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모델 (6)
일출 시각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탓에 아직 주변이 어두웠다.
하지만 플마고에서도 미형으로 꼽혔던 둘이 저렇게 서 있어서 그런가 딱히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안다인은 용제건을 곧게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은 일요일 오전 일곱 시 반이에요.”
안다인은 차분하게 시간을 고했다.
안다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낭랑하고 맑게 들렸으나 내용을 따지고 보면 신랄한 구석이 있었다.
용제건은 일반 교사와 다르다.
은광고 제일의 장기근속자임에도 불구하고 승진한 적도 없고 담임직을 맡지도 못했다.
이번에 1학년 0반의 부담임을 맡은 건 예외 중 예외다.
용제건은 교사로서의 권한과 권리를 일부 포기하는 대신 많은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용제건이 야근하거나 당직을 서는 건 못 봤는데. 아마 승진하지 않는 대신 일을 적게 하는 거겠지.’
오늘은 휴일인 일요일.
다소 이른 시각인 일곱 시 반.
휴일에 당직을 서는 다른 교사와 달리 용제건이 그런 업무를 받을 리가 없다.
안다인은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응, 알고 있어.”
용제건은 유들유들하게 답했다.
안다인이 자신에게 각을 세우는 게 마음에 드는 듯했다.
안다인은 용제건의 그런 태도에 딱히 동요한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그 대신 용제건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희 담임 선생님을 보러 오셨나요?”
‘저희’라는 말에 힘이 들어간 것 같은데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안다인은 평소에 발음이 고르고 또박또박하여 음성에서 강단이 느껴지지 않던가.
은광고에서 대다수의 학생이 꺼리는 유희계 용을 앞에 두고도 저렇게 반듯하게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응, 김신록 선생님도 만날 생각이야.”
“담임 선생님은 어제 많이 바쁘셨어요.”
“잘 아네.”
“야간 훈련을 하던 반 아이가 교직원 사택으로 복귀하시던 김신록 선생님과 마주쳤다고 들었어요.”
김신록은 요즘 들어 더 바빠졌을 거다.
지금 호족의 손에 떨어진 자들이 한둘이 아닌데, 다루기 어려운 이들뿐이라 대부분 김신록이 고문을 담당하고 있다.
또, 소풍 건으로 세 기사의 맹세 소속 선임 기사 둘이 추가되었고, 김신록은 호족 외에도 용족에 붙잡힌 카드모스까지 맡는 중이다.
게다가 성국언과의 접촉도 꾀하는 중이니 김신록은 몹시 바쁠 거다.
‘안다인이 저렇게 따르는 걸 보면 교사로서도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고…… 대단하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1학년 1반 아이들이 김신록 소식을 공유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지 않나?
안다인의 말에 의하면 어젯밤 늦게 김신록이 귀가한 걸 1반 학생이 목격했다.
그리고 지금은 새벽에 가까운 시각이다.
사실상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셈인데, 어떻게 안다인은 그 소식을 파악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용제건을 경계하느라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는 중인 걸지도 모르겠다.
안다인이 반장이라서 그런지 1학년 1반 아이들이 담임 교사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른 것 같았다.
용제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걸까, 한결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답했다.
“김신록 선생님이 어제 많이 바쁘셨구나. 나도 소풍 다녀오느라 바빴거든. 어제는 둘 다 바빴네. 오늘은 쉬고 있을 테니 잘됐다.”
용제건은 절묘하게 안다인의 속을 긁는 소리를 했다.
소풍 인솔이 교사의 업무 중 하나라고 하나 누구도 용제건이 소풍 과정에서 일했다고 여기진 않을 것이다.
이번엔 세 기사의 맹세에 대처하느라 일을 하긴 했지만, 그걸 아는 이들은 극소수다.
즉, 지금 한 말은 대부분의 이들에게 ‘신록이는 일하느라 바빴어? 나는 노느라 바빴어. 오늘은 서로 한가하니까 잘됐네.’ 정도로 들릴 거다.
뭐, 사실 속뜻을 고려하면 저렇게 해석해도 그리 틀리지 않겠지만.
“선생님이 쉬고 계시는 걸 아시는군요. 지금 뵈러 갈 생각이신가요?”
안다인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주변의 온도가 서서히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면 할수록 용제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숙사 건물 중앙 로비를 통해 아침 훈련을 나서던 기숙사생들이 용제건을 보고 급선회하기 시작했다.
용제건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후문이나 창문을 통해 건물을 탈출하는 중인 것 같다.
“응.”
“약속을 잡고 오신 건가요?”
“아니, 깜짝 이벤트로 방문한 거라. 김신록 선생님이 좋아하는 간식도 사 왔어. 혹시 김신록 선생님이 뭐 좋아하는지 알고 있어?”
용제건이 약속도 없이 왔다는 말에 안다인의 눈썹이 잠깐 꿈틀거린 것 같기도 하다.
안다인이 뭐라고 하기 전에 용제건이 빠르게 화제를 전환하며 손에 든 종이 가방을 들어 올리며 흔들었다.
백화점 로고가 박힌 종이 가방 안에는 상자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마 김신록이 좋아하는 음식과 관련된 선물 세트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안다인은 용제건의 질문에 막힘 없이 답했다.
“담임 선생님은 단 음식을 좋아해요.”
역시 안다인.
김신록을 잘 관찰했나 보다.
김신록은 단 음식을 좋아하는 걸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지익회 애들이나 1반 애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김신록이 담당한 아이들은 거의 다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용제건은 안다인의 대답에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잘 알고 있구나. 그중에서 특히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
그건 내가 알고 있다.
김신록이 좋아하는 음식은 곶감.
참고로 말하면 곶감은 백호군이 끔찍하게 여기는 음식이다.
김신록은 백호군의 눈치를 보면서도 눈앞에서 온갖 곶감 음식을 먹어 치울 정도로 곶감을 좋아한다.
‘김신록이 그렇게 곶감을 좋아하니까 백호군이 식탁에 곶감이 올라와도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적호가 아직도 백호군에게 앙심을 품고 있고, 백호군도 반성하기 위해 참는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안다인은 김신록이 곶감을 좋아하는지 모르는가 보다.
안다인의 얼음 같은 얼굴에 실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
“알려 줄까?”
안다인은 완전무결한 히로인이었으나 수천 년 묵은 유희계 용과 말로 줄다리기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김신록에 관한 정보력에 있어서 안다인이 용제건을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악우도 어쨌든 친구가 아니던가.
둘은 5천 년 넘게 친우로 지내 왔다.
안다인이 용제건에게 김신록이 뭘 좋아하는지 물어봐야 하나 마나 망설이고 있을 때, 용제건이 얄밉게 말을 끊어 버렸다.
“내가 알려 주면 좀 그런가? 나중에 김신록 선생님께 직접 물어봐.”
“아…….”
반 아이들이 물어봐도 김신록은 얼버무릴 것 같은데.
김신록은 은근하게 벽을 세우는 타입이니 사적인 정보를 쉽게 흘리지 않을 거다.
안다인도 그걸 아는지 작게 탄식했다.
“휴일에는 좋아하는 걸 먹으면서 푹 쉬는 게 좋겠지? 빨리 김신록 선생님한테 가 봐야겠다. 먼저 갈게.”
정말 애석하게도 이번 건은 용제건의 완승이었다.
휴일에 김신록을 귀찮게 하겠다는 의사가 다분한 말을 늘어놓았는데도, 안다인이 용제건을 붙잡을 구실을 찾지 못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용제건은 곶감을 두고 김신록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데에 성공했다.
‘내가 안다인에게 알려 줄까? 아니, 호족의 후예에 관한 개인 정보를 뿌리면 안 되겠지.’
고작 좋아하는 음식을 알려 주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꺼려졌다.
김신록은 신분을 계속 바꾸고 있으니까.
자칫하다간 내가 흘린 정보를 단서로 김신록의 정체를 캐는 이가 나올지 모른다.
나중에 안다인에게 올무의 새 사진을 보여 주며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의신아, 안녕. 훈련 나왔어? 부지런하네.”
그대로 교직원 사택으로 향할 줄 알았던 용제건이 내 쪽으로 왔다!
당혹스럽긴 했지만, 일단 교사가 먼저 말을 걸었으니 무시하기도 좀 그랬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예의 바르구나. 어제 했던 제안은 잘 생각해 봤어?”
“……생각 중이에요.”
“그래, 독촉하는 건 별로 안 좋지. 그럼 가 볼게. 내일 보자.”
왜 굳이 안다인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저런 말을 꺼내는 걸까.
안다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용제건이 신나게 휘젓고 간 직후, 어색한 공기 속에서 안다인과 인사를 하고 훈련을 하러 나섰다.
이동 중에 안다인과 올무와 어제 다녀온 소풍에 관해 주로 이야기했는데, 안다인은 소풍 때 용제건의 행적을 아주 간접적으로 물었다.
용제건이 보물찾기로 아이들을 실컷 갖고 놀았다는 이야기를 적당히 포장해 전달했는데, 그 말을 들은 안다인은 뭔가 결심을 굳힌 듯했다.
“그랬구나. 얘기 고마워, 의신아.”
대체 안다인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마음에 걸리긴 했는데, 타이틀 히로인을 추궁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아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
유상훈이 답지 않게 긴 메시지를 보냈다.
[유상훈] 월요일에 우리 반에서 긴급회의 할 예정.
[유상훈] 기숙사에서 무슨 일 있었음?
안다인은 1학년 1반에 긴급 소집을 건 것 같다.
안다인은 설마 진심으로 용제건 타도를 위해 뭉칠 생각인 걸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기로 했다.
안다인과 용제건, 양쪽 다 응원해야겠다.
* * *
월요일.
1학년 1반 전원이 아침 일찍 등교하여 교실 문을 걸어 잠그고 무언가를 준비하는 가운데, 은광고에선 아주 중요한 학교 일정이 시작되었다.
바로 3학년들의 기말고사.
수능을 치른 3학년들이 학교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취업, 진학을 준비하도록 배려해 3학년들은 이르게 기말고사를 치른다.
그렇게 은광고 3학년 학생들의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었다.
“0반 선배님들이 무사히 기말고사를 치셔야 할 텐데.”
김유리는 걱정이 태산 같은 듯했다.
0반 후배이자 학생회 소속인 김유리로선 우기환 일당이 무슨 일을 벌일지 고민이 많은가 보다.
“3학년 중에 미로랑 같은 반이 될 때까지 유급을 하고 싶다는 선배님이 계셨는데…….”
수능도 안 치고 독고미로의 응원 콘서트나 보겠다며 버티던 3학년 0반 국악부 선배놈 말하는 걸까?
권레나가 걱정하며 말하자 독고미로가 그녀를 안심시켜 줬다.
“괜찮아. 정해온 선배님이 잘 말씀해 주셨대.”
“2학년 0반의 홈마 선배님이요?”
“응.”
표면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3학년 0반 선배놈의 2년 연속 유급 예정 선언을 두고 대판 싸움이 났었다.
독고미로의 홈마, 2학년 0반 소속 정해온은 유급 선언을 한 선배에게 선언했다.
만약 유급해서 독고미로에게 부담을 주면 자신의 모든 인맥, 경험, 능력 등등을 동원해 3학년 0반 국악부 선배놈의 팬질을 방해하겠다고.
티켓팅, 굿즈 구매, 사인회 및 음악 및 공개 방송 방청 참가 등등을 전력으로 저지하겠다는 말에 국악부 선배놈이 꼬리를 내렸다.
또라이력이라면 모를까, 국악부 선배놈은 팬질 경력으로썬 도저히 정해온을 감당할 수 없었던 거다.
“아, 맞다. 미로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응? 부탁?”
“4/4분기 학생 대표 회의에서 정한 다음에 공개 모집을 할 예정인데, 추천으로도 후보를 선정할 예정이라서. 난 미로를 추천하고 싶어.”
김유리가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홀로그램에는 ‘은광고 학생 홍보 대사’라는 표제가 떠 있었다.
표제 밑에는 올해 은광고 홍보물의 표지 모델인 염준열과 연가람의 사진이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