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모델 (10)
염준열은 학업과 스타 플레이어로서의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쁜 2학년 생활을 보냈다.
그 와중에 학생 홍보 대사까지 했으니 인원 증설의 필요성을 절절히 느꼈을 것이다.
염준열의 성실함과 노력, 배려가 돋보이는 제안이었으나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어쩌다가 내 이름이 오르긴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주수혁과 안다인이 학생 홍보 대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와의 인연, 친분 등을 이유로 나를 추천한 이들이 있긴 하지만, 공정한 후보 선정 과정을 거치면 주수혁과 안다인이 결국 나를 제치고 홍보 대사 자리에 오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원이 2명일 때의 이야기였다.
홍보 대사 정원을 늘리면 내가 저 안에 들어갈 가능성이 컸다.
‘황지호한테 대신 해 달라고 할까?’
툭하면 은인 소리를 하며 영약 같은 불필요한 친절을 베푸는데, 대신 해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황지호는 요새 황명 그룹의 후계자로서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지 않는가.
은광고의 학생 홍보 대사 이력이 생기면 황지호의 존재감이 더 커지지 않을까?
너무 눈에 띄면 호족인 게 드러날 가능성이 있긴 한데, 어차피 노친네는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아예 학생 홍보 대사까지 다 해 먹으면 안 되나?
‘아니…… 아직 황지호가 은광고의 학생으로서 재학 중인 걸 파악하지 못한 적대 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허를 찌를 수는 남겨 놔야지.’
황지호의 여태까지의 행보를 생각하면 이미 정체가 사방팔방 퍼졌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12지 동맹의 수장이 자신이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으로, 그것도 문제아 반에서 돌아이로 지낸다는 걸 바로 파악할 이는 의외로 많지 않을 것 같았다.
황지호를 대타로 세운다는 계획을 빠르게 접었다.
‘그런데 왜 교사도 뽑는 거지?’
염준열은 더 많은 학생 홍보 대사를 늘리겠다고 말했는데, 홀로그램에는 특별 홍보 대사로 교사 1명을 더 뽑는다고 쓰여 있었다.
나만 이를 의문으로 생각한 게 아니었는지, 사전에 이야기가 된 듯한 학생회 멤버를 제외한 이들이 의문스러워했다.
회의 참석자들이 ‘교사 1명’에 주목하자 염준열이 자연스럽게 그 부분에 관해 설명을 이었다.
“그간 발행된 은광고의 홍보물에는 교사진의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면적으로 앞에서 홍보 대사를 맡은 적은 없었습니다.”
염준열이 디바이스를 조작하자 화면이 전환되었다.
역대 홍보물의 교사진 인터뷰를 모자이크처럼 모아 둔 화면이었다.
곳곳에 아는 교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수많은 인터뷰 중, 함근형 선생님의 험상궂은 얼굴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나 저 인터뷰 못 봤는데!”
“저거 몇 년도 거임?”
금찬솔과 왕찬솔이 제갈재걸의 인터뷰를 찾아내곤 흥분했다.
제갈재걸이 은광고에 부임하고 얼마 안 돼서 진행한 인터뷰였는지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진이 찍혀 있었다.
두 사람은 급히 디바이스를 켰는데 보나 마나 역대 홍보물 자료를 다운받는 중인 것 같았다.
금찬왕찬이 히죽거리며 디바이스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염준열의 프레젠테이션이 계속되었다.
염준열은 행정 업무와 수업 준비에 바쁜 교사진을 고려해 홍보 대사를 맡는 교사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방침을 이야기했다.
아직 구체적인 사항이 결정되지 않았기에 교사진과는 제대로 이야기가 되지 않은 듯했다.
“이번 안건이 학생 대표 회의 내에서 가결되어 계획이 구체화되면 학교 측과 협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은광고의 자랑 중 하나인 교사분들께서 홍보 대사로 활동해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은광고의 교직원 수는 수백 명.
재직 중인 모든 교사가 유능하고 성실한 건 아니다.
하지만 최편득 같은 범죄자 수준의 악당들은 쳐낸 상태다.
무엇보다 함근형 선생님 같은 훌륭한 교사들이 많으니, 교사진도 은광고의 자랑이라 할 만했다.
‘함근형 선생님이 얼굴은 무서워도 실적이나 인품, 이능,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데.’
교사이자 유명 플레이어 ‘창천명궁’인 함근형 선생님의 젊은 시절에 찍은 증명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옛 증명사진 속 함근형 선생님은 젊은 혈기가 얼굴에 드러나서 그런지 지금보다 한층 더 험악해 보였다.
그래서 흉악범 수배 전단 사진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반박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따뜻한 느낌이 드는 조명 아래에서 사진을 잘 찍고 의상을 갖추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선생님 이름을 하나씩 대고 있었는데, 나와 비슷한 생각에 빠진 학생이 한둘이 아닌 것 같았다.
‘……다들 추천하고 싶은 교사가 있나 보구나.’
제갈재걸의 이름이 들리자 경계하는 금찬왕찬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제갈재걸이 모델을 하는 걸 보고 싶긴 한데 너무 유명해져서 구질구질한 팬들이 더 늘면 어떡하나 고민하는 듯했다.
저 두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리라는 건 예측 가능했는데, 의외인 점이 있었다.
“김신록 선생님이 모델 하면 잘하실 것 같아. 상훈이는 어떻게 생각해?”
“……괜찮겠네.”
“그렇지? 반 아이들이랑 얘기해 봐야겠다.”
유상훈은 반쯤 졸고 있다가 그냥 영혼 없이 답한 것 같은데, 안다인은 아주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안다인은 김신록을 학교 홍보 대사로 밀 생각인가?
김신록이 역용술로 얼굴을 감췄다고 하지만 여러 번 신분을 바꾼 데다가 진짜 정체는 호족과 웅족의 후예인데, 좀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플마고의 타이틀 히로인이 담임 선생님을 저렇게 따르는 걸 보니 응원하고 싶어졌다.
플마고 속 1학년 안다인이 담임으로 최편득을 만나 마음고생을 크게 했으니까, 이번엔 좋은 선생님과 즐거운 학교생활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학생 홍보 대사는 거의 결정된 분위기인데, 선생님 쪽은 치열하겠다. 그치?”
김유리가 웃으며 말하자 뒤늦게 아차 싶었다.
교사진의 홍보 대사 쪽에 정신이 팔려 학생 쪽 생각이 늦었다!
지금이라도 이의 제기를 해야 하나?
아니, 그래도 염준열의 프레젠테이션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해서 이의 제기할 곳이 없었다!
결국 홍보 대사 증원 건이 가결되어 버렸다.
증원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기권 표가 몇 개 있었으나 나머지는 전부 찬성표였다.
“그럼 다음은 총동아리회장이 제안한 안건입니다.”
염준열은 어쩐지 홍보 대사 증원 건을 제시할 때보다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염준열뿐만 아니라 회의장이 전체적으로 들뜬 분위기였다.
교사 중에 누가 홍보 대사를 맡을지 기대해서 그런 것도 있었으나, 학생 중에서 후보로 꼽히던 이들이 모두 홍보 대사를 맡을 것 같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들떠 있는 공기 속, 허채아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단상에 올랐다.
“총동아리회에서는 사관학교 교류전 계획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음 교류전은 내년 가을이지만 지금부터 준비해도 기한이 촉박한 듯하여…….”
시선이 주목되자 말하기 힘든 듯 허채아가 말꼬리를 조금 흐렸다.
허채아는 발표와 함께 제시할 자료 화면을 준비한 것 같은데, 긴장해서 손이 떨리는지 좀처럼 홀로그램을 켜지 못했다.
지켜보던 총동아리회 임원이 대신 켜 준 후에야 진행이 되었다.
‘아까 허채아가 정기 보고를 할 때에는 저렇게까지 긴장하지는 않았어. 그때는 경직된 분위기라서 발표하기 더 까다로웠는데 무난하게 해냈지. 뭔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하려는 것 같네.’
허채아의 긴장한 얼굴을 보고 짧게 추리를 했는데, 예상대로 허채아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허채아가 제시한 건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교류전의 확장 방안이었다.
올해 치러진 사관학교 교류전은 규모가 크긴 했으나 스포츠 한정이었다.
즉, 응원이 아니라 직접 참가할 수 있었던 건 운동 관련 동아리와 소모임, 혹은 트라이아웃을 거쳐 선발된 일부 학생들뿐.
스포츠 교류전이다 보니 어쩔 수 없긴 했지만, 다른 동아리에서 봤을 땐 아쉬웠을 거다.
‘신문부는 취재 형태로 참가했으니 아쉬울 게 없었어. 오히려 충실하게 보냈지……. 다른 동아리에서도 뭔가를 하고 싶었겠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었는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허채아는 과연 생각의 범위가 깊고 넓었다.
허채아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으나 총동아리회에서 구상했다는 동아리 교류전에 관한 개요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 안건이 통과되면 예산, 시간, 인원이 저번 스포츠 교류회보다 더 필요하겠지만, 허채아가 발표한 구상안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발표를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간 허채아가 두 손을 꼭 모은 게 보였다.
가결되길 바라는 것 같았다.
허채아의 옆에는 하필 계이담 그 악플러가 앉아 있었는데, 꼴에 같은 학년이라고 말을 거는 게 보였다.
허채아는 저 쓰레기와 친분이 있는 건지 대화를 하며 긴장을 푸는 듯했다.
‘허채아가 사람 보는 눈은 없구나!’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다지만 계이담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안다인의 팬이었다던 저 쓰레기는 허채아가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는지는 아는 걸까?
허채아는 비중이 그리 큰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니었다.
‘계이담은 허채아가 플마고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전혀 모를 거다.’
한탄하는 사이 투표 집계가 끝났다.
결과는 가결.
허채아의 안건은 규모가 워낙 크고 준비 과정이 복잡했기에 홍보 대사 건에 비해 찬성표가 적긴 했으나 어쨌든 안건이 통과되었다.
“다음은 입학시험 실기 시험에 안내역 배치 건입니다.”
이번 건은 찬반 투표 대신 참가 의사를 묻는 투표를 진행했다.
학교가 넓다 보니 시험을 치르러 오는 학생들이 길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안내역 배치는 필수였다.
에어 셔틀에 태워 시험을 치르는 건물 앞에 학생들을 바래다주긴 하지만, 잠시 바깥 공기를 쐬다가 혹은 화장실을 갔다가 미아가 되는 중학생들이 매년 나온다고 한다.
‘곧 은호와 후예들이 시험을 치르겠구나.’
안내역에 관한 개요를 설명하던 염준열은 조금 무거운 목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작년 시험 때 웅족의 습격으로 수험생들이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안내역은 2인 1조로 구성할 예정이니 부디 많은 참여 바랍니다.”
작년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올해에는 무장한 상태로 안내역을 맡길 생각인가 보다.
즉 학교의 경비 겸 안내역이 되는 셈이다.
흑막이 이번 시험을 노릴 것 같진 않지만, 나는 주저 없이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표를 던졌다.
시간이 안 맞는 이들 외엔 대부분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표해 인원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안내역에는 자치 기구 소속원 외에도 일반 학생 중에서 더 선발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 반 애들한테 같이 하자고 할까…….’
소소하지만 알바비도 나온다는데 목우람한테 말하면 되지 않을까?
목우람의 기동성이나 실력을 생각했을 때 적임일 것 같다.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염준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 안건은 올해 크리스마스 이벤트 건입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