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은광고 입학 시험 (12)
이 셋에게는 큰 접점이 있었다.
‘셋 다 TC 그룹 관계자야.’
올해 들어 TC에는 여러 사건이 있었다.
계열 분리 찬반을 두고 벌어진 내분.
도시후를 조종해 사관학교 교류전에서 도원우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유상희가 얽힌 연구소 사건 등등.
그 결과 도씨 집안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충돌과 숙청의 결과, 도원우의 아버지인 TC의 차기 총수가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내분을 틈타 천씨가 TC 그룹 내의 영향력을 늘렸기에 또 분란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천동하는 그룹 사정에 엮이고 싶어 하지 않은 눈치인데…… 어쩔 수 없겠지. 천씨라는 성을 타고 난 데다 천은하 건으로 호족과도 엮였으니까.’
T와 C의 이혼 사건으로 도씨와 천씨는 갈라졌다.
이 사건에는 황명 그룹, 즉, 호족이 개입했었다.
황지호는 이 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T와 C의 이혼 사건에서 C 쪽에 힘을 실어 줬지.
―천씨 파벌이 이혼 사건 때 우리 쪽에 신세를 많이 졌지. ······우리의 힘과 천씨의 힘을 모두 이용할 수 있으니 TC 내부 정보를 얻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황명 그룹이 천씨를 도왔지만 TC 그룹의 현재 총수도, 차기 총수도 도씨다.
비록 이혼 사건을 계기로 기업과 자산이 쪼개졌으나 어쨌든 TC 그룹 자체는 건재하다.
표면상 이혼 사건의 승리자는 도씨로 보였다.
하지만 황지호는 이 결과에 만족했고 천씨는 황명 그룹에 신세를 졌다고 여겼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입장이던 천씨가 재산의 상당량과 핵심 계열사 몇 개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황지호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천씨는 망했을지도 몰라.’
호족은 ‘도천’이라는 이름이 탐탁지 않았기에 그들이 계속 싸우길 원했다.
그래서 일부러 패색이 짙은 천씨를 도와 어느 한쪽이 이겨 평화가 오는 걸 막았다.
도천 그룹이 TC 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황지호가 더 태만해지면서 손을 뗀 것 같지만 아직 천씨와의 인연은 남아 있는 듯했다.
즉, 호족이 천씨를 도움으로써 결과적으로 TC의 분열을 부채질한 셈이다.
‘상황이 그런데 한 명은 도씨, 한 명은 천씨, 남은 한 명은 호족의 초대 수장…….’
당장 서로에게 결투를 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조합인데, 셋은 사이가 좋아 보였다.
예전부터 도원우와 천동하는 사이가 좋아 보였고, 은호는 일어나자마자 천동하를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복잡한 마음으로 셋을 보고 있을 때, 도원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왜 거기에 있는 거지? 내려와라.”
전 학생회장인 도원우는 눈앞에서 0반 학생이 사고를 칠 기미가 보여 머리가 아픈 듯했다.
많이 추하긴 했으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데 의도치 않게 두통을 안겨 준 것 같아 얼른 내려왔다.
내 신체 능력을 고려하면 바로 뛰어내릴 수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바닥에 금이 갈 것 같아 두세 번에 걸쳐 벽을 차고 내려왔다.
내가 지상에 도착하자 은호가 말을 걸었다.
“의신이 형, 안녕하세요. 제가 기억하는 모습과 달리 건강해 보여서 기뻐요. 무리하시지 마세요.”
은호가 말하는 ‘제가 기억하는 모습’은 저번에 호랑이 저택에서 봤을 때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쩐지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사과할 뻔했다.
다행히 도원우가 먼저 말을 걸었다.
“조의신과 아는 사이였나?”
“네, 동하 형을 만나기 전에 연이 있었어요.”
“동하랑 만나기 전? 하지만 너는 병원과 연구소에 있었다고…… 아니, 입원하기 전이었나.”
“네, 예전부터 의신이 형에겐 많이 도움받았어요. 제가 감금 증후군에 걸린 후에는 연락이 어려웠지만요.”
은호는 분명 이전 세계에 있던 경험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이 세계의 천은하로서의 이력과 충돌되는 부분이 없었다.
실제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은호의 말씨에는 묘한 진정성이 느껴져 도원우나 천동하는 그 말을 듣고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원우도 천은하 건을 알고 있는 건가? 그야 TC 그룹의 자제인 데다 천은하가 은광고에 지원했으니 알 수밖에 없겠지만.’
도원우는 은호의 천은하로서의 이력을 파악하고 있는 듯 씁쓸해하는 얼굴을 했다.
이 세계의 천은하는 천동하의 이복동생, 그것도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기병을 앓아 감금 증후군에 걸려 있었다는 설정이다.
손이 귀한 천씨 집안에서는 서자를 들이는 경우가 많았기에 초상우주가 빈틈을 노려 은호의 가짜 신분을 만든 듯했다.
아무리 천씨 집안이 손이 귀하다 해도 건강하지 않거나 자질이 떨어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된다고 하는데, 초상우주는 은호에게 지나치게 위험한 신분을 주었다.
‘만약 성인이 되기 전에 천동하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천씨 집안에 의해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그걸 초상우주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천동하가 천은하의 존재를 알아채도록 손을 썼겠지만.
은호가 ‘심각한 오류’가 발생해도 괜찮다 했지만, 적합체 후보에게 가혹한 짓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 비록 상황이 이렇지만 동하는 내 인척이고 너도 마찬가지다. 늦게 알아서 미안하다.”
“원우 형…….”
“감사합니다, 도원우 선배님.”
도원우의 진중한 태도에 천동하와 은호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씨 집안의 위협이 될지도 모를 천씨 자제들을 상대로 저렇게 말을 해 주다니, 과연 은광고를 이끌었던 전 학생회장의 배포는 남달랐다.
“앞으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해라.”
“원우 형이 돕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하겠지만, 만약의 경우엔 부탁드릴게요.”
“동생이 생겼다고 형 흉내를 내네.”
도원우와 천동하는 격 없이 웃으며 농담을 나눴다.
대화를 듣다 보니 천동하는 도원우에게 은호를 소개해 주려고 이 자리에 부른 듯했다.
천동하가 도원우 도움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어쨌든 도원우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천씨 집안 서자인 은호의 입장을 생각하면 아는 유력자가 늘어나면 나쁜 일은 아닐 거다.
그런데 은호는 곧 실기 시험을 치르는 시간 아닌가?
은호는 내 의문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제가 시험을 치르는 체육관이 1학년 구역에 있어서 온 건데, 의신이 형과 마주쳐서 다행이네요.”
“맞아. 의신이는 은하 사정을 알고 있어서 원우 형하고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내가 천씨 집안 사정을 안다는 말에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도원우는 말을 바로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너한테는 빚을 많이 졌다. 고맙다.”
도원우가 빚이라고 칭한 건 어느 사건을 가리키는 걸까.
그냥 해야 할 일들을 했던 것뿐이라 뭘 빚이라고 칭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데 문제는 빚이 아니었다.
‘도원우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예전에 해군 커리큘럼을 듣겠다고 동해 바다에 뛰어들던 도시후가 함근형 선생님께 잡힌 적이 있다.
도시후를 붙잡아 둔 건으로 감사 인사를 받은 적이 있지만, 그땐 지금처럼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때 도원우가 사과랍시고 한 소리는 이러했다.
―별로 고맙지 않지 않은 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워.
그렇게 말하던 도원우가 나한테 고맙다고 한 건가!
도원우가 연구소 사건으로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 내가 본 도원우의 모습과 지나치게 달라서 당혹스러울 정도다.
당혹 뒤에 느껴진 건 깊은 감동이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변화와 성장을 볼 수 있는 나는 행운아였다.
나는 감격과 감동을 억누르며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겸손하네. 조의신, 너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라.”
도원우가 그렇게 말하면서 웃은 것 같았다.
처음에 만나자마자 어깨빵을 시도하고 한결같이 추하던 도원우가 웃기까지 하다니……!
“기뻐 보이시네요, 의신이 형.”
“원우 형은 계속 머리가 이상했거든. 최근에 정신을 차렸어.”
천동하가 신랄한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 말의 속뜻은 지금의 도원우가 매우 정상이라는 칭찬 아닌가.
나도 천동하의 말에 동감했다.
그때,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도원우 선배님, 찾고 있었어요.”
우리 넷 앞에 등장한 건 안다인이었다.
안다인의 등장에 공기가 청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얼음 같은 미모와 박력 넘치는 분위기에 공기가 바뀐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안다인은 주변을 정화시키는 특이 체질이 있으니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공기가 바뀌었을 거다.
안다인은 학생회 일 때문에 도원우를 찾은 듯했다.
“무슨 일이지?”
“지명수 선배님이 주요 순찰 구역 인원 교체를 신청하셨어요.”
“……어제 명수가 3학년 0반을 상대하느라 이능파 소모를 심하게 했지. 알았다.”
도원우는 디바이스를 켜서 메시지 확인을 했다.
아마 우리와 대화 중이라 잠시 디바이스 메시지 알람을 꺼 둔 모양이었다.
“먼저 간다. 시험 잘 봐라.”
일이 밀린 듯 도원우가 양해를 구하고 물러났다.
안다인은 우리 쪽을 향해 가볍게 목 인사를 하고 도원우를 따라 사라졌다.
슬슬 은호가 시험을 치러야 하니 시험장까지 바래다주려 할 때였다.
“……저 학생이 안다인인가요?”
은호의 시선이 안다인의 뒷모습에 꽂혀 있었다.
플마고의 타이틀 히로인이니까 바로 알아본 걸까?
안다인은 유명 인사다 보니 알아봐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다.
“응, 신문 기사에 자주 나오던 은광고 1학년 수석이야. 정확히 말하면 주수혁과 공동 수석이지만.”
“그렇군요.”
은호는 안다인으로부터 뭔가 느꼈던 걸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했지만, 실기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묻는 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은호를 시험장까지 바래다준 후, 나도 김유리와 합류해 순찰을 돌았다.
올해 실기 시험은 웅족의 습격 없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사실 계속 긴장하고 있었거든.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김유리는 안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이 긴장을 푸는 호흡법을 알려 줬는데, 정작 그 호흡법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긴장해서 못 썼어.”
“선생님?”
“응, 과외 선생님!”
김유리가 말하는 그 선생님은 은광고의 학교 교사진이 아닌 개인 과외 선생님, 호족의 수석 주술사 죽호인 듯했다.
수업 진행 상황을 물어볼 겸, 순찰하는 동안 시간을 때울 겸 김유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김유리는 최근 자신이 사용하는 주요 공격 스킬 펜싱과 광림을 접목시키는 방법을 고안하는 중이라고 한다.
바다의 광기를 부르는 광림과 펜싱의 조합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과연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 듯했다.
“아하하, 사실 그거 때문에 요새 광선검 아이템이 남아나지 않아. 지호랑 선생님은 상관없다고 하는데…….”
“황지호는 돈 많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의신이도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황지호와 죽호가 나랑 똑같은 말을 했다고?
죽호는 그렇다 쳐도 노친네와 같은 말을 했다는 건 좀 그랬다.
따지고 보면 죽호의 나이도 만만치 않았지만.
김유리와 대화를 나누며 순찰을 도는 사이에 실기 시험이 끝났다.
수험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하고 순찰 결과 보고를 하고 해산하는 길.
김유리가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입학시험은 면접만 남았네. 은광고는 1 .1배수를 뽑는다고 했나?”
은광고에 입학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첫 번째, 맹효돈이 거친 특별 전형.
청소년 스포츠 대회 예비 플레이어 부문 수상 실적으로 결정되는 전형으로, 주수혁이나 맹효돈 수준의 신체 능력이 없으면 통과하기 어렵다.
수상 실적에 더해 교사들과의 면접, 대련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최편득이 조작해서 최영희같이 합격한 사람이 생겼지.’
작년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올해는 철저한 검증을 거쳐 뽑을 거다.
올해에는 아예 특별 전형 합격자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있다.
‘어차피 두 번째 방법이 더 비중이 커.’
두 번째, 지금 치러지고 있는 일반 전형.
현재 일반 전형의 남은 과정은 면접뿐이다.
은광고의 한 학년 정원은 약 500명으로 면접에 합격하는 수험생은 그 1 .1배수인 550명이다.
언뜻 듣기에는 50명을 탈락시키기 위해 하는 면접이지만, 사실은 다르다고 하다.
면접 때 자질이 있어 보이면 550명을 다 뽑을 수도 있다는 게 은광고 시험이다.
즉, 원래는 탈락했어야 할 50명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게 면접이다.
‘이미 서류와 필기, 시험이 합격선이면 면접은 그냥 통과하겠지.’
다른 전형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면 범죄 이력이라도 발견되지 않는 한, 면접은 그냥 통과된다.
헛소리를 해서 0반에 배정될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필기, 실기 시험 합격자 발표 결과.
은호와 은호의 후예들은 무사히 면접을 치르게 되었다.
그렇게 면접 날이 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