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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33화 (531/925)

75. 바꿀 수 없는 것 (7)

망사 베일 사이로 보이는 비탄의 웅녀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다.

용제건은 저도 모르게 그 어두운 얼굴에서 유일한 친우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비탄의 웅녀의 고혹적인 눈매에서 친우와 닮은 꼴을 찾은 용제건이 잠시 그리운 기분에 잠겼다.

그리움에 이어 느낀 감정은 의심과 분노였다.

용제건이 김신록의 부활을 복수보다 우선시하고 있다고 하나 이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웅녀 씨가 만약 적호 씨와 신록이의 목숨 중 하나를 택한다면 적호 씨 쪽을 택하겠지.’

김신록을 살해한 건 웅족의 권속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웅족이 자랑하는 최대 전력 중 하나가 용제건의 눈앞에 서 있다.

비록 비탄의 웅녀가 자진하여 김신록의 살해에 가담할 이유는 없었지만, 적호가 연관되어 있다면 모른다.

용제건은 비탄의 웅녀가 적호의 생명과 안전이 걸리면 얼마나 비정해질 수 있는지 잘 알았다.

비탄의 웅녀를 응시하는 퀭한 용제건의 눈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비탄의 웅녀 씨, 오랜만이야.”

“…….”

비탄의 웅녀에게 인사하는 용제건의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 반가움과 다정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그 음성을 들은 비탄의 웅녀는 물 흐르는 듯한 몸짓으로 실크 부채를 펴 들어 방어 태세를 갖췄다.

웅녀는 둘은 실성하고 셋은 깊은 잠에 빠진 진웅팔선 사이에서 살아남은 기재(奇才)다.

그녀의 본능이 위험을 고하고 있는 듯했다.

용제건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당신은 아들의 장례식에 불참할 정도로 많이 바빴지. 올해 유독 호족의 신역에 사건이 많았는데 어느 사건에 당신이 개입한 걸까.”

용제건의 시선이 붉게 칠해진 비탄의 웅녀의 손톱에 닿았다.

웅녀의 손톱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이능파가 깃들어 있었다.

용제건은 저 손톱이 과연 자신의 공간을 뚫을 수 있을지, 그사이에 웅녀에게 얼마나 데미지를 줄 수 있을지 계산했다.

대치 상태를 깬 건 웅녀의 목소리였다.

“그가 그 아이의 복수를 위해 무모하게 움직이고 있어. 난 그걸 원치 않아. 그럴 원인을 제공한 적도, 할 생각도 없어.”

그녀의 음성은 용제건이 기억하는 것보다 가늘고 나직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느라 목이 쉬었을지도 모른다.

비탄의 웅녀의 말에 용제건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비탄의 웅녀가 아들을 죽일 리가 없다고 감정적으로 주장하는 것보다, 적호의 안전을 위해 아들의 암살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용제건은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로 비탄의 웅녀를 지켜봤다.

“그 아이의 건에 진웅팔선은 개입하지 않았어.”

용제건은 그 말이 사실이라고 판단했으나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진웅팔선이 그 건에 개입하지 않았을 뿐, 비탄의 웅녀가 단독으로 연관되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용제건은 제 의심을 입에 담지 않았다.

어차피 용제건은 지금 이 자리에서 웅녀가 하는 말의 참, 거짓을 판별할 수 없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선 상대가 한 마디라도 말을 더 하게 하고, 다소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용제건은 속내를 감추고 가면을 쓴 것처럼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랬구나. 웅녀 씨, 그럼 무슨 일로 온 거야? 재미있는 일을 알려 주려고?”

둘은 먼 옛날 거래했다.

용제건이 웅녀의 아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대신, 웅녀는 용제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용제건은 웅녀의 아들이 사망하기 전까지 변함없이 호의를 보였으니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내 호의가 신록이의 죽음을 되돌릴 만큼은 충분하지 않지만.’

용제건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보며 비탄의 웅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진홍색의 입술에서 아주 작게 한숨이 흘러나온 것 같았다.

마치 안쓰러운 걸 보고 한탄하는 것 같은 한숨이었다.

비탄의 웅녀는 부채 뒤로 한숨을 숨기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와 연이 있는 마족(魔族)과 거래를 했어.”

“거래?”

“내가 제작한 아이템을 대가로, 은광고의 결계를 깬 자에 관해서.”

은광고의 결계는 12지 동맹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용족은 12지 동맹의 일각이다.

용제건은 용족의 제반 사정에 그리 밝지 않은 편이나 은광고의 교사로서 일단 결계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진웅팔선이 힘을 모아도 그렇게 단시간에, 흔적 없이 결계를 해제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았다.

‘결계를 깬 자는 12지 동맹의 수장 중 하나겠지. 만약 웅녀 씨가 이번 건과 무관하다면 지금 그 배신자를 찾는 중일 거고.’

용제건은 비탄의 웅녀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평소의 용제건이 이런 국면을 맞이했다면, 좀 더 즐기기 위해 말장난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용제건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에 바로 직설적으로 물었다.

“마족에게 무엇을 건넸지? 그자가 누구지?”

“무엇을 건넸는지는 말할 수 없어. 그자의 정체는 듣지 못했어.”

그 대답에는 아무 정보도 담겨 있지 않았다.

비탄의 웅녀가 한 거래에는 상당히 제약이 많은 듯했다.

용제건은 의심을 접지 않으면서도, 비탄의 웅녀가 한 말이 모두 진실이었을 경우를 가정해 생각해 봤다.

‘적호 씨를 위해서인가.’

적호는 매우 위태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적호는 아들의 사망을 계기로 황호와 연을 끊은 듯했다.

원래 호족 내에서 적호의 입지는 그리 좋지 않았는데, 황호의 비호까지 사라진 셈이다.

적호는 신화 시절에 웅족의 수뇌부를 궤멸시킨 적이 있다.

웅족은 뒷배가 사라진 적호를 노릴 게 틀림없었다.

이런 와중에 적호가 아들의 복수에 눈이 멀어 있으니 언제 허를 찔려 죽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비탄의 웅녀가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해도 여전히 의심스러운 점이 많아.’

적호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면 비탄의 웅녀는 무엇이든 내놓았을 텐데, 그럼에도 그리 시원치 않은 정보를 얻었다.

웅녀는 적호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불리한 거래에 응한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긴 했으나 용제건은 비탄의 웅녀를 향한 의심을 놓지 못했다.

용제건은 그의 친우가 사라진 이후부터 도통 밝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후후, 이 말만으로는 당신의 신뢰를 사긴 어렵겠지.”

비탄의 웅녀가 자조하는 듯한 웃음을 뱉었다.

“내가 알아낸 건 그자의 다음 타깃과 방법이야.”

그 말을 들은 용제건은 흥미를 잃었다.

의심도, 긍정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비탄의 웅녀가 쥔 단서는 직접적인 복수로도, 친우의 부활과도 이어지지 않았다.

비탄의 웅녀가 들고 온 단서를 파고들면 배신자의 계획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면 배신자의 척결과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용제건은 지금 그런 일에 혼과 기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때, 예상치 못한 말이 용제건의 정신을 붙잡았다.

“그자는 용왕신의 무녀와 손을 잡고 용궁에 손을 쓰고 있다고 해.”

용왕신의 무녀, 용궁.

그 말을 들은 용제건은 비탄의 웅녀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비탄의 웅녀가 불세출의 기재라고 한들 용족과 붉은 사자 팀원들의 보호하에 있는 한, 용왕신의 무녀와 접촉할 수 없었다.

하물며 청룡과 황룡의 용새(龍璽)를 얻거나 용왕신의 허락을 받아 용궁에 가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비탄의 웅녀는 용족의 사정을 캐기 위해 용제건에게 접근한 듯했다.

용제건은 차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증거는?”

“…….”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비탄의 웅녀가 갖고 있는 단서는 오로지 그 마족의 언질뿐인 듯했다.

매우 불리한 계약을 하고도 빈약한 단서를 얻은 비탄의 웅녀.

용왕신의 무녀와 용궁까지 얽혀 있는 사안.

그리고 그걸 알고 있는 마족의 존재.

‘설마 은광구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의 정체는 마족이었나.’

용제건의 친우의 죽음에는 크고 복잡한 계산과 수가 깔려 있는 듯했다.

지금 ‘비탄의 웅녀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지만.

용제건은 계산을 멈추기로 했다.

어차피 그 뒤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한들, 지금 용제건이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친우의 부활이었으니까.

“정체 모를 마족과 웅녀 씨가 한 말만을 믿고 동족을 의심하고, 내가 할 일을 미룰 생각은 없어.”

“……그래.”

용제건이 거절하자 비탄의 웅녀는 두말없이 물러났다.

처음부터 용제건이 거절하리라고 예상한 듯했다.

비탄의 웅녀는 물러나기 전, 베일과 부채를 거두고 얼굴을 드러내 용제건을 바라봤다.

“그 아이의 유일한 친우가 이리도 슬퍼하는데, 해 줄 수 있는 게 없구나.”

측은해하는 목소리를 끝으로 비탄의 웅녀는 사라졌다.

용제건은 이제 다시는 비탄의 웅녀와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예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얼굴을 더 봐 둘 걸 그랬나.’

마지막엔 비탄의 웅녀가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던가.

친우와 닮은 얼굴을 떠올리며 용제건은 조금 후회했다.

개학한 후, 은광고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했다.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재기 불능이 되거나, 죽어 나갔다.

‘오늘도 아무도 없네.’

1학기가 끝날 무렵, 용제건은 아무도 없는 체스 소모임 부실에 와 있었다.

용제건이 고문으로 있는 체스 소모임, ‘스테일메이트’에서 개최하기로 한 행사가 모두 취소되었다.

사건에 휘말려 친구, 선후배를 잃은 체스 소모임 회원은 탈퇴하거나 말없이 부 활동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 부원 수가 적은 소모임이었으나 이렇게 와해될 줄은 몰랐다.

‘은광고 학교 부지가 이렇게 넓은데, 이상하네. 갈 곳이 없는 기분이야.’

용제건은 아무도 없는 부실에 나가 체스 피스에 둘러싸여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교원 계약에 따라 용제건이 학교에 있을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갈 곳이 없었다.

지익회에서 교직원 사택에 있는 김신록의 방을 그대로 두어 용제건이 몇 번 방문해 국화꽃과 곶감을 두고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김신록의 방에서 용제건이 즐겨 마셨던 용정차와 다기를 발견한 후에는 이상하게 그곳으로 향할 수 없었다.

‘……청룡이 요새 은광고를 그만두거나 휴직하고 좀 쉬라고 했었지.’

아끼는 후예는 해외에서 유학 중이고, 유일한 친우는 더 이상 없었다.

그가 이끌던 소모임도 해산 직전이었다.

사정을 아는 이들의 눈에 용제건은 언제 은광고를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용제건은 단 한 번도 결근하지 않고 학교에 나갔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대화하고, 가끔 장난질을 치기도 했다.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혼자 있을 때에는 웃을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것, 이능파가 회복될 때마다 친우의 부활을 위해 소원을 빈다는 것 정도였다.

‘괜찮은 애들이 있으니까 학교에 남아서 좀 더 지켜볼까.’

무기력한 용제건의 눈에도 제법 괜찮아 보이는 1학년 아이들이 있었다.

공동 수석을 차지한 주수혁과 안다인.

두 사람은 우수한 데에다 인간적인 매력이 넘쳤다.

만약 용제건에게 친우의 부활이라는 최우선 순위의 목표가 없었다면 저 아이들을 관찰하고 싶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아주 가끔, 손이 빌 때마다 사건에 휘말리는 두 사람을 돕곤 했다.

“용제건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아무도 없는 부실을 나왔을 때, 주수혁이 용제건에게 인사했다.

주수혁은 방금까지 선도부 건물에서 일을 하다 나온 듯했다.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청소년 수련회가 예정되어 있어 각 자치 기구가 일정 조정과 기획으로 바쁜 듯했다.

“얼마 전에 무녀 후보생이라는 아이를 만났어요.”

“무녀 후보생? 용왕신의 무녀 말하는 거야?”

“네, 어린이날 사건 추모식에서 만났어요. 혹시 만나시면 안부 전해 주세요.”

어린이날 사건이라면 용제건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용족 중 한 명이 주오 드래곤즈의 초청으로 시구를 하고 바로 귀가했는데, 그 후에 이계가 발생했다.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여 추모식을 했고 그 추모식에는 그날 시구를 한 관계자로서 용족도 몇 명 참석했다.

주수혁은 그날 그 자리에 있던 당사자인 데다 주오 그룹의 인물이니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린 무녀 후보생이 넋을 기리는 춤을 춘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군. 거기에서 마주친 건가.’

주수혁으로부터 무녀 후보생에 관해 말을 들어서 그런 걸까.

용제건은 문득 용왕신의 무녀가 신경 쓰였다.

용왕신이 뭐라 하든 말든 무녀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지 않았는데, 한번 후보생의 이야기도 들어 볼 겸 만나 봐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녀들을 만나 볼까.’

용제건이 은광고를 벗어나 휘적휘적 교문으로 향했다.

은광고 학생들은 그가 비행술을 이용해 이동하지 않는 걸 이상하게 여겼으나, 흥밋거리를 찾느라 저러나 싶어서 자리를 피했다.

사실 용제건은 그저 이능파를 비행술에 사용할 기력이 없었을 뿐이었다.

걸어서 도착한 교문 앞, 용제건은 의외의 존재를 마주쳤다.

은광고의 이사장이자 호족의 수장, 황호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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