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바꿀 수 없는 것 (1)
12월 은광고의 주요 행사를 꼽자면 크게 네 개다.
첫째, 신입생 입학시험.
둘째, 1, 2학년 기말고사.
셋째, 은광고 축제.
넷째, 크리스마스 행사.
은광고 축제와 크리스마스 행사의 차이점은 개방성의 여부다.
은광고의 구성원들과 그 화제성들 탓에 역대 학교 축제에 크고 작은 사건이 잇따랐고 그러다 보니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하게 되었다.
은광고 축제는 어디까지나 은광인의 축제로, 은광고 재학생과 졸업생, 초대권을 얻은 가까운 지인들만 출입이 가능해 다소 폐쇄적으로 진행된다.
초대권을 받아도 사전에 심사에 응해서 입장 허가를 받아야 하므로 입장이 까다롭다.
‘축제는 안전해. 문제는 크리스마스야.’
대중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일까, 매년 은광고에서는 대중에게 공개된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열렸다.
크리스마스 이벤트는 초대권 없이 선착순으로 입장이 가능했고 출입 심사도 다소 완화된 기준으로 진행되었다.
플마고 팬 사이에서 속칭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으로 불리는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에서는 그 은광고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배경으로 했다.
플마고 속 주수혁과 안다인이 은광고에서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
정확히는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이틀간 학생 자치기구는 자선 이벤트를 준비했고, 이는 전례 없는 최악의 대참사로 이어졌다.
‘축제 기간에는 은광고의 교사진, 졸업생들이 많으니 크리스마스 시즌을 노린 거겠지.’
크리스마스 이벤트에도 은광고 교내에 교사가 있고, 졸업생들도 방문하긴 하지만 축제만큼은 아니다.
정규 학사 일정 중 하나인 축제 기간에는 대부분의 교사가 출근하는 것과 달리 크리스마스는 휴일이다.
축제 때 얼굴을 비친 졸업생들은 보통 크리스마스 이벤트에도 학교를 방문하진 않는다.
게다가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려는 이들도 많다.
그렇기에 학생을 타깃으로 한다면 경비도 허술해지고 은광고의 전력이 약해지는 크리스마스를 노리는 게 제격이었다.
참 비열하고도 교활하며 철저한 한 수였다.
‘자선 이벤트를 노린 덕에 희생자들 대다수가 선인이었어.’
물론, 자선 이벤트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악인이고, 참가한다고 해서 선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때 유학 중이던 염준열, 지방으로 출장 간 천동하, 최편득의 수작으로 해외에 있던 임연화, 함근형 선생님 같은 케이스도 있으니까.
그러나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당시 학교에 등교해 자선 이벤트에 참가한 이들 대부분은 여러 사건 속에서도 선의를 잊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 덕에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끝난 후 학교 분위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밝았던 이들이 죽거나 크게 다치거나 동급생, 후배, 선배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절망했으니까.
사실 사망자 대부분이 졸업을 앞에 둔 3학년 학생들이었고, 곧 신입생이 입학했기에 은광고 전교생 수는 크게 줄지 않았다.
하지만 ‘퍼스트 크리스마스’는 은광고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꿨고, 얼마 남지 않은 플마고 유저들의 멘탈을 박살 냈다.
그리고 지금, 학생 대표 회의에서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관해 논하려 하고 있다.
“은광고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대중과 함께하는 이벤트를 개최했습니다. 올해도 학생 자치기구를 중심으로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기획할 예정입니다.”
내가 이 세계에 와 여러 수를 두며 많은 것이 변했다.
플마고 때와 달리 현재 학생 대표 회의에는 공석이 없고, 곽경구가 서 있던 자리에 염준열이 있는 것처럼 학생 대표단의 구성원이 달라졌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것도 존재했다.
‘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바꾸기 힘들어.’
교내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중단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황지호의 힘을 이용하면 다소 반발은 있더라도 학생들이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개최하긴 힘들어질 거다.
아니면 학생 대표들을 설득해 이벤트 개최 장소를 은광고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바꾸는 방법도 있다.
염준열과 천동하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면 내 말에 바로 찬성해 줄 것 같았다.
계이담은…… 뭐, 그놈의 의견 따위는 아무래도 좋긴 한데 별문제는 없을 거다.
그 악플러가 쓴 악플 내용 중에는 ‘퍼스트 크리스마스’를 까는 것도 많았으니 잊어먹진 않았을 거다.
장소를 옮긴다고 하면 얌전히 닥치겠지.
허채아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이미 넷 중 셋이 승낙한 상황이라면 반대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이렇게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를 피할 방법은 여러 가지 존재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벤트는 반드시 그날 은광고 내에서 개최되어야 했다.
‘이미 흑막의 준비는 끝나 있어.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억지로 막으면, 다른 때를 노려 은광고에 삿된 눈을 뿌리겠지.’
크리스마스가 닥치기 전까지 흑막을 일소한다면 모를까, 이벤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 이벤트를 중단시키거나 장소를 바꾸면 흑막은 내가 알 수 없는 시기와 장소를 노려 삿된 눈을 뿌릴 것이다.
삿된 눈이 내리는 현상 자체를 막으려면 극단적으로 흑막을 잡는 그날까지 은광고를 비롯한 흑막이 노릴 만한 모든 장소를 폐쇄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한반도 내의 모든 단체활동을 아무 근거도 없이, 기약 없이 중단시켜야 할 텐데 그건 불가능해.’
크리스마스 이벤트는 개최될 것이고 은광고에 삿된 눈이 내릴 것이다.
이 세계에 온 순간부터 각오를 굳히고 있었는데, 막상 눈앞에서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보니 손끝이 점점 식는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나오니 회의실 전체가 들뜨는 것 같았다.
사건 사고가 있긴 했지만, 플마고 때와 달리 이 세계에서 목숨을 잃은 은광고인이 없어서 그런지 학생들은 별 근심 없이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특히 은광고에서 첫 크리스마스를 맞는 1학년 학생들은 크게 들떠 있는 눈치였다.
“반에서 준비한 축제 기획 중에 2순위로 못 한 거 있는데, 그거 해야겠다.”
“축제도 하는데 굳이 크리스마스 이벤트까지 따로 해야 해?”
“그래서 넌 안 올 거임?”
“올 거임.”
염준열이 이벤트 후보안을 설명하는 사이 여기저기에서 작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염준열이 제시한 후보들은 거의 비슷비슷했다.
굳이 따지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어디에 기부를 하느냐의 차이가 존재했다.
“우리 반은 인원수가 적어서 축제 때 했던 거 크리스마스 이벤트 때 재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의신아?”
조금 멍하니 있다가 김유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리스마스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당시 눈 속을 뚫고 안다인을 찾던 김유리가 문득 겹쳐 보였다.
수척하고 어두운 인상의 게임 속 김유리와 달리 눈앞의 김유리는 밝은 표정에 혈색도 좋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지금 이 세계가 플마고의 전개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실감이 났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 시나리오처럼 흘러가게 하진 않겠어.’
크리스마스에 학생들이 은광고에 머무는 걸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학교에서 벌어질 사건의 내용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식었던 손끝이 다시 온기를 찾는 것과 동시에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김유리에게 답했다.
“후보안들이 다 괜찮아서 어느 쪽을 고를지 고민하던 중이었어.”
“아, 그건 그래. 학생회에서 후보안 고를 때에도 엄청 고민했는데…….”
김유리는 다정하게 웃으며 학생회의 후보안 선정 과정에 관해 말해 줬다.
염준열의 설명에 덧붙여진 김유리의 조언을 바탕으로 투표를 마쳤다.
투표 결과, 이번 은광고의 크리스마스 이벤트는 소년 소녀 가정을 후원하는 자선 이벤트로 결정되었다.
“이상으로 4/4분기 학생 대표 회의를 마칩니다.”
크리스마스 안건 외에도 몇몇 자잘한 사항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친 후, 염준열의 선언으로 올해 마지막 학생 대표 회의가 종료되었다.
염준열의 말이 끝나자 3학년들이 크게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염준열은 긴장이 풀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티는 안 냈지만 학생회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한 게 처음이라 좀 떨렸나 보다.
염준열 외에도 학생 대표 회의를 진행한 2학년 대표와 간부들은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흠잡을 곳이 없어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다들 첫 회의 진행 중에 실수할까 봐 꽤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나도 박수를 보내며 2학년 대표들이 첫 회의를 무사히 마친 걸 축하했다.
이 박수는 축하인 것과 동시에, 다시는 학생 대표 회의에 참가하지 못할 3학년들을 향한 작별 인사이기도 했다.
학생 회의를 마치고 회의실을 나갈 채비를 할 때였다.
“진짜 뒤풀이 안 갈 거야? 그렇게 바빠?”
지명수가 도원우를 툭 치며 턱짓했다.
김유리의 말에 의하면 이제 3학년 기말고사도 끝났겠다, 각 학생 자치기구에선 3학년들과 함께 놀러 갈 예정인 듯했다.
아마 그건 학생회도 마찬가지인 듯했는데, 보아하니 도원우는 불참 의사를 밝힌 것 같았다.
도원우가 TC 일로 많이 바쁠 테지만 기말고사도 끝났으니 학생회 사람들과 저녁 정도는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도원우는 지명수의 말에 바로 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머뭇거리는 걸 보니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도원우가 답하기 전, 유상희가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원우야, 오늘 못 온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야?”
유상희의 말투에서는 한 점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유상희가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TC에 원망하는 마음이 남았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유상희는 도원우와 TC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모양인 듯했다.
도원우는 가만히 유상희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먼저 간다.”
유상희에게 짧게 대답한 도원우가 지명수에게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비웠다.
지명수는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유상희는 웃으며 도원우를 배웅했다.
유상희가 조금 길게 도원우의 뒷모습을 응시한 것 같기도 했다.
“수상한 부반장님아, 지금 저쪽도 심각하지만 이쪽도 심각함요.”
내 생각을 끊은 건 문새론의 목소리였다.
문새론은 선도부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도부 학생들은 다 같이 뒤풀이를 갈 생각인 듯했는데, 문새론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서 주수혁이 오혜지 옆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눈에 띄었다.
문새론은 손가락을 움직여 이번에는 그 광경을 아련한 얼굴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는 안다인을 가리켰다.
문새론은 한 마디도 안 하고 답답해하며 인상을 구겼지만, 상황은 바로 파악이 갔다.
주수혁은 오혜지를 친누나처럼 여기고 있는 데다가 안다인이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지도 못하고 있으니 오해를 사리라는 발상을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플마고에서는 오해할 상황이 만들어질 환경이 안 됐으니 이럴 일이 없었는데,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다인이한테는 내가 말해 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음…… 오해를 얼마나 풀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유리가 바로 도움의 손길을 뻗어 왔다.
나와 문새론이 겨우 안심하고 해산하기 전, 유상훈이 한마디 했다.
“회의할 때 보니까 뭔 일 있는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
“뭐가.”
“아니면 됐다.”
유상훈은 할 말만 하고 휙 가 버렸다.
유상훈은 매번 회의 때마다 졸지 않았나?
졸다가 개꿈이라도 꾼 건지도 모르겠다.
“의신아.”
혼자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때 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오늘 늦게 시간 내 줄 수 있어?”
나를 불러 세운 건 전 지익회장, 성시완이었다.
그 옆에는 계이담도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