 더 가혹한 고통을 주지만, 적호는 몇천 년을 버텨 냈다. 적호는 이겨 낼 거다.”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며 김신록을 위로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적호가 경험할 것은 아들의 죽음 뒤의 1년이다.
적호 입장에선 차라리 붉은 형틀에 묶여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적호가 눈을 뜰 것 같다.”
그때, 백호군이 적호가 누운 소파 쪽으로 한 발 걸어왔다.
백호군이 움직인 것과 거의 동시에 의료기기에서 ‘삣’ 하고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바이털 사인을 확인하지 않아도 적호의 상태를 알 만큼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새하얗게 질린 적호를 본 김신록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김신록은 적호를 깨우고 싶어 했지만, 차마 몸에 손을 못 대고 안절부절못했다.
“안 되겠습니다. 깨워야겠습니다!”
김신록이 리플레이로부터 일어나던 순간, 적호도 저 말을 했는데.
부자는 정말 닮는 듯했다.
김신록이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사이, 황지호가 적호의 이능파를 살피고 바이털 사인을 체크했다.
“이능파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백호의 말대로 적호가 눈을 뜰 것 같군.”
의료기기로부터 울리는 알람이 멎은 직후, 적호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김신록은 숨을 죽이고 적호가 눈을 뜨는 장면을 지켜봤다.
적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적호를 배려해 조도를 낮춘 실내 안은 그리 밝지 않았는데, 그래도 눈이 따가운 건지 그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
적호는 아직 꿈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건지 눈에 초점이 없었다.
적호가 제일 먼저 바라본 건 그의 머리맡에서 가만히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김신록이었다.
김신록은 감정을 애써 누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적호를 보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적호는 마치 눈물을 닦아 주려는 것처럼 김신록의 왼쪽 눈가로 손을 뻗었다.
그 움직임에 김신록이 평소에 머리카락으로 가리던 짙은 쌍꺼풀의 왼눈이 드러났다.
김신록은 적호의 손길에 당황한 듯했지만, 밀어내는 대신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김신록의 목소리에 적호의 초점이 돌아왔다.
적호는 믿을 수 없는 걸 바라보듯 김신록을 보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들아!”
적호는 김신록을 품에 끌어안았다.
김신록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스러워 보였으나 황지호와 백호군은 둘을 바라보기만 할 뿐 끼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신록은 포옹이 이어진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떨리는 손을 움직여 아버지를 마주 안았다.
적호는 몇 번이나 김신록이 괜찮은 건지, 다치지 않은 건지 반복해 물었다.
“적호 님, 저는 괜찮습니다. 다친 곳 따위는 없습니다.”
김신록은 적호를 안심시켜 주며 말했다.
아버지라고 불러 주면 기뻐할 텐데, 김신록은 끝까지 ‘적호 님’이라고 불렀다.
적호는 조금 진정한 건지 주변이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적호는 여전히 김신록과 얼싸안은 채로 백호군에게 말을 걸었다.
“성탄절이 지나면 뵙기로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아직 성탄절이 지나지 않았다.”
“하하, 그렇군요…… 그렇죠……. 여기는 11월이죠. 제 아들도 살아 있고요.”
적호는 안도와 혼란이 뒤섞인 얼굴로 말했다.
아직 김신록을 놓지 못할 정도로 불안해하는 것도 그렇고, 리플레이의 여파가 상당한 것 같았다.
두 부자의 모습을 흐뭇해하며 바라보던 노친네가 말했다.
“적호, 맥을 짚어 이능파의 흐름을 정확히 살피고 싶은데 잠시 손목을 내주겠나? 아, 자세는 그대로여도 상관없다. 손 하나만 내 다오.”
황지호가 적호 쪽으로 손을 뻗은 순간.
파지직! 파앗!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적호가 순간적으로 방출한 붉은 번개가 황지호가 전개한 황금의 결계에 가로막혀 있었다.
적호가 반사적으로 적뢰를 방출한 듯하다.
“황호, 뭐 하시는 겁니까? 제 아들에게서 떨어지십시오!”
황지호가 태만한 결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적호는 보고 왔다.
웅족의 습격이 있던 날, 황지호는 은광구 내에 없었다.
수많은 분신을 다루는 주제에 신역에 분신 하나 남기지 않았던 거다.
만약 신역의 수호자, 호족의 수장 황지호가 그날 신역에 있었다면 결계가 깨진 순간을 감지하고 대처했을지도 모른다.
“적호 님…….”
“예상은 했다. 신경 쓰지 말도록.”
황지호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넘겼다.
중간에 낀 김신록의 처지만 곤란해 보였다.
이를 해결한 건 백호군이었다.
“적호, 네 아들은 살아 있고 황호는 더 이상 태만하지 않다.”
“그렇죠…… 제 아들은 여기에 있습니다.”
백호군이 한마디 할 때마다 적호가 점점 안정되어 갔다.
적호는 황지호와 백호군을 번갈아 보다가 김신록을 안은 손에 힘을 풀었다.
적호의 손에 힘이 빠져도 김신록은 얌전히 아버지의 품 안에 있었다.
“아들이 너를 걱정하고 있으니, 황호가 네 몸을 살피게 허락해라.”
백호군의 말에 적호가 진정하고 황지호에게 손목을 넘겨줬다.
적호는 순순히 황지호에게 사과했다.
“갑자기 공격해서 죄송합니다, 황호. 꿈속의 일을 현실까지 끌고 오다니,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괜찮다. 어차피 네 적뢰로는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다. 완벽한 기습이었는데도 결국 내 결계에 막히지 않았느냐.”
“……좀 더 강력한 번개를 날릴 걸 그랬군요.”
“하하하하! 억울하면 다음에는 더 노력해 봐라.”
황지호는 정말 적호의 공격을 개의치 않는 듯 역으로 놀려 먹었다.
적호에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황지호는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노친네는 방금 벼락 세례를 맞을 뻔했는데도 친우가 무사한 게 좋은가 보다.
적호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한 번 세게 끌어안고 놓아주었다.
팔을 풀 때, 어쩐지 부자 양쪽 다 아쉬워 보였다.
“……조의신.”
갑자기 적호가 내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저는 당신이 없는 악몽을 보고 왔습니다.”
그 악몽을 보여 준 건 나니까 사과할 타이밍인가?
내가 사과하기 전에 적호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조의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지켰는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의신.”
그 진지한 인사에 뭐라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걸 적호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에요. 저는…….”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당신이 없는 악몽을 보고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악몽의 내용은 당신도 잘 알 겁니다. 그 모든 걸 막기 위해 움직였고, 결국 막아 냈으니까요.”
고개를 든 적호는 단호하게 내 부정을 부정했다.
적호가 경험한 리플레이를 전부 알지 못하지만, 플마고의 스토리가 얼마나 꿈도 희망도 없는지는 잘 알고 있어서 반박할 수 없었다.
“제 아들이 죽고, 은호의 후예들이 죽고…… 그 외에도 수많은 선량한 이들이 세상을 등지거나 사회적으로 추락했습니다. 제가 그걸 전부 보고, 겪고 왔습니다. 고작 1년 사이에 그 많은 일들이 벌어졌으니, 분명 제가 죽은 뒤에는 더 큰 일이 터지겠죠.”
적호의 감사 인사는 계속되었다.
“그러니 제 감사 인사를 받아 주십시오. 조의신, 당신은 우리의 은인입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