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모델 (7)
은광고 학생 홍보 대사.
1년 동안 학생들을 대표하여 은광고를 홍보하는 이들을 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기업의 광고 모델만큼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않지만, 학교 홈페이지나 홍보 책자 등에 얼굴을 자주 비치게 된다.
홀로그램 속 은광고의 교표 아래, 염준열이 반듯하게 교복을 입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플마고에선 염준열이 아니라 천동하가 맡았는데.’
플마고의 은광고에서도 학생 홍보 대사가 존재했다.
하지만 내 기억에 의하면 은광고의 모델은 염준열이 아닌 천동하였다.
자세한 정황은 나오지 않았지만, 단기 유학 중인 염준열을 대신해 천동하가 그 자리를 맡게 된 것 같다.
천동하가 아닌 염준열이 모델을 맡은 것 외에도 다른 점이 하나 더 있었다.
‘플마고에서는 천동하 혼자서 학생 홍보 대사를 했었어. 왜 달라진 거지?’
사소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다른 아이들도 연가람에 관해 언급했다.
염준열은 TV에도 자주 나오니 익숙해서 다른 모델 쪽에 더 시선이 가나 보다.
“옆에 있는 사람 0반 선배 아니냐?”
“맞아요. 연가람 선배님이 학교 홍보 대사인 건 처음 알았어요!”
“0반은 문제아 취급 받느라 이런 거 안 시켜 줄 줄 알았는데…….”
독고미로가 현실적인 말을 했다.
여태까지 2학년 0반이 저지른 행각을 고려하면 연가람이 홍보 대사를 하는 건 뭔가 이상하긴 했다.
덧붙여 말하면 제갈재걸을 쫓아다니고 그에 관련된 장난질과 꿍꿍이를 준비하느라 바쁠 2학년 0반 학생이 학교 홍보 대사를 맡는 것도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연극부는 외부 활동을 해. 연가람 선배님은 연극부 에이스로 유명하시고…… 은광고 홍보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제갈재걸 선생님이 추천하셨대.”
김유리의 설명에 다들 납득했다.
제갈재걸이 추천해서 학교 측에서도 납득하고, 연가람도 기꺼이 받아들인 거다.
그리고 플마고에서 연가람이 홍보 대사를 맡지 않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제갈재걸이 학교에 없으니 연가람이 모델을 맡지 않은 거구나. 그러다가 연가람을 대신할 학생을 뽑지 못해 결국 천동하 혼자 홍보 대사를 하게 된 거겠지.’
플마고 생각에 착잡한 심정으로 홀로그램 속에 있는 두 모델을 바라보았다.
화사한 분위기의 염준열과 연가람이 사이 좋게 웃고 있는 모습은 그림이 되었다.
과연 은광고를 대표하는 이들다운 모습이었다.
물론 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천동하 단독 모델 버전도 나쁘진 않았지만.
“나는 유리가 다른 애를 추천할 줄 알았어.”
“응?”
“유리 친구 중에 유명인이 있으니까…….”
독고미로는 안다인을 말하는 것 같다.
은광고가 자랑하는 천재, 신탄의 사수 안다인.
플마고 흐름대로 가면 다음 학교 홍보 대사는 안다인이다.
안다인은 천동하 때와 마찬가지로 단독 홍보 대사를 맡게 된다.
원래 주수혁과 페어로 은광고 홍보 대사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시즌에 일어나는 시나리오 속, 주수혁은 에너미화한 방윤섭을 죽이고 0반행이 결정되며 홍보 대사 자리도 박탈당한다.
그 결과, 안다인 혼자 홍보 대사를 맡게 된다.
‘주수혁을 대신해서 그 자리를 채우려 하는 학생은 없던 거겠지.’
플마고의 은광고 홍보 모델을 떠올리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보다 더 길게 생각에 잠겨 있던 김유리가 독고미로의 말에 답했다.
“음…… 두 사람을 추천할 수 있다면 다인이랑 미로 둘 다 했을 텐데. 그래도 한 명만 꼽아야 한다면 미로를 추천할래. 미로의 무대를 직접 봐서 그런가, 아하하.”
김유리는 둘을 두고 정말 고민을 많이 한 건지 말꼬리를 흐렸다.
안다인은 무엇하나 부족한 게 없는 완벽한 히로인이긴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능력은 독고미로가 앞선다.
김유리가 왜 고민을 했고,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이해가 갔다.
김유리는 어색하게 웃은 뒤에 장난스레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다인이를 모델로 세우면, 남학생 쪽은 수혁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거든. 지금 남학생 중에 강력한 후보가 있어서…….”
그거야 그렇다.
안다인 옆에 주수혁이 아닌 다른 인물이라니!
상상도 안 갔다.
뭐, 반장과 부반장으로서 안다인과 유상훈이 함께 행동할 때가 많긴 하지만.
그건 유상훈이니까 봐 줄 만한 거다.
한편, 김유리의 말에 송눈새가 별명 값을 하며 답했다.
“왜? 아, 둘이 사귀나?”
“아니에요. 두 분은 서로 혼자서 짝사랑 중이에요.”
송대석의 질문에 사월세음이 현명하게 답했다.
등교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독고미로도 주수혁과 안다인이 무슨 사이인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송눈새는 여전히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저번에 송대석은 안다인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는데 여전히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여전히 송대석은 민그린, 넓게는 우리 반 외에는 그리 관심이 없나 보다.
송대석의 눈새 발언은 그렇다 쳐도 걸리는 말이 있었다.
‘주수혁이 뽑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후보가 있단 말인가.’
문무 겸비, 미목수려한 명문자제 주수혁을 제치고 누가?
은광고 1학년 학생의 명단을 머릿속에서 죽 훑어봤지만, 집히는 구석이 없었다.
현재 1학년인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는 학교 홍보 대사를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캐가 많긴 했지만.
그때, 노친네의 처웃는 소리가 내 집중을 방해했다.
“하하하하! 누군지 알겠다. 조의신은 모르는 것 같지만.”
어쩌라고.
혀끝까지 튀어나온 말을 삼켰다.
지금 신경 써야 하는 건 노친네가 아니라 주수혁을 제칠지도 모르는 누군가에 관해서였으니까.
“아, 나도 알 것 같아.”
“나도.”
권레나와 민그린은 누군지 알아챈 것 같았다.
역시 현명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운 사고 회전 속도가 남달랐다.
상황을 보니 송눈새를 제외한 모두가 대충 눈치챈 것 같았다.
그 후보의 정체는 다소 어이없었다.
“부반장이 그 후보입니까?”
“응.”
목우람의 질문에 김유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 쪽으로 쏠렸다.
시선 속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건 좀 아니지 않나? 누가 대체 추천한 거지? 학생회장인 내 제자가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에 추천한 건가? 아니면 노친네가 수작을 부렸나? 황명 그룹의 핵심 모델이 어쩌고 하더니.’
황지호를 이번 해프닝의 원인으로 단정 짓기 직전, 눈치 빠른 노친네가 먼저 내 생각을 중단시켰다.
“조의신, 내가 추천한 게 아니다. 하하하하하!”
“응, 지호는 관계없을걸? ……아마도. 듣기로는 학생회 선배님들이랑 지익회 쪽에서 의신이를 엄청 추천했대.”
김유리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아직 정식으로 홍보 대사의 추천과 선출이 진행된 건 아니지만, 슬슬 시기가 다가오니 학생 자치 기구 멤버들이 잡담하듯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남학생 후보로 거론된 건 나와 주수혁, 두 사람이라고 한다.
주수혁이 속한 선도부 측에선 주수혁을 추천했다.
그러나 학생회와 지익회에서는 나를 추천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성적이나 실적을 고려해서 주수혁과 나란히 뽑힌 건가?’
학교 성적, 협회가 인정한 실적 양쪽을 고려해도 주수혁이 위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러 사건을 계기로 나와 친해진 이들이 친분을 바탕으로 추천한 결과물인 듯하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비롯한 지인들의 마음씨는 감사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해 줬으면 한다.
‘‘계’새끼는 지익회에서 그런 얘기가 돌면 좀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도움이 안 되네.’
플마고를 해 봤으면 내가 주수혁을 제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하긴, 그 비열한 악플러는 주제도 모르고 게임을 할 때에도 안다인 쫓아다니느라 바빴을 테니 뭘 알기나 하겠나.
“의신이가 모델…… 꼭 보고 싶어요!”
“괜찮을 것 같은데.”
사월세음에 이어 한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어느 사이엔가 내가 당연히 모델을 한다는 분위기로 굳어졌다.
아직 정식으로 후보가 된 것도 아니고, 주수혁이 있는데 왜!
하지만 반 아이들이 온갖 기대 어린 말을 쏟아 내는데 거기에다가 찬물을 뿌릴 수 없었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멍청한 반응을 보였는데, 이 꼴만 봐도 나보다는 주수혁이 더 나을 것 같지 않은가?
황지호는 내가 입을 벙긋거리는 걸 볼 때마다 처웃었다.
“같이 열심히 하자.”
독고미로가 분위기에 편승해 저런 짓궂은 소리를 할 정도였다.
재미를 붙인 건지 반 아이들이 조례를 하기 위해 들어온 함근형 선생님께도 모델 얘기를 꺼냈다.
함근형 선생님은 험상궂은 얼굴을 조금 유하게 바꾸며 말했다.
“힘내라.”
어쩐지 함근형 선생님도 나를 추천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반 아이들과 함께 듣는 오전 공통 수업 내내 툭하면 모델 얘기가 나왔다.
나를 놀리려고 그런 소리를 꺼내는 황지호 같은 놈도 있었지만, 대부분 순수하게 추천하려는 마음에서 모델 얘기를 꺼내는 걸 알았기에 뭐라고 하기 힘들었다.
모델이야 이 세계에 오기 전, 체스 기사 시절에 여러 번 해 봤지만 주수혁을 제치고 하는 건 좀 그랬다.
‘다시 모델을 제안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제안을 받거나 추천받은 모델은 세 자리.
느루, 황명 그룹, 은광고.
다시는 모델 같은 일과 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서 그런지 더 당혹스러웠다.
점심시간을 맞이해 겨우 혼자가 되어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옛일이 떠올랐다.
‘체스 할 시간에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싫긴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는데.’
화제성을 모아 체스 문화를 발전시키고 민간의 후원을 확대하기 위해서.
그런 명목으로 모델을 했었다.
실제로 주목하는 사람이 늘어서 체스 인구도, 관중도 늘어났었다.
‘……그래도 말이 많았지.’
찍는 광고가 늘어나다 보니 돈 때문에 체스 할 시간에 카메라 앞에 선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 말을 듣기 싫어서 수입의 대부분을 여러 단체에 후원했는데도 욕을 많이 먹었다.
어린 자식을 돈 때문에 굴린다며 부모님도 한 소리 듣고, 심지어 동생들에게도 뭐라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모델 일을 하느라 수면 시간과 체스 기보를 연구할 시간이 주는 것보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게 더 힘들었다.
결국 내가 체스를 두지 못하게 되면서 모델 일도 끝이 났다.
“…….”
사람이 없는 자판기 앞, 늘어서 있는 전시용 상품과 메인 도어 너머의 표시판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한때 광고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이온 음료를 피해서 선택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의신 학생, 안녕하세요. 점심은 드셨나요?”
공청훤 특유의 선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정한 음성인데 손끝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요새 결석이 잦아 지은 죄가 많았다.
“……네.”
“그래요? 그럼 같이 이동할까요?”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왔는데, 어떻게 공청훤은 나를 찾아온 건가.
예전부터 느꼈지만 사람 찾아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어쩌면 상당히 높은 레벨의 추적 스킬을 보유 중일지도 모르겠다.
공청훤을 피하는 건 어려울 것 같으니 음료를 챙겨 같이 이동해야겠다.
‘아.’
당황해서 손이 미끄러진 걸까.
자판기의 상품 투출구에는 이온 음료가 있었다.
억지로 마신 이온 음료가 쓰게 느껴졌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