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늦가을 소풍 (3)
토요일, 소풍 당일.
우려한 대로 수능 이후라서 그런지 기온이 낮은 편이긴 하지만 날씨가 나쁘진 않았다.
주말에도 빠짐없이 날씨에 관해 메시지를 보내는 착한 제자, 훌륭한 선배 염준열의 디바이스 메시지에 의하면 오늘은 하루 종일 맑을 예정이라고 한다.
도시락을 담당한 아이들이 보온 도시락통을 사야겠다며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었다.
딩동.
염준열에게 답신을 하고 나설 준비를 할 때, 디바이스에 예상치 못한 인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보낸 건 까마귀 마왕의 계약자, MITRON의 파티셰 류장이었다.
[류장] 안녕하세요, 조의신 학생.
[류장] 가을 소풍 소식 들었어요. 1학년 0반 학생들이 많이 들떠 있는 것 같아요.
아침 일찍 MITRON에 들른 우리 반 아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간식을 담당하겠다고 자청한 아이들이 몇 명 있었는데, 류장과 마주쳐서 이야기를 흘린 듯하다.
정확히 말하면 주말에 단체로 온 아이들이 신경 쓰였던 류장이 캐 본 거겠지만.
[류장] 제가 모시는 분께서 잘 다녀오시라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류장] 즐거운 소풍 되시길 바랍니다.
저 말을 들으니 왜 소풍을 목전에 두고 류장이 연락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침묵과 방관의 까마귀 마왕, 시델렌티움은 첫 실습 당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개입하면서 의도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 ‘세 기사의 맹세’를 물러나게 한 데에 일조하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세 기사의 맹세’로부터 목우람을 보호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전후 결과가 그렇게 됐다.
시델렌티움은 류장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게 함으로써 이번에는 개입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셈이다.
‘이번에 시델렌티움은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이구나.’
시델렌티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일이 수월해지겠지만, 처음부터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상정했으니까 괜찮았다.
나는 담담하게 류장에게 답 메시지를 작성했다.
[나]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류장과 메시지 교환을 마치고 기숙사를 나설 때, 별로 반갑지 않은 인물과 마주했다.
일단 지익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으니, 거주 구역을 어슬렁거려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었지만 상당히 불쾌해졌다.
체육복을 입은 계이담이 뚱한 얼굴로 1학년 건물 주변에 서 있었다.
“어…….”
계이담과 눈이 마주쳤다.
설마 저 ‘계’새끼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가!
중요한 반 행사를 앞두고 기분을 잡치기는 싫은데.
불길한 예감이 맞은 건지 계이담이 머뭇거리다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냥 지나칠까? 아니면 꺼지라고 면전에 대놓고 말하는 게 나은가?’
하지만 은광고에는 주말에도 일찍 돌아다니는 성실한 기숙사생이 많았기에 쉽지 않았다.
마침 누군가가 접근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 인물은 계이담을 발견하지 못한 건지, 내 쪽으로 바로 걸어와 말을 걸려 했다.
평소 같았으면 매우 반갑게 인사를 했을 텐데 ‘계’새끼 때문에 타이밍이 꼬이고 말았다.
“수능이 끝났으니까 슬슬…….”
“의신아, 안녕.”
계이담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 인물이 내게 인사했다.
그 인물은 바로 플마고의 타이틀 히로인 안다인.
긴 머리를 단단하게 묶어 고정시키고, 체육복을 입은 차림새를 보니 안다인은 오늘도 천익산에서 아침 훈련을 하다 온 것 같았다.
타고난 재능만 따져도 천재인데, 노력까지 하니 과연 완벽하기에 그지없는 주인공의 모습 그 자체였다.
안다인과 인사를 나누니 계이담을 만나 바닥을 친 기분이 순식간에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안다인의 특이 체질을 잘 눈치채지 못하는 건 이렇게 마주 보고 이야기만 해도 기분이 밝아져서 그런 게 아닐까?
독기라도 뒤집어쓰지 않는 한 안다인의 인물 자체가 주변을 밝게 만드는 건지, 주변을 정화하는 특이 체질이 있는 탓인지 구분이 잘 안 갈 거다.
“저기, 상담할 일이 있는데…… 아, 계이담 선배님하고 이야기 중이었어?”
“아니.”
“……그래?”
안다인의 물음에 딱 잘라 답했다.
실제로 계이담이 일방적으로 말을 걸었을 뿐이고 아직 나는 답하지 않았으니 그놈과 나는 이야기하는 중이 아니다.
안다인은 계이담을 보고선 인사했다.
학생회 임원이다 보니 얼굴은 아는 사이였나 보다.
안다인은 저런 쓰레기도 선배라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계이담 선배님, 안녕하세요.”
“…….”
계이담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답인사했다.
저놈이 안다인을 앞에 둬서 본래의 저열한 심성과 천박한 성품을 감추고, 예의 그 과묵한 지익회장 캐릭터 흉내를 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다인 앞에서 팬심을 완전히 숨기는 건 불가능한 건지, 동복 체육복 옷깃 사이로 목이 벌게진 게 보였다.
안다인은 계이담에게 그리 관심이 없는 탓에 전혀, 조금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지만.
“의신아, 저번에 보내 준 올무 사진 잘 봤어. 수능 전후로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올무가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하고 있었거든. 건강한 것 같아서 안심했어.”
안다인에게는 지금도 가끔 올무 사진을 공유하곤 한다.
안다인은 올무의 천재성과 소중함, 완벽함 등을 온전히 이해해 주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보낼 수 있었다.
최근에 안다인에게 보낸 올무 사진은 털실로 만든 작은 신발을 신고 산책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올무는 칼바람 속에서도 건강하게 뛰어다녔는데, 예전에 사 준 털실 신발이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곧 겨울이 되니까 올무가 입을 만한 목도리나 모자를 보내고 싶은데…… 괜찮을까?”
“올무는 착하고 똑똑해서 옷을 잘 입으니까 괜찮아. 직접 만나서 전해 주면 더 기뻐할 것 같은데.”
“정말? 올무랑 직접 만나도 될까?”
안다인은 겨울이 되기 전 올무가 입을 옷가지나 소품을 전해 주고 싶나 보다.
직접 만나서 선물을 전하는 게 어떻냐는 말에 안다인이 몹시 밝은 얼굴을 했다.
계이담은 이 모든 과정을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눈치 없게 옆에 서 있지 말고 꺼졌으면 좋겠는데, 저놈은 제대로 움직이질 못했다.
“아, 그리고 의신이네 반 부담임 선생님에 관해서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기쁘게 올무 얘기를 주고받던 안다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우리 반의 부담임 하면 유희용 용제건인데, 드디어 올 게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1학년 1반이 최근 용제건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용제건은 요새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건지 1반 담임 김신록을 놀려 먹는 빈도가 늘어 가고 있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김신록의 팬들 속이 터져 나가고 있다 한다.
아직 졸업하지 않은 선배 중, 김신록이 담임한 반이었던 학생들도 1반을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
1학년 1반을 중심으로 김신록의 제자들이 뭉쳐서 용제건에 대항할지도 모른다.
“용제건 선생님 말하는 거지?”
안다인이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선전포고를 할지도 모르는데, 일단 용제건이 0반의 부담임이기 때문에 0반 학생인 나에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역시 안다인의 배려심은 남달랐다.
‘용제건은 김신록의 제자들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하면 좋아서 날아다닐 거 같은데.’
괜히 내가 중간에 쓸데없는 중재를 하면, 용제건의 즐거움과 유희를 빼앗는 꼴이 될 거다.
용제건과 안다인, 둘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저 방관하는 게 좋을 거다.
둘 다 크게 다치는 일이 없게 지켜보기는 할 거지만.
안다인에게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용제건을 상대하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부반장, 일찍 나왔네.”
“의신아, 안녕하세요! 저희 준비 다 됐어요. 우람이가 쓸데없는 물건을 사러 가는 걸 막느라 조금 늦었지만요.”
1학년 건물 쪽에서 우리 반 아이들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을 본 안다인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사과했다.
“아, 오늘 0반 아이들은 소풍 간다고 했지. 유리한테 미리 들었는데, 깜빡했네. 붙잡아 둬서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안다인이 사과할 일은 조금도 없었다.
미안해야 하는 건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으려 시도한 계이담뿐이다.
계이담은 뻔뻔하게도 우리 반 아이들로부터 인사를 받고선 사라졌다.
계이담과 안다인과 헤어져 반 아이들과 모이기로 한 학교 정문으로 향하던 중, 목우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번에 대련한 이후로 두 분의 관계가 어떻게 된 건지 신경 쓰였습니다만, 대화를 하신 걸 보니 수습이 되었나 보군요.”
“대화 안 했는데.”
“그래도 이번엔 의신이가 계이담 선배님께 대련 신청을 하진 않았잖아. 또 문제가 생기면 대련을 하지 않을까?”
권레나가 맞기도, 틀리기도 한 말을 했다.
계이담이 말을 더 길게 걸었다면 나도 모르게 대련 신청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와 ‘계’새끼 사이의 일에 선량한 우리 반 아이들을 말려들게 할 수 없어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반 아이들은 소풍을 기대했는지, 전원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함근형 선생님과 용제건은 약속 시간 10분 전쯤에 도착했는데도 가장 늦게 도착한 셈이 되었다.
“용제건 선생님, 혹시 붉은 사자 팀 빌딩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반 티 입으신 거예요?”
“응. 글씨체가 마음에 들어.”
용제건이 환히 웃었다.
이번 단체 반 티셔츠는 기모가 들어간 후드 티셔츠였다.
용제건은 반 티 위에 테일러드 재킷을 걸쳤는데, 앞 단추를 푼 바람에 ‘황홀’이라는 문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뜩이나 용제건은 긴 머리를 하고 있어 눈에 띄는데 저 문구가 박힌 티를 입고 오다니.
SNS에 황홀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누군가가 용제건을 찍은 사진이 돌아다닐지도 모르겠다.
용제건은 문구를 정해 준 독고미로에게 고맙다고 말했는데, 독고미로는 ‘저걸 마음에 들어 하다니…….’라는 복잡한 심경을 숨기며 간신히 웃는 듯했다.
“아, 의신아. 저번에 말한 이벤트는 잘 준비해 왔어.”
예약한 에어 셔틀 안.
용제건을 향한 관심이 식을 때쯤, 용제건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었다.
목소리를 아무리 낮춰 봤자 내 옆에 앉은 귀 밝은 호랑이 노친네는 듣고 있겠지만.
“얼마 전 내가 적호 씨랑 술자리를 가졌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 오늘 소풍이 끝나면 꼭 대화하자.”
……용제건과 적호가 술자리를 가졌다고?
황지호를 돌아보니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있었다.
황지호는 그 술자리에 없었고, 또 그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 가운데, 에어 셔틀이 테마파크에 도착했다.
아직 황명 그룹 스타일의 리모델링이 진행되지 않은 탓에 남궁 그룹의 흔적이 가득한 테마파크 안.
모든 놀이기구가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놀이기구가 움직이고 있어!”
“와…… 조명이 들어오니까 인상이 되게 다르다.”
테마파크를 상징하는 메르헨풍 성.
느리게 하늘에 원을 그리고 있는 대관람차.
유원지 전체를 넓게 돌아다니는 열기구와 모노레일.
테마파크는 텅텅 비어 있었지만, 놀이기구는 정상 운행 중이었다.
“이거 전부 직원 없이 자동 모드로 움직인다고 했죠? 정말 저희만 있는 거 맞나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황지호는 입구에 쌓여 있는 마스코트 탈 인형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인형의 주인은 없어 보이는데, 왜 그런 거지?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인형 더미 뒤에서 오로라 빛의 마스코트 인형 머리띠를 한 관종 둘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단체 의상.”
“……문구까지 들어가 있어.”
관종 두 명이 세상 서러운 얼굴로 우리들을 바라봤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