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모델 (5)
서늘한 내 기숙사 방 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메시지를 받았으니 훈훈한 기분이 들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했다.
오늘 대활약한 용제건이 보낸 메시지를 보면 뿌듯하고 기뻐야 할 텐데 계속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서돌과 재러드 리와 합류한 이후부터 묘하게 조용했지. 권제인과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따로 이동했고…….’
이동 중에는 목우람이 보는 앞에서도 그 부탁이란 걸 할 기세였는데, 도착 후에는 갑자기 얌전해졌다.
분위기상 용제건이 끼어들 자리가 없긴 했다.
하지만 유희계 용제건이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 용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가.’
여태까지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메시지를 보낸 건 일종의 전략 아닐까?
상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안심하고 있을 때 맞는 뒤통수가 더 아픈 법 아닌가.
대비하지 못한 사건은 대처가 늦어지는 법이다.
용제건이 조용한 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위기가 끝난 이후라 방심한 것 같다.
용제건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자기 존재감을 잘 죽여서 심리 트릭을 잘 활용한 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추가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용제건] 메시지는 확인했는데, 답변이 평소보다 늦네. 생각이 많나 봐.
혹시 용제건이 어디에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창문 밖에 비행 중인 용제건이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용제건이 그런 짓을 했다간 기숙사 담당인 김신록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일단 부담임 선생님이 보낸 메시지이니 무시하기는 좀 그래서 답변하기로 했다.
[나] 도착했어요. 말씀하세요.
[용제건] 여차하면 직접 만나러 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아쉽다.
답변하길 잘했다.
용제건은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앞으로 답변을 재깍 하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겠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이렇게 된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용제건이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지 들어 보기로 했다.
[나] 말씀하세요.
[용제건] 그래, 그럼 바로 부탁할게.
그냥 무슨 말을 할 건지 들어 보려 한 건데.
용제건은 마치 내가 부탁을 들어주는 게 기정사실인 것처럼 답했다.
오늘 용제건이 보인 활약이나 강력한 어필을 고려하면 거절하기는 좀 그렇긴 하다.
거절하기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용제건은 부탁을 했다.
[용제건] 적호 씨한테 보여 준 거, 나도 보고 싶어.
리플레이를 말하는 건가!
용제건이 적호와 술자리를 가졌다고 했는데, 거기에서 적호가 무언가를 말한 게 분명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리플레이에 관해 누설하다니.
‘아무리 용제건이 상대라고 해도 적호가 쉽게 정보를 흘릴 리가 없는데.’
적호는 리플레이 보고서에서 용제건의 행적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여의보주 용제건이 몇 번이나 김신록을 살리려 했다고.
적호는 리플레이 속에서 아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애쓰는 용제건의 모습을 1년 가까이 봤으니 경계가 허물어진 건가.
술자리 이야기가 나왔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했다.
세 기사의 맹세에 정신이 팔려 용제건이 한 말을 흘려들은 건가.
‘리플레이…….’
플마고에는 리플레이가 가능한 스테이지가 있었다.
리플레이가 가능한 스테이지에서는 보통 사망자가 나오곤 했다.
대부분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죽어 나갔지만, 나는 늘 쉬지 않고 리플레이를 했다.
‘리플레이 기능의 단계가 올라가니까 숫자가 추가됐지.’
리플레이 기능이 2단계로 상승했을 때, 캐릭터 명단에 숫자가 추가되었다.
그 숫자가 의미하는 건 해당 캐릭터가 사망한 스테이지에서 내가 리플레이를 한 횟수였다.
용제건의 리플레이 횟수는 세 자리였다.
‘리플레이 기능이 3단계로 오른 후부터는 몇 회차를 리플레이할지 선택 가능해졌으니까 만약 용제건에게 리플레이를 쓴다면…….’
지부장이 남기려 했던 정보를 얻은 이후, 차원 이해도가 상승하며 리플레이 기능이 3단계가 되었다.
단계가 상승하며 명단 내에서 선택이 가능한 이가 늘어났고, 리플레이할 회차를 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용제건을 억지로 은광고 외곽까지 유도한 회차를 선택할 수 있다.
‘여태까지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리플레이를 써 본 적이 없는데.’
현재까지 리플레이를 사용한 대상은 유상훈, 장남욱, 손민기 그리고 김신록과 적호.
전원 플마고에서는 이름도 없는 엑스트라였거나 NPC였다.
즉, 조작할 수 없었던 대상이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용제건을 택하면 그가 어떤 경험을 하고, 무엇을 느낄지 예상할 수 없었다.
‘용제건의 리플레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겠지만…… 쓰고 싶지 않아.’
용제건은 플마고에서 친우를 잃었다.
그리고 그 친우를 살리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용제건] 되묻지 않고 답변이 끊겼네.
[용제건] 망설이는 걸 보니 의신이가 적호 씨한테 뭔가 보여 준 게 맞나 보구나.^^
메시지를 통해서도 용제건식 화법을 쓰다니!
차라리 잡아뗐어야 했나?
아니, 괜히 거짓말을 하면 나중에 한때 거짓을 말했다는 걸 트집 잡아 더 큰 요구를 할지도 모른다.
[용제건] 바로 승낙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건가 봐, 정말 기대된다.
용제건은 내 속도 모르고 메시지를 날렸다.
용제건은 소풍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지금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용제건] 적호 씨한테 그걸 보여 준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나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용제건을 배려하지 않고 그저 정보 습득에만 중점을 두면 당연히 리플레이를 사용하는 쪽이 이득이다.
용족 소속에다가 은광고의 교사로 근무한 용제건은 적호가 보지 못한 것을 봤을 거고, 얻지 못한 정보를 알고 있을 테니까.
다음 달이 크리스마스니까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좀처럼 리플레이를 쓰겠다는 답변을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겨우 답을 냈다.
[나]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딱 잘라 거절할 수 없었다.
고작 답변을 보류한 것뿐인데 죄책감을 느꼈다.
정보에 눈이 멀어 용제건을 악몽 속에 처넣을 생각이나 다름없으니까.
[용제건] 그래,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고 있을게.
[용제건] ^^
용제건이 기다린다고 말은 했지만,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무슨 수를 더 쓸 게 분명했다.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서 더 빚을 지운다거나, 상상도 못 한 계책을 쓴다거나.
용제건에 대항하는 데에만 정신을 몰두한다면 막을 수 있겠지만, 지금 내게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용제건도 그걸 알고 내 허를 찌르려 들 거다.
딩동.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추가로 도착했다.
용제건이 아닌 다른 용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염준열] 의신아, 소풍은 잘 끝났어?
[염준열] 스승님, 오늘 일정은 잘 마치셨나요?
좋은 선배, 착한 제자 염준열은 번거로울 텐데도 메시지를 두 종류로 보냈다.
바쁜 염준열이 이렇게 신경 써 주다니!
답변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각각 후배로서, 스승으로서 답변을 했다.
그 후에는 소풍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후배 조의신으로서 대화를 이어 갔다.
[나] 보물찾기 상품을 준비해 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염준열] 감사할 정도는 아니야. 상품은 어때?
그야 마음에 들었다.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홍룡 굿즈들이 잔뜩 있었으니까.
계절 별로 찍은 포토 카드와 내년 달력, 홍룡이 그려진 디바이스 케이스, 불을 켰을 때 홍룡이 떠오르는 크리스털 스탠드 등등.
염준열이 모델로 등장한 각종 상품들은 하나 같이 멋졌다.
내가 보물찾기로 확보한 상품에 관해 감상평을 늘어놓자 염준열이 기뻐했다.
[염준열] 내가 준비한 상품을 다 찾아 줬구나!
[염준열] 상품이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다. 여태까지 발매된 것들 중에서 엄선했어.
[염준열] (스탬프)
염준열은 선물 상자 사이에 둘러싸인 홍룡이 그려진 스탬프를 첨부했다.
상품 자체도 훌륭한데 염준열이 직접 그걸 다 고르고 준비했다고 생각하니 그 마음이 더더욱 기특했다.
염준열과 대화를 하고 나니 드디어 몸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역시 내 제자 겸 선배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었다.
딩동.
염준열과의 메시지창을 닫을 때쯤, 우리 반 아이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옹길동이었다.
[옹길동] 늦은 밤 미안하군. 이제 막 아지트로 돌아온 참이라서 말이지.
옹길동은 이제 귀가했나?
구슬비와 함께 이동하던데 해산 후에도 데이트를 하다가 돌아간 걸까.
[옹길동] 소풍 기념품을 받을 주소를 알려 다오.
옹길동은 해산 전 말한 대로 소풍 기념품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줄 생각인가 보다.
그런데 왜 주소를 묻는 걸까, 학교에 나와서 주면 되지 않나?
굳이 받을 주소를 묻는 거 보니 옹길동은 또 등교를 안 할 생각인가 보다.
학교에 나오도록 권유해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옹길동이 초면이나 다름없는 내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감사 인사와 함께 내 기숙사 호실을 적어 보냈다.
딩동.
또다시 디바이스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메시지를 보낸 상대는 곧 연락이 올 거라고 예상한 상대였다.
[류장] 안녕하세요, 조의신 학생. 소풍은 무사히 마치셨나요?
[류장] 제가 모시는 분께서 잘 봤다고 전해 달라 하시더군요. 고생 많았습니다.
메시지를 보낸 건 MITRON의 파티시에, 류장.
방관과 침묵의 까마귀 마왕과 계약한 인물이다.
류장은 사전에 가을 소풍 소식을 들었다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했었다.
소풍에 관해 인지하고 있던 셈인데, 이번 건에 까마귀 가면을 사용했으니 반드시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예상했다.
나는 적당히 덕분에 잘 다녀왔다는 상투적인 인사말을 했다.
그 외에도 쌓여 있던 디바이스 메시지에 답변을 한 후, 잠들기 직전 누군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딩동.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계이담] 야.
내가 아직 이 쓰레기 악플러의 알람을 꺼 두지 않았다니!
메시지를 주고받을 만한 일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영원히 잊은 채로 살고 싶었는데.
메시지 알람 끔으로 설정을 바꾼 후, ‘야’라고 짧게 적힌 메시지를 노려봤다.
말이 짧은 걸 보니 이 답 없는 악플러는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답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곧장 디바이스 화면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긴 하루를 마치고 꿈 없이 잠들었다가 일어난 후.
아침 일찍 훈련을 하러 가다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대치 상태를 목격했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1학년 기숙사 건물 앞.
안다인과 용제건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기숙사생인 안다인이야 그렇다 쳐도 용제건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용제건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지?’
용제건이 일요일에 학교 업무를 하겠다고 나올 리는 없고.
만약 학교 업무를 한다고 치면 기숙사 건물이 있는 쪽으로 올 필요가 없다.
용제건은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 같았다.
그 후보는 아마 나나 김신록일 것 같은데, 안다인이 용제건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용제건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 다인아.”
예의 바르게 안다인이 인사하고, 용제건은 웃으면서 답했다.
얼핏 봤을 때에는 평범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 주변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