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늦가을 소풍 (1)
안다인이 예언으로 들었다는 ‘새벽 별’.
내가 새벽을 부를 것이라는 현무의 말.
이 둘을 나란히 늘어놓으면 마치 그 새벽 별이 나를 칭하는 것 같기도 하다.
‘황지호는 그 새벽 별이 나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싸한 이야기였지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플마고를 플레이하던 유저가 그 말을 바로 믿는 게 이상했다.
안다인이 예언 이능을 가진 분을 만났다는 시기는 이능을 각성할 때쯤이라고 했다.
설정상 안다인이 이능을 발현한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그 시점에 내 존재가 예언에 언급되는 건 이상한 일이다.
“나는 네 정체와 예의 그 ‘게임’에 관해서 계속 고찰했다.”
황지호는 아직도 내 정체를 캐는 중인가 보다.
은호의 등장으로 게임 플마고와 나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았을 텐데.
황지호는 여기에서 더 무엇을 캐려고 했던 걸까.
“내 가설은 이러하다. 그 게임, ‘플마고’는 이 세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자 이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다.”
플마고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라는 건 그럴싸한 의견이었다.
장르상 플마고는 RPG지만, 캐릭터를 육성하고 스토리상 선택지가 존재한다.
또 ‘리플레이’ 기능을 사용하면 여러 차례 재도전을 하며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으니,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와 은호 그리고 계이담이 플마고를 계기로 이 세계에 넘어온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플마고는 일종의 통로로 볼 수도 있다.
“그 게임은 새벽 별이 없는 이 세계의 미래를 시뮬레이션한 것일지도 모른다.”
황지호의 가설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다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황지호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그 점을 지적하기 위함인 듯했다.
“내 가설과 안다인이 들었던 예언이 진실이라면, 그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누군가가 올 것이라는 걸 예언한 자가 있다는 뜻이 된다.”
이 세계에서 예언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늘의 기운을 읽거나, 별의 움직임을 통해서, 꿈을 바탕으로 등등.
예언할 수 있는 자는 열 손가락 내로 꼽힐 만큼 적었고, 플마고 속에서 예언을 하는 자가 직접 등장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플마고 속에 등장한 예언 스킬 능력자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구슬비의 스승, 몽마의 후예 멀린이었다.
멀린은 구슬비가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구슬비도 이를 짐작하고 있었다.
멀린의 예언은 전부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멀린이 새벽 별을 언급한 적은 없었지. 다른 예언가들도 그랬어.’
멀린보다 등장 장면이 훨씬 적었지만, 지혜와 예지의 사방신인 현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새벽 별에 관해 말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안다인에게 예언을 한 자는 대체 누구일까.
‘황지호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멀린과 현무를 뛰어넘는 수준의 강력한 예언가가 안다인에게 예언을 한 셈이 돼.’
그렇다면 예언가는 안다인에게 미래에 관해 얼마나 말한 걸까?
안다인의 플마고 속 행적을 고려하면 딱히 미래를 알고 움직인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안다인이 미래를 잘 알고 있었다면 솜뭉치와 절친 김유리의 죽음을 절대 방관하지 않았을 거다.
‘예언을 전한다면 안다인에게 닥친 직접적인 위협에 관해 전하는 게 좋았을 텐데.’
안다인과 접점이 있던 예언가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설령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지니고 있다 해도 그걸 공유해 줄지도 의문이다.
그렇게 파악했는데도 예언가의 존재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안다인에게 예언가에 관해 물어볼까?’
안다인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예언가에 관해 떠봐야겠다.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눈앞에 차가 담긴 보온 컵이 놓였다.
“정보가 적다 보니 가설뿐이군. 반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에 차나 한 잔 더 마실까.”
신경 쓰이는 일이 많지만 황지호의 말대로 일단 차나 마시기로 했다.
차를 반쯤 마셨을 때쯤, 기숙사생들을 시작으로 반 아이들이 차례로 등교했다.
“어, 의신이랑 지호 일찍 왔네.”
“역시 의신이는 성실하네요.”
“오다가 MITRON에 들렀는데…… 차랑 같이 먹자.”
차를 마시며 아이들을 기다린 결과.
조례 시작 30분 전에 전원 등교를 마쳤다.
괴도 네온과 구슬비, 관종 두 명만 빼고.
“걔들은 안 왔네…… 아쉽다.”
“소풍 날에는 올 것 같습니다. 두 분은 관심을 받고 싶어 하시니까요.”
비록 전원 모이진 않았지만, 소풍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으니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반 티 문구 정하기’.
티셔츠는 이미 완성되었으나 아직 어떤 문구를 프린트할지는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제비뽑기를 통해 정하긴 할 건데, 함근형 선생님, 용제건 선생님 몫까지 만들 거라 한 사람이 여러 개 문구를 적어야 할 수도 있어.”
김유리가 반 티 문구 결정 과정에 관해 간략히 설명한 후, 랜덤 제비뽑기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본격적으로 제비뽑기를 시작하기 전에 목우람이 물었다.
“문구에 관해 계속 생각해 봤습니다만, 대체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음…… 그냥 반 아이들의 인상이나 하고 싶은 말을 적으면 돼.”
“봄 소풍 때 사용한 문구를 보여 줄게!”
전자 칠판에 봄 소풍 때 찍은 단체 사진이 투영되었다.
단체로 맞춰 입은 반 티셔츠에 궁서체로 문구가 적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정시 등교’.
‘짱돌 맹효돈 선생’.
‘수상한 부반장 조의신’.
‘바이올리니스트 이레나’.
‘능력자 반장 김유리, 언제나 고마워!’.
‘하니 Honey 한이’.
‘그만 처웃어 황지호’.
‘비행 스킬 이펙트가 신경 쓰임’.
그만 처웃으라는 말처럼 참 잘 어울리는 문구가 몇 개 눈에 띄었다.
“흠, 평소 하고 싶은 말을 솔직히 적으면 되는 거군요!”
“그거면 별로 안 어렵네.”
목우람과 송대석이 문장형으로 된 문구를 주의 깊게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좀 아니다 싶긴 했지만, 일단 제비뽑기부터 하기로 했다.
“다음은 의신이 차례야!”
문구를 발표하기 전까지 누가 누구를 뽑았는지는 비공개로 했기에 현재 누가 남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내용물을 본 순간, 설렘이 사라졌다.
[황지호]
왜 하필 노친네가 걸린 건가.
선량하고 성실한 반 아이들 사이에서 황지호를 뽑다니…….
반 아이들에게 어떤 칭찬의 말을 쓸까 실컷 고민했는데 다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냥 그만 처웃으라고 쓸까? 아니, 그건 좀 식상한데.’
성의 없이 ‘하하하하!’라고 쓸지, 내 마음속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인 ‘노친네’를 쓸지 고민했다.
긴 고민 끝에 황지호 하면 생각나는 것을 쓰고 디바이스로 문구를 제출했다.
제출하고 나니 맹효돈과 송대석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왜 난 두 개나 걸렸냐.”
“나돈데.”
함근형 선생님과 용제건이 없으니 둘의 몫까지 정해야 했기에 누군가는 두 개 이상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두 사람이 두 개씩 써서 냈다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센스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저 둘은 지나치게 직설적인 경향이 있어 걱정되었다.
“자, 그럼 선생님들 몫부터 공개할게!”
[한이 → 함근형 선생님: 전원 출석까지 3명]
함근형 선생님의 문구에 모두가 납득했다.
비록 관종 1, 2를 출석한 사람 수에 포함시킨 건 조금 미묘하긴 했지만, 3명만 더 등교하면 전원 출석이라는 말에 함근형 선생님이 기뻐할 것 같았다.
다음은 용제건 차례였다.
[독고미로 → 용제건 선생님: 황홀]
“용제건 선생님이 웃을 때마다 밑에 자막이 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 맞아요! 저도 동감해요!”
“그럼 용제건 선생님 문구는 방송용 자막처럼 찍어서 내자.”
그 뒤로는 가나다순으로 문구를 발표하게 되었다.
첫 타자는 김유리였는데, 문구 작성자가 송대석이었다.
[송대석 → 김유리: 물벼락 소환자]
“대석아…….”
“하하하! 그때 물벼락이 좀 세긴 했지.”
민그린이 송대석을 불만스럽게 보긴 했지만, 김유리가 웃으며 넘어갔다.
송대석이 더 센 말을 쓸까 봐 걱정했는데 저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
다음 차례는 독고미로였다.
[맹효돈 → 독고미로: 한 손으로 팬다]
“한 손으로 모닝스타 휘두를 때 밸런스가 좋아 보였다.”
아이돌과 관련된 문구가 나올 줄 알았으나 맹효돈은 저번 대련을 감명 깊게 본 모양이었다.
반 아이들은 독고미로의 반응을 걱정했으나 은광구의 패왕께서는 저 문구를 괜찮다고 생각한 듯하다.
“나쁘지 않네. 여럿을 상대할 때에는 한 손으로 패야 손이 남아서 움직이기 편해.”
“네?”
독고미로의 말을 들은 사월세음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다음 문구가 발표되는 바람에 유야무야 넘어갔다.
[이레나 → 맹효돈: 도인의 제자]
“효돈이 하면 탁거산 선생님이 생각나서…….”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맹효돈은 심란한 표정으로 문구를 바라봤다.
저번엔 짱돌 맹효돈 선생이었는데 이번엔 제자라니.
선생에서 제자가 되긴 했지만, 짱돌이 사람이 된 셈이니 미묘했다.
진화한 건지 퇴보한 건지 모르겠다.
다음은 목우람 차례였다.
[황지호 → 목우람: 나선형 벽 타기 달인]
“엇, 설마 제가 벽 타는 장면을 보신 겁니까?”
“하하하하!”
황지호 저 노친네는 왜 저런 문구를 적은 걸까.
반 아이들은 나선형 벽 타기라는 말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우람아, 너 벽 타고 다녀?”
“네, 만약을 대비해 가끔 연습합니다.”
목우람은 그때 한 번만 나선형으로 벽을 탄 게 아닌가 보다.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한 뒤에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다음은 민그린이었는데, 문구를 쓴 게 목우람이었다.
[목우람 → 민그린: 송대석-25cm]
“두 분이 나란히 서 계실 때, 늘 생각하던 걸 적었습니다.”
“어? 25cm나 차이 나? 키 차이가 더 벌어졌네.”
아주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목우람이 쓴 것치곤 정상이 아닐까.
송대석은 민그린이 입을 티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게 마음에 든 건지 타박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은 사월세음이었다.
[민그린 → 사월세음: 닭?]
“네? 닭이라니요!”
“AR글래스의 마커도 닭이었고, 가끔 비행 스킬을 쓸 때 닭이 생각나서…….”
“많고 많은 새 중에서 닭이라니……!”
사월세음은 비행과 관련해서 계족의 가호를 받았는데, 민그린의 예민한 감성이 이를 캐치한 모양이다.
문구 자체는 좀 그랬지만 민그린의 감각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다음은 송대석이었다.
[맹효돈 → 송대석: 송눈새]
“눈새가 뭐냐?”
“눈치 없는 새끼.”
“야!”
솔직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요즘 민그린이 쓸쓸해하는 걸 볼 때마다 나도 한마디 하고 싶어졌으니까.
좀 심했나 싶었는데 민그린도 저 문구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대석이랑 맞는 말이네.”
“…….”
결국 송대석은 송눈새가 되었다.
다음은 권레나의 차례였다.
[사월세음 → 이레나: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
“권제인 선배님의 이명이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잖아요. 레나의 이능파 색은 백금색이니까 언젠가 저런 이명이 붙었으면 해서…….”
“정말 마음에 들어! 고마워!”
오늘 들어 가장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갔다.
다음은 내 차례가 되었다.
내 문구를 붙여 준 건 우리 반의 능력자 반장이었다.
[김유리 → 조의신: 앞으로도 수상해 줘>▽<]
수상하란 말은 다소 미묘했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붙여 준 문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앞으로도 수상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이제 남은 건 한이랑 황지호인데…….’
송대석이 두 번 뽑았다고 했는데, 아직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한이의 문구를 쓴 건 송대석일 거다.
한이가 살짝 기대한 눈으로 전자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대석 → 한이: 당뇨병 주의]
“하하하하하!”
“대석아!”
“아, 이래서 눈새라는 거군요.”
황지호의 처웃는 소리와 민그린의 타박으로 교실 분위기가 개판이 되었다.
한이는 충격받은 눈으로 ‘당뇨’라는 글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송대석은 수습한답시고 말을 했지만 영 좋지 않았다.
“요새 청년 당뇨가 늘어 가는 추세라…….”
“아, 다음 거 발표할게!”
김유리가 상황을 정리할 겸, 급히 디바이스를 조작해 황지호의 문구를 발표했다.
……내가 쓴 문구가 딱히 분위기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
하지만 그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전자 칠판에는 내가 쓴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조의신 → 황지호: ㅡ.ㅡ]
전자 칠판에는 황지호가 단 한 번 사용했던 이모티콘이 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