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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20화 (518/925)

74. 모델 (4)

당시 권제인은 지금만큼 유명하지 않았다.

권제인이 정식 플레이어가 되어 은광고로 진학한 이후에는 콩쿠르에 출전하지 않았고 학업에 정진했으니까.

음악 활동이라곤 가족이 여는 음악회에 게스트로 참가하거나 은광고 현악부 발표회에 그쳤다.

제 앞가림에 바빴던 재러드 리가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를 알 리가 없었다.

재러드 리가 권제인의 연주를 들은 건 아주 우연이었다고 한다.

“제인이의 연주를 들었을 때, 제 옆에는 에너미들이 있었습니다.”

재러드 리는 자신이 에너미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세 기사의 맹세 소속 기사가 권제인의 연주 영상을 재생할 때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바이올린 소리에 이끌려 넋을 놓고 연주를 감상하였다.

고작 몇 분밖에 되지 않은 연주였지만, 그사이에 권제인이 음악으로 전하는 감상에 재러드 리는 푹 빠졌다.

그리고 연주가 끝난 순간, 재러드 리는 자신이 에너미가 아니라 인간임을 확신했다.

“제인이의 연주에 눈물을 흘리는 건 저뿐이었습니다.”

물그림자의 기사에 의해 복제된 완전히 같은 외양.

노란 장미의 기사가 고른 똑같은 의상.

재러드 리조차 누가 자신이고, 에너미인지 구분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권제인의 연주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건 진짜 재러드 리, 단 한 명뿐.

그렇게 이들 사이에서 자아를 잃어 가던 재러드 리는 다시 제 자신을 되찾았다.

무표정하게 권제인의 연주를 듣는 에너미를 바라보며 그는 세 기사의 맹세를 탈퇴하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도 알아. 내가 제인이 부탁을 받고 추적자들을 쫓아냈으니까.”

권제인의 이름이 나오자 그나마 조금 관심을 보이던 서돌이 반응했다.

“제인이가 그때 일을 계기로 내 가호를 받아 줬어. 그건 좀 고마운데요.”

재러드 리가 어떻게 권제인과 만났고, 권제인은 어쩌다가 그를 돕기로 결심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서돌의 말을 들으니 더 그랬다.

서돌이 워낙 구질구질하게 구니 이참에 가호를 받아 줘서 얌전하게 만들자는 생각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호를 받는 건 큰 결심이니까.

‘권제인은 서돌의 가호를 받는 대가로 재러드 리를 도우려 한 건가.’

재러드 리가 세 기사의 맹세를 나온 시점.

그때 영원의 호수는 그리 큰 팀이 아니었고, 세 기사의 맹세는 규모와 명성이 상당했다.

아마 권제인과 영원의 호수 팀원만으로는 세 기사의 맹세를 뿌리칠 수 없었을 거다.

그래서 권제인은 서돌의 힘을 빌린 것 같았다.

권제인이 그렇게 결심하게 된 경위가 궁금하긴 하지만 그 이야기는 세 기사의 맹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묻기 곤란했다.

목우람은 재러드 리와 권제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것 같았지만, 애써 질문하고 싶은 걸 참는 것처럼 보였다.

재러드 리는 서돌의 말에 긍정하며 말했다.

“저 말대로입니다. 세 기사의 맹세를 나올 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재러드 리가 말을 마치자 잠자코 듣고 있던 황지호가 질문을 던졌다.

황지호는 턱짓으로 캐리어 주변에 구겨져 있는 에너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들의 복제 과정에 관해 상세히 듣고 싶군. 복제가 존재하는 걸 의문으로 여기는 것 같던데.”

재러드 리는 캐리어 안에 들어 있는 에너미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이게 남아 있을 줄은 몰랐어. ‘세 기사의 맹세’를 나오기 전 다 죽여 버렸으니까.

재러드 리는 자신이 모든 에너미를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물그림자의 기사가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재러드 리를 에너미로 복제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 재러드 리가 있어야 한다는 건 확실했다.

만약 재러드 리가 자리에 없어도 복제가 가능하다면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

“물그림자의 기사가 에너미를 만들 때에는 제가 지력에 잠겨야 했습니다. 에너미를 모델로 복제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재러드 리가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지력에 잠식되던 시절의 일이 떠올랐나 보다.

재러드 리는 심호흡을 하고 설명을 짧게 덧붙였다.

그가 아는 방식에 의하면 능력치의 밸런스가 적절한 모델이 없을 시 복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오늘 노란 장미의 기사가 말했습니다. ‘물그림자의 기사가 새로운 성취를 보였다.’라고. 그것과 이것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새 경지에 도달한 건지.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한 건지.

상위 존재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건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 지력을 끌어다가 무슨 짓을 한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영국에 또 대재난 사태가 닥치진 않았으니까.’

저 비밀을 알아내기에는 단서가 부족했다.

그래서 우선 확인할 수 있는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저도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보렴.”

내가 질문할 때에는 재러드 리가 다소 부드럽게 말했다.

호족의 수장보다는 조카나 다름없는 아이의 동급생과 이야기하기 편한가 보다.

“처음 들었다는 권제인 선배님의 곡에 관해서 질문할게요. 그때 선배님은 이능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고 계셨나요?”

내 질문이 의외인 듯 재러드 리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세 기사의 맹세, 에너미, 지력.

질문할 게 많을 텐데 왜 권제인의 바이올린에 관해 묻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재러드 리는 당황한 건지 어색한 발음으로 답했다.

“그건 왜……? 이능 바이올린이었을 거야. 영상으로 봤는데, 푸른색의 이능 바이올린이었지.”

재러드 리의 답변을 듣고 생각을 정리하려 할 때, 황지호가 끼어들었다.

“질문의 의도가 궁금하군. 조의신, 왜 그런 질문을 한 거지?”

“저도 궁금해요.”

서돌이 존댓말로 한마디 거들었다.

조금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린 다음에 말하고 싶었는데, 두 수장들이 저렇게 나오니 그냥 입으로 말하면서 정리해야겠다.

“재러드 리 씨는 권제인 선배님의 연주를 듣고 자아를 되찾았다고 하셨죠.”

“……그래.”

“몇 분도 안 되는 짧은 연주를 듣고 나서요.”

“그래, 제인이의 연주에는 그 정도의 힘이 있어. 너도 제인이의 연주를 들었잖아. 들었으면 알잖아.”

내 말이 권제인의 연주를 의심하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재러드 리는 화를 낸다기보다는 팬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팬처럼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권제인의 연주에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그건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뿐일 거라고 단정 짓지 않는 것뿐이다.

“그건 의심하지 않아요. 제가 신경 쓰인 건 이능 바이올린이에요.”

재러드 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덧붙여 말하면 서돌도 아직 감을 못 잡은 것처럼 보였다.

황지호만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얼추 알아차린 듯 목우람과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재러드 리 씨는 지력을 뒤집어쓰며 이능파적으로 간섭을 받은 상태였죠. 그것 때문에 정신이 더 불안정해졌을 거예요. 하지만 권제인 선배님이 이능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곡을 듣고 바로 제정신으로 돌아왔어요.”

이능 바이올린.

통상 무기로 분류되지 않고, 일류 음악가 수준의 연주 능력이 없는 한 공격 용도로 쓰는 건 불가능한 아이템.

그렇기에 보통 악기 취급을 받는 데에 그치지만, 최고의 장인이 만들어 낸 높은 희귀도의 아이템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 이능 바이올린에는 숨겨진 기능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세 기사의 맹세 소속의 기사라면 권제인 선배님을 연구했을 거예요. 재러드 리 씨가 연주에 감동한 것 외에 무언가가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면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각한 원인이 하나 더 있다.

“그리고 그들이 타깃으로 삼은 목우람은 이능 바이올린 장인의 제자죠.”

세 기사의 맹세가 계속 회유하거나 죽이려고 했던 인물인 목우람.

그는 이능 바이올린 장인의 유일한 제자다.

즉, 현시점에서 이능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나는 여태까지 모은 단서를 바탕으로 가설을 제시했다.

“권제인 선배님을 연구한 결과, 이능 바이올린에서 무언가를 알아냈기에 목우람을 회유하거나 죽이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증거가 부족한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 말대로라면 세 기사의 맹세가 벌인 무모한 짓이 설명되었다.

만약 이능 바이올린의 존재가 그들의 목적에 방해가 된다면, 또다시 재러드 리의 탈주 사태 같은 일을 막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행동해도 이상하지 않다.

또, 권제인 손에 있는 이능 바이올린을 강탈하고 파괴하는 것보다 목우람을 죽이는 게 더 쉬울 거다.

언젠가 권제인에게도 공세를 퍼부을 예정일지 모르겠지만, 그건 비교적 쉬운 타깃인 목우람을 처리한 이후가 되겠지.

“그들은 팀에 들어오도록 권유하면서 제게 무언가를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요.”

목우람은 착잡한 얼굴로 에너미를 바라봤다.

도대체 무엇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제대로 된 이능 바이올린이 아닌 건 확실했다.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황지호가 말했다.

“나는 조의신이 제시한 가설에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저도요. 가설도 나왔겠다, 확인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서돌이 존댓말을 하니까 괜히 불길했다.

내 가설을 확인해 보는 방법은 나도 알고 있다.

이번 건으로 생포한 건 에너미만이 아니다.

세 기사의 소속 선임 기사 두 명도 붙잡았으니까.

서돌은 나한테 어필하는 것처럼 내 쪽과 황지호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제가 정신 조작과 분석을 좀 하거든요. 예전에 제인이도 그렇게 도와준 적이 있고…….”

“그럴 필요 없다. 너는 변덕이 심해 하나의 일에 붙어 있지 못하지. 그래서 웅족 따위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데에 10년이나 넘게 걸린 거다.”

“아, 그건 그렇긴 한데요. 이번엔 잘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당시, 서돌은 권제인에게 협력해 웅족에게서 정보를 캐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웅족의 정신이 튼튼하다고 한들 10년이나 걸렸으니 서돌에게 맡기는 건 좀 그랬다.

서돌이 의욕에 차 보였지만, 이번에는 나도 황지호와 동감이었다.

“유능한 고문 기술자가 있다. 그리고 막연한 내용을 캐내는 게 아니라 훌륭한 가설도 있어. 그러니 너는 필요 없다.”

황지호의 단호한 말로 이 자리는 여기에서 끝났다.

서돌이 황지호에게 끊임없이 질척였으나 노친네의 고집을 쉽게 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헤어지기 전, 재러드 리는 나와 목우람을 붙잡고 말했다.

“오늘은 제인이랑 얘기 많이 해야 해. 다음에 다시 말하자.”

재러드 리는 다급하게 말하는 통에 몹시 어눌한 한국어로 말했다.

이 건물 밖에서 권제인과 영원의 호수 팀원이 계속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서돌이 황지호에게 계속 귀찮게 구는 바람에 나와 목우람은 호족의 배웅을 받으며 황지호와 따로 이동했다.

“부반장에게는 빚이 많군요. 어떻게 이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걸 빚이라고 생각하다니.

저러니까 계속 호구를 잡혀 무일푼 생활을 하는 거다.

나는 내가 한 게 없다고 계속 사양했지만, 목우람은 없는 재산까지 나한테 다 넘길 기세로 고마워했다.

“언젠가 제가 부반장을 도울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적벽괴도는 좋은 일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고마우면 ‘그 단어’는 쓰지 말아 줘.”

“네?”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결국 참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목우람은 얼떨떨해하면서 동의해 줬다.

이렇게 위기에서 벗어난 나는 기숙사 방에 돌아가자마자 또 다른 위기를 맞이했다.

[용제건] 의신아, 이제 기숙사에 왔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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