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바꿀 수 없는 것 (3)
용제건은 내가 인사와 용건을 입력하기 전에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진족들이 평균적으로 인류에 비해 반응 속도가 현저히 빠르긴 하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니면 그저 아직도 망설이느라 내 손이 느려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용제건] 의신아, 안녕.
[용제건] 기다리고 있었어! ^^
좋은 일로 연락한 것도 아닌데 용제건은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용제건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용제건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확인한 순간 메시지 창을 끄고 도망쳤을 거다.
용기를 내서 답장을 하기로 했다.
[나] 안녕하세요,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용제건] 응, 물론이지. 지금 은광고로 갈까? 바로 갈 수 있어! ^^
여기로 오라는 게 아니라 디바이스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통화를 하자는 뜻이었는데.
용제건은 지금 당장 학교로 와서 리플레이를 받을 생각인가 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말을 하는 게 나을까?
하지만 바로 그러겠다고 답할 수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호랑이들한테 말하지 않았는데.’
냉정하게 따지면 용제건에게 리플레이를 사용하는 건 호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굳이 따지면 용제건과 호족과의 관계가 없는 건 아니다.
용제건이 은광고의 교사라는 점, 용족이 호족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점, 용제건이 김신록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점 등이 호족과 용제건이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이상하게 이대로 용제건에게 리플레이를 사용하기에는 호랑이들이 눈에 밟혔다.
‘……내일 황지호에게 리플레이를 할 장소를 빌려달라고 할까?’
필요한 건 장소뿐만이 아니다.
리플레이가 발동하기 위해선 선택 대상자의 수면이 필요하다.
용제건에게는 웬만한 수면 유도 아이템은 통하지 않을 테니, 향록이 조제한 수면 향이 필요할 거다.
김신록과 적호에게 리플레이를 사용할 때에는 황지호가 직접 수면 향이 담긴 향로를 다뤘는데 이번에도 황지호에게 부탁해 보면 어떨까.
황지호는 분신을 여럿 굴리니 갑자기 약속을 잡아도 시간을 낼 수 있겠지만, 어쩌면 내일은 일정이 있어서 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결심을 했는데도 리플레이를 미루는 핑계만 찾고 있네.’
그래도 저런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 있어서 오류는 없다, 아마도.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한 후에야 겨우 디바이스에 메시지를 입력했다.
[나]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나] 내일 황지호와 이야기한 후에 일정을 정해도 괜찮을까요?
[용제건] 준비가 필요한가 보구나. 난 언제든 괜찮아.
용제건은 지금 내가 하려는 게 무엇인지, 어떤 준비가 필요하기에 황지호와 상담하려는 건지 묻지 않았다.
뜸을 그렇게 들였는데도 용제건은 추가 질문을 던지거나 독촉도 하지 않고 기분 좋게 메시지를 끝냈다.
눈치 빠른 용제건은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는 걸 알아챈 거다.
[용제건] 내일 보자, 의신아. 잘 자.
[용제건] ^^
용제건의 인사를 끝으로 메시지 창을 껐다.
모처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잘 자라고 인사해 줬는데,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적막한 기숙사 방에서 한참을 뜬눈으로 있다가 새벽 즈음에 꿈 없이 잠들었다.
* * *
늦은 밤, 성시완과 계이담이 선도부 회관을 빠져나왔다.
성시완은 눈에 보이게 초췌해져 있었고, 계이담은 그런 성시완을 부축하는 중이었다.
선도부 회관에서 멀어진 후에야 성시완이 온전히 제힘으로 걷기 시작했다.
“미안, 이담아. 이제 내가 걸을게.”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성시완은 괜찮다고 했지만, 척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지익회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한 후, 성시완은 곧바로 선도부 회관 아래의 비밀 통로로 향했다.
조금 이른 시각이었으나 선도부원들은 회식 중이라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라 눈에 띄지 않고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이 등장하자 옛 한국 지부장의 AI가 의아하게 여겼다.
[그 아이가 너를 여기에 보냈다고?]
―네, 크리스마스이브까지 보스 룸을 클리어하라는 미션을 받았어요.
[데이터 해석은 마친 건가?]
―해석을 마치고, 관계자와도 이야기를 끝냈다고 들었어요.
옛 한국 지부장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생각을 한다기보다는 AI가 긴 연산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겠지만, 어쩐지 그는 이 자리에 없는 조의신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군, 알았다.]
연산을 마친 듯 옛 한국 지부장이 호전적인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저 표정을 보니 성국언과 옛 한국 지부장이 혈연관계라는 게 실감이 났다.
[재도전을 허락하마. 나를 쓰러뜨려 봐라!]
방식은 이전처럼 1대1 .
저번에 제안한 룰과 달라진 게 있다면, 몇 번이고 재도전해도 된다는 점과 도전 후 조언을 해도 괜찮다는 점이었다.
옛 한국 지부장의 이능이 성시완에게 이미 노출된 상태라서 그런지, 그의 공격은 예전보다 더욱 매서웠다.
정신 공격에 한하지 않고 의식이 현실로 돌아올 때를 노려 물리적인 충격을 가하니 성시완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정신 공격만으로도 성시완은 금방 피폐해졌는데 이능을 다뤄 싸워야 하기까지 하니 손을 쓸 구석이 없었다.
성시완이 몇 차례 도전한 후에 옛 한국 지부장이 축객령을 내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저는 더 싸울 수 있어요! 부탁드립니다.
성시완이 부탁했으나 옛 한국 지부장은 차갑게 답했다.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냉혹한 말이었다.
[그 아이가 너를 보낸 건, 너를 쓸 수 있는 패로 만들기 위해서다. 망가뜨려서 보낼 수는 없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성시완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성시완은 하룻밤 자고 나서 바로 재도전할 기세였는데, 계이담이 이를 적극적으로 말렸다.
“……회복할 때까지 재도전은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성시완은 자신이 클리어할 때까지 계이담이 도전하길 원치 않는 눈치였다.
비록 성시완이 옛 한국 지부장에게 크게 패배했다고 하나, 그가 계이담보다 강자인 건 변함이 없었다.
성시완은 먼저 공략을 한 후 힌트를 얻어 계이담의 부담을 줄여 줄 생각인 듯했다.
계이담은 성시완의 그 말을 따르기로 했지만, 그가 무모한 도전을 반복하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계이담의 말에 성시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대로라면 이기기 어렵겠지.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계이담은 사과하는 성시완에게 공연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를 억눌렀다.
지금 가장 분한 게 성시완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계이담은 화제를 돌릴 겸 물었다.
“그분이 어떤 능력을 사용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야기하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계이담은 성시완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며 주거 구역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아침에 학급별로 축제 일정과 준비를 하라는 공지가 내려왔다.
비록 축제 전에 기말고사가 있긴 하지만, 학교 전체가 들뜨기 시작했다.
모든 시험을 마치고 진로가 확정된 3학년들은 특히 축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비록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긴 하지만 우리 반도 마찬가지였다.
등교하자마자 옹길동이 보낸 테마파크 기념품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아이들은 얼마 안 있어 학교 축제를 화제로 삼았다.
“미안, 내가 일찍 준비했어야 했는데…….”
“아냐! 유리는 과외 때문에 많이 바빴잖아.”
우리 반은 인원수가 다른 반에 비해 적다.
그 적은 아이들이 등교도 잘 안 한다.
등교를 하고 있는 아이들도 바쁘다.
김유리는 죽호로부터 과외를 받아야 하는 데다가 학생회 일도 있다.
“이번 축제는 돕기 어려울지도 몰라. 현악부에서 발표회가 있어서…….”
“미술부랑 동양화 소모임에서 합동전을 준비하는 중인데, 오랜만에 하는 전시회라 준비할 게 많아.”
권레나와 민그린은 부 활동으로 학급 축제 준비에 참가하기 어려웠다.
부 활동을 하지 않는 아이들도 꽤 바빴다.
송대석은 협회 일로, 구슬비와 옹길동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관종 짓을 하느라 바쁜 듯했다.
“도인…… 스승님한테 미리 말하면 시간 낼 수 있긴 한데.”
“알바를 두 개 그만두면 될 것 같군요.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맹효돈은 요새 훈련에 나오지 않는 방윤섭 몫까지 훈련 중이다.
맹효돈이 말은 저렇게 하지만, 하나 남은 제자도 훈련에 임하지 않으면 탁 도인이 매우 섭섭해하지 않을까?
그리고 목우람은 알바를 두 개나 그만두게 하면 생계가 위험해질 것 같은데.
“태호권 소모임에서는 시연 행사를 할 예정인데, 평소 하던 걸 하는 거라 괜찮아.”
“태호권 소모임에 일손 부족하면 말해, 한이야. 도우러 갈게!”
“하하하하! 이 몸도 도우러 가겠다.”
“…….”
저 모습을 보니 한이, 독고미로, 황지호는 비교적 한가한 듯했다.
신문부에서는 축제 때에는 교내의 행사 취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올해 신문부에서 낸 기사 중 화제를 모았던 기사를 출력해 전시전을 열 계획이긴 한데, 딱히 준비할 게 없어 시간이 많이 필요하진 않을 거다.
결국 시간을 낼 수 있는 건 저 셋과 나, 사월세음 정도다.
다섯 명이서 축제를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올해 학생회에 입부한 사람이 많아서 내가 빠져도 괜찮을 거야. 앞으로는 학급 활동에 집중할게!”
김유리가 반 아이들의 말을 듣고 반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위기감을 느낀 것 같았다.
김유리가 무리해서 시간을 낸다면 여섯.
여섯이서 큰 프로젝트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다른 분도 등교했으면 좋을 텐데요. 아쉬워요.”
사월세음의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축제 전 첫 회의가 끝났다.
반 아이들도 그 말에 동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점심시간.
나는 황지호를 불러내 용제건의 리플레이 건에 관해 말했다.
내 말을 조용히 듣던 황지호가 답했다.
“아침부터 상태가 묘해 보이더니 그런 걸 신경 쓴 건가. 걱정이 많군. 들으나 마나 네 걱정이 아니라 용제건 걱정을 하고 있는 거겠지.”
용제건에게 리플레이를 사용하는 데에 왜 내 걱정을 해야 하는가.
내가 용제건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황지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는 것처럼 혀를 한 번 차고 말했다.
“용제건은 저래 보여도 용의 비늘보다 단단한 심줄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용제건 걱정은 하지 말고 그 리플레이를 써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용제건의 정신력이 얼마나 우수한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과 리플레이를 쓰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결국 정보를 얻기 위해 리플레이를 쓰겠지만.
“정보를 유효하게 활용하려면 최대한 빨리 손에 얻는 게 좋겠지. 용제건은 한가할 테니 오늘이라도 부르는 게 좋겠군.”
말수가 적어진 나를 두고 황지호가 운을 뗐다.
황지호는 멋대로 용제건에게 연락을 넣었는데, 용제건은 흔쾌히 오늘 당장 시간을 내겠다고 답변을 보냈다.
그렇게 오늘 방과 후, 용제건에게 리플레이를 사용하게 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