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00화 (498/925)

71. 수능 한파 (7)

수능 다음 날, 금요일.

다시 정상 등교가 시작되었으나 은광고 화제의 중심은 여전히 수능이었다.

고등학생과 수능은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긴 했지만, 은광고 학생들에게는 남다른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그중 첫 번째 이유는 정문 시계탑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을 맞이하는 거대 제갈재걸 조각상이었다.

“이거 2학년 0반 놈들이 수능 응원한다고 만든 거 아님? 왜 정문 앞에 있냐.”

“이유는 모르겠는데 일단 기념사진부터 찍자.”

“어, 잘 보니까 고사장 앞에 있던 거랑 옷이 달라. 새로 맞춰 입혔나 봐.”

“다른 의상 있으면 더 보고 싶다.”

“나 아이템 써서 잠깐 높게 점프할게. 선생님 얼굴도 같이 나오게 찍어 줘!”

2학년 0반 선배놈들외에도 제갈재걸에게는 팬이 많았다.

물론 그중에는 나도 있었고, 이 자리에는 없지만 제갈재걸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구질구질한 옛제자도 있었다.

딩동.

새 옷을 입은 제갈재걸 조각상의 사진을 찍고 있을 때, 그 옛제자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홍규빈] 의신아, 소식 들었다. 선생님 조각상이 새 옷을 입으셨다면서?

홍규빈은 조각상에게도 존칭을 쓰는 걸까.

그런데 어떻게 바로 안 거지?

SNS상에서 은광고 태그가 걸린 게시물을 모두 체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홍규빈] 의신아, 선생님 조각상을 모실 건물을 하나 구했어.

누굴 어디로 모신다는 건가.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그 조각상을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는데 홍규빈은 왜 건물부터 산 걸까.

요새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 것 같은데 화풀이로 쇼핑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건 그걸 부탁하기 위해서겠구나.’

홍규빈은 곧 내가 예상한 내용의 부탁을 해 왔다.

[홍규빈] 사진을 바탕으로 여유 있는 크기로 준비했는데, 배치를 하려면 자세한 사이즈를 알아야 해서…….

[홍규빈] 등교 전에 시간이 나면 가서 선생님 조각상의 정확한 치수를 확인해 줄 수 있겠니?

아직 조각상을 확보하지도 못했으면서 배치를 하고 말고 무슨 상관인 건가.

홍규빈이 김칫국을 너무 달게 마시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마침 제갈재걸의 새 옷을 보러 정문에 왔으니 홍규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가끔은 당근을 줘야지.’

제갈재걸의 조각상으로 가까이 접근한 후, 측량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켜 미세한 단위로 조각상의 치수를 쟀다.

결과값을 홍규빈에게 전송하니 감사 인사가 쏟아졌다.

[홍규빈] 의신아, 고맙다! 정확한 치수를 알았으니 가구도 준비하고 옷을 맞출 수 있겠구나ㅎㅎㅎ

가구에 이어 옷까지 구입할 생각인가.

뭐, 홍규빈은 느루의 수석 디자이너, 서돌의 가호를 받은 플레이어니까 그에게 부탁해서 새 옷을 맞출 수 있겠지.

과연 홍규빈이 조각상을 쟁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만약 새 의상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오, 소식이 빠르네!”

마지막으로 사진을 몇 번 더 찍고 등교하려 할 때, 문새론과 마주쳤다.

문새론은 기삿거리를 찾으러 여기에 왔나 보다.

“요새 수상한 부반장님은 바빴던 거 같았으니 이번 기사는 양보함요. 뭐, 내가 아주 조금 늦긴 했지만!”

문새론은 내가 신문부 활동을 대비해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나 보다.

최근에는 등교한 횟수가 적고 학교에 나와도 부 활동에 참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뒤늦게 죄책감이 밀려 들어와 꼭 좋은 기사를 쓰기로 다짐했다.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저 조각상을 자랑하고 싶을 테니 인터뷰에 바로 응해 줄 것 같다.

취재 계획과 기사 초고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 문새론은 현재 은광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화제 중 하나를 꺼냈다.

“님, 도원우기환 수석, 차석 소식 들었음?”

은광고에서 아직도 수능 얘기가 도는 이유는 바로 도원우기환 덕이다.

그 소식은 은광고 게시판을 통해 확인했다.

올해 수능은 한파를 단숨에 불지옥으로 만들 만큼 난이도가 높았다고 한다.

역대급 불수능을 맞이해 등급 컷이 줄줄 내려가는 상황 속에서 당당하게 홀로 가채점 결과 만점을 차지한 인물이 있었다.

그게 바로 은광고가 자랑하는 수석, 도원우였다.

또, 수능에서조차 도원우기환의 법칙이 적용되는 바람에 차석은 우기환이 차지했다고 한다.

단 한 문제 차이로 말이다.

‘역시 수석, 차석은 도원우기환’이라며 다들 놀라워하고 있을 때, 더 놀랄만한 일이 발생했다.

“우기환 선배님이 이번엔 포기하지 않으셨나 봄요.”

수능 직후 공개된 답안을 바탕으로 한 가채점 결과.

우기환은 곧바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이의를 제기하겠다며 난리를 쳤다.

우기환은 수능이 끝난 직후 한숨도 안 자고 논문 수준의 반박 글을 작성해 평가원에 투척했다고 한다.

복수 정답이 인정되면 우기환도 만점을 받게 되어 만점을 차지한 수석이 둘 나오게 된다.

우기환과 같은 답을 고른 전국의 수험생들이 응원하는 가운데, 과연 복수 정답이 인정될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문새론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을수록, 나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역대 수능에서 복수 정답이 인정된 사례는 드물지만 없는 건 아니야. 문제는…….’

플마고에서 내가 알던 것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게임이라는 콘텐츠의 한계상 생략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플마고에서 도원우가 수능 만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우기환이 평가원을 상대로 이의 제기를 신청했다는 언급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은광고에서 벌어진 일들이 은광고 3학년 학생들의 수능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교실로 가면서 이야기하자. 오늘은 어제보다 기온이 더 떨어질 거래.”

“넵! 아, 미로 님 라이브 공연 영상 공유 가능함? 신문부 쪽에서 찍은 거랑 섞어서 편집하고 싶은데…….”

문새론과 독고미로의 수능 응원송 라이브 무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1학년 구역에 가까워졌다.

어제 휴일이라서 그런지 아직 등교한 학생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한산한 복도 앞, 각자의 교실로 들어가기 전 문새론이 조금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수상한 부반장님의 빵셔틀 말인데 요새 너무 강해진 것 같음요. 그레이트 탁의 가르침이 있긴 한데…… 뭔가 더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듦!”

문새론이 그렇게 판단할 정도면 방윤섭이 강해진 건 분명하다.

방윤섭이 목우람의 추격을 뿌리쳤던 건 우연이 아니었나 보다.

‘……최근에 흡연 적발 보고가 들어오지 않는 건, 방윤섭이 개심해서 그런 게 아니라 맹효돈과 주수혁의 눈을 피하는 데에 성공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방윤섭과 최영희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결과, 방윤섭이 충격으로 각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결심과 충격 요법만으로 강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한 번의 결심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은 그 결심을 오랫동안 관철하고 노력한 결과 성과를 거둔 이들이다.

방윤섭이 주수혁이나 맹효돈 같은 은광고의 천재들을 제치기에는 아직 지나치게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중, 갑자기 우리 반 교실 문이 ‘위잉’ 하고 열렸다.

“안 들어오고 뭐 하고 있나.”

문을 열고 나온 건 황지호였다.

1학년 0반 교실은 텅 비어 있었는데, 황지호는 이른 시각 등교하여 계속 혼자 있었던 것 같았다.

웬일로 일찍 온 걸까.

황지호가 변덕을 부려 가끔 일찍 오는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저 태도를 보니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다.

황지호는 문이 닫힌 후, 내 디바이스에 문서 파일을 하나 전송했다.

“적호가 쓴 ‘리플레이’의 보고서다. 이걸 건네주려고 일찍 왔다.”

바로 문서를 열어 보려다 황지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적호가 유능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보고서를 완성했을 줄이야.

적호의 보고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읽으려니 주저하게 되었다.

플마고의 NPC였던 적호는 다른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비해 비중이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적호는 더 큰 고통을 겪었을 거고, 이 보고서에는 그 과정이 담겨 있으리라.

“조의신,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걸 읽도록.”

내가 선뜻 손을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노친네가 말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지호는 정반대의 말을 했다.

“여기에서?”

“그래. 너는 텍스트를 읽는 속도가 매우 빠르지 않나.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너라면 다른 반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 완독할 수 있을 거다,”

디바이스에 표시된 문서의 길이를 확인해 보니 황지호의 말대로 마음먹고 읽는다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혹시 당장 읽고 움직여야 할 만큼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는 걸까.

내 생각을 훤히 읽은 것처럼 황지호가 말했다.

“급한 일이 있다면 보고서를 읽게 하는 대신 내가 바로 설명해 줬을 거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러면 왜?”

내가 되묻는 사이 황지호가 보온병을 꺼냈다.

영약을 내민 게 아닌가 해서 경계했는데, 보온병 뚜껑이 열리자 향긋한 차향이 흘러나왔다.

향록이 영약을 저리 상쾌한 향으로 만들 리가 없으니, 저건 그냥 차인 것 같았다.

황지호가 차를 한 잔 내밀며 말했다.

“너는 지금이 됐든, 나중이 됐든 반드시 이 보고서를 읽겠지.”

그거야 그렇다.

적호가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면서 얻어 낸 정보인데 이를 저버린다는 발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나는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적호의 보고서를 읽고 이를 바탕으로 다음 수를 둘 생각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있는 자리에서 읽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바로 손이 가지 않긴 했지만, 언젠가 읽어야 한다는 건 황지호의 말대로였기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서 읽기로 했다.

나는 가끔 황지호가 준비한 차를 마시기도 하면서 적호의 보고서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적호는 사무적인 문체로 자신이 겪은 일들과 만난 이들, 추측, 감상을 정리했다.

딱딱한 보고서 너머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전해졌다.

적호는 보고서 옆에 메모를 덧붙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두기도 했는데, 내용 대부분이 후회와 자책이었다.

적호는 마지막에 눈이 내리는지, 비가 내리는지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무너진 상태였음을 시인하며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다 읽었나 보군.”

마지막 문장을 읽자마자 황지호가 말을 걸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적호가 지나치게 문서를 잘 작성한 덕일까, 플마고 세계에 들어가 있다가 빠져나온 기분이 들었다.

혼자 있었다면 계속 플마고 생각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황지호는 차 한 잔을 더 따라 준 후,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보고서에 신경 쓰이는 말이 있었다.”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건 적호가 안다인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내용이었다.

적호는 플마고 속 안다인의 존재에 매우 주목한 듯했다.

‘적호와 안다인은 상당히 빨리 친해지고, 서로를 신뢰하게 됐지.’

플마고 속에선 밝혀지지 않았지만, 안다인이 김신록의 제자가 될 예정이었다는 게 그 이유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고서를 읽고 나니 그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호는 1학년 1반 소속의 모든 아이들을 그 정도로 신뢰하고 도운 건 아니었다.

안다인의 재능과 성품이 특출난 탓이었을까?

적호는 안다인과의 대화 내용을 보고서에 온전히 담을 만큼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능을 각성할 때쯤에 예언 이능을 가진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아니, 어쩌면 단순한 사기꾼일지도 모르지만요.

―주변이 어두워지면 새벽 별을 따라가라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천익산에서 안다인은 ‘예언’에 관해 언급했다.

나도 조금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었는데, 황지호도 저 대화가 신경 쓰였나 보다.

‘플마고에 이런 내용은 나오지 않았어.’

안다인은 예언의 내용이 사기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안다인이 사기꾼의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마음에 새길 것 같진 않았다.

“새벽 별이라…… 현무가 너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는군.”

여름방학 때 신문부 취재 여행으로 해외에 나갔을 때.

지혜와 예지의 사방신, 현무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네 이름이 몹시 마음에 든다.

―옳을 의(義)에 새벽 신(晨). 네가 가진 그 힘에 걸맞은 이름이 아니더냐.

―이 아이의 재능이 새벽을 부를 네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구나.

그 말을 들을 때 황지호도 옆에 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 그 세계에는 네가 없었지.”

황지호가 반투명한 홀로그램에 새겨진 ‘새벽 별’이라는 글자 너머로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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