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시험의 결과 (7)
홍규빈의 부탁에 일단 알아보겠다고 답했으나 확답은 할 수 없었다.
초대권은 확보한 상태였으나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귀중한 사진과 영상을 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 우선 내 몫의 초대권을 챙겨야 했다.
‘2학년 0반 선배 놈들한테 일단 물어는 볼까.’
금찬솔과 왕찬솔은 최근 몹시 얌전하게 지내는 중인데, 아마 축제 준비 때문에 저러는 걸 거다.
우기환처럼 날뛰지 않은 덕에 교사진과 자치 기구 소속 학생 대다수가 마음을 놓고 있었으나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관종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가장 위험할 때다.
재등장할 때 무슨 짓을 하여 관심을 끌려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제갈재걸의 입체 화보집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홍규빈이 그걸 놓치면 앞으로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게 분명하니 대비하는 게 좋겠다.
‘축제 전까지는 이야기하면 되겠지. 우선 눈앞의 과제부터 해결하자.’
현재 당면한 과제는 낙제 위기에 놓인 우리 반 아이들의 구제다.
위기에 처한 당사자들도 도움을 적극적으로 구하고 있으니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도 쉽지는 않았다.
“레나!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휘익!
지익회관 시뮬레이터 룸.
가상계 비사(非死)종 에너미를 상대하던 권레나가 크게 굴렀다.
멈추면 안 된다는 목우람의 말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움직이긴 했으나 결국 밸런스를 무너뜨려 넘어지고, 채찍까지 놓쳤다.
실기 시험 난이도에 맞춰 설정해 둔 에너미는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호기를 놓칠 만큼 지능이 낮지는 않았다.
스륵.
낡은 로브 사이로 뼈만 남은 손가락이 드러나자 권레나가 흠칫했다.
지금 상대하고 있는 에너미는 가상계 비사종이다.
근본은 시뮬레이터가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가상계’, 죽은 것처럼 보이나 죽지 않은 ‘비사종’으로, 간단히 말하면 가상 기기 속의 언데드로, 그중에서도 스켈레톤 타입이라 섬뜩한 느낌을 줬다.
권레나는 비사종 타입과 싸울 자신이 없다며 연습하길 원했는데, 각오는 굳혔어도 실제로 보니 무서운가 보다.
쿠구구…….
그때, 검붉은 얼룩이 묻은 뼈만 남은 손끝에 이능파의 파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바뀐 걸 감지한 권레나의 안색이 흐려졌다.
‘단숨에 끝낼 생각인가. 이능파를 모아 큰 스킬을 쓸 거야.’
가상계 비사종 에너미는 여태까지 무딘 칼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이제는 스킬을 쓸 모양이었다.
비록 무기를 다루고 있다고 하나 저 비사종의 특기는 부식 스킬.
주변을 오염시키고 썩게 만들어 죽음으로 인도하는 게 언데드, 비사종의 본질이다.
직접 전투 중인 권레나 외에도 참관 중인 1학년 0반 기숙사생들 전원 그걸 알고 있었다.
목우람이 다급히 시뮬레이터 룸 유리창 너머로 외쳤다.
현재 관전 모드를 허용하고 외부의 소리가 들리도록 설정한 상태라 권레나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싸우는 중인데, 슬슬 목우람을 말려야 하지 않을까.
“레나! 어서 일어나셔야……!”
“야, 조용히 하고 봐라. 계속 훈수 두면 연습이 안 되잖아.”
“그, 그렇군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내가 나서기 전에 맹효돈이 목우람을 제지했다.
목우람은 권레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계속 큰 소리를 냈는데, 연습의 본질을 떠올리곤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목우람은 두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 권레나의 분투를 지켜봤다.
“으……!”
권레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후, 채찍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채찍은 그녀의 손에 닿는 범위에 없었다.
바닥을 더듬던 권레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했다.
‘이때에는 이능파를 사용해 무기를 다시 손에 쥐거나 예비 무기를 꺼내는 게 좋아. 그것도 아니면 다른 스킬을 쓰거나…….’
현재 권레나의 소지 물품과 스킬, 광림과 종합 능력치를 고려해 다음 전략을 짰다.
내가 저 상황에 놓인다면, 행동 방침은 두 가지.
방침 하나, 보스 룸의 마지막 에너미라고 확신한다면 광림 ‘허상 연회’를 써서 눈을 가리고 그 틈을 이용해 공격 태세를 가다듬고 결정타를 날린다.
방침 둘, 만약 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부식 스킬 발동으로 데미지를 입는 걸 감수하고 바로 무기를 쥐기 위해 이능파를 운용하거나 직접 이동한다.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고 비사종 에너미의 희귀도가 높지 않으니 스킬에 조금 맞더라도 괜찮을 거다.
물론, 그건 언제까지나 내가 직접 움직일 때의 이야기이고 나는 권레나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으니 가능하면 지금은 광림을 쓰거나 예비 무기를 꺼내 줬으면 좋겠다.
내 바람이 통한 건지 권레나는 카드 홀스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기 카드를 꺼낼 생각인가? 하지만 아까 무기 카드는 다른 쪽 홀스터에 보관하는 것 같던데…….’
그러나 카드 홀스터를 쥔 권레나는 카드를 뽑지 않았다.
권레나의 손가락 사이로 SSR급 카드 특유의 테두리 색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권레나가 뭔가 갈등하는 사이, 비사종 에너미의 스킬이 발동되었다.
쿠구구구…….
아주 천천히 비사종 에너미 주변이 썩어 내리기 시작했다.
썩기 시작한 공기가 권레나를 삼키기 위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권레나는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 손에 쥔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시켰다.
파아앗!
긴장한 얼굴로 시뮬레이터 룸을 보던 아이들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실체화된 건 백금색의 이능 바이올린이었다.
“여기에서 바이올린이라니……!”
“야, 뭐 하는 거야!”
훈수하지 않고 잘 지켜보던 사월세음과 맹효돈이 탄식했다.
그에 비해 한이는 걱정스러운 눈치여도 말없이 지켜봤고, 목우람은 필사적으로 자기 입을 억누르고 있었다.
권레나는 이어서 활을 실체화해 길게 현을 그었다.
“아…….”
그러나 이능 바이올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치 주인이 현재 제대로 바이올린을 연주할 여유가 없다는 걸 알고 노래하기를 거부한 것 같았다.
권레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능 바이올린을 보다 다시 한번 현을 그었다.
그러나 이능 바이올린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권레나가 지금보다 더 초보였을 때에도 소리는 났는데.’
권레나는 어쩌면 권제인처럼 이능 바이올린 연주로 전투를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투 중에 연주를 하고, 동시에 이능파를 다뤄 데미지를 주는 건 어지간한 정신력과 테크닉으로 해내기 어렵다.
지금 권레나의 연주 실력, 정신력으로는 에너미 앞에서 연주하는 것도, 대상에게 데미지를 주는 건 불가능한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사종 에너미의 스킬이 권레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저 아이템 때문에 에너미 스킬이 안 닿는 거 같은데.”
“아…… 희귀도가 높은 아이템은 소유자를 보호하는 패시브 효과가 있기도 하죠! 다행이에요!”
맹효돈과 사월세음이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권레나는 전의를 상실한 얼굴로 바이올린을 보고, 다시 연주를 시도하다가 손을 멈추고를 반복했다.
‘권레나는 싸울 상태가 아니야. 비사종 에너미가 부식 스킬 사용을 중단하고 다시 무기를 잡고 공격하면 끝이다.’
나는 전투 속행이 어렵다고 판단해 즉각 조작 패널에 손을 뻗었다.
삐잇!
[시뮬레이션 중단.]
권레나와 내 앞에 홀로그램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초강화 유리 너머의 광경이 일변했다.
가상계 비사종 에너미도, 썩어 있던 땅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권레나는 시뮬레이션 중단 안내문이 뜬 홀로그램을 보고 굳어 있었다.
한이가 말없이 시뮬레이션 룸 문을 열고 곁에 갈 때에도 권레나는 말이 없었다.
“고생했어.”
“……응.”
내 말에 권레나가 작게 대답했다.
권레나는 이능 바이올린과 활을 카드로 바꾸곤 고개를 들었다.
구석에 떨어져 있던 채찍을 집은 권레나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쉬움은 남아도 털고 일어난 것 같다.
“이능 바이올린을 써 보려 했는데 안 되겠다. 권제인 선배님이랑 연습 중일 때에는 몇 번 성공했는데…… 에너미가 눈앞에 있으니까 소리도 안 나.”
권레나는 채찍도 카드화시킨 후 손에 쥐었다.
“할 수 없지. 이번 시험은 채찍으로 쳐야겠다.”
“도와줄게.”
“응? 의신이는 채찍을…… 아, 만물사용이 있지! 부탁할게.”
권레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 채찍술 스킬 레벨을 향상시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방금 같은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할지 연습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거다.
나는 머릿속으로 실기 쪽 연습 계획을 세웠다.
‘맹효돈은 실기 걱정은 없는데, 문제는 권레나야. 사월세음도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해외에서 원격 시험을 치르는 아이들처럼 레포트나 필기시험으로 실기 시험을 대체하는 게 나을까?
그 생각도 했지만 금방 접었다.
실기 시험을 대체하는 과제물과 시험은 난이도가 상당하다고 들었다.
필기도 아슬아슬한 권레나의 부담을 늘리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사월세음도 평균을 간신히 넘는 상황이니 어려울 것 같다.
가능하면 권레나와 사월세음 두 사람이 같이 실기 대비를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위화감을 느꼈다.
‘목우람이 지나치게 조용한데.’
평소 같았으면 권레나의 안부를 묻는 말을 수십 마디 던졌을 텐데, 아무 말이 없었다.
목우람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우람의 표정에는 뭐라 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는데 원망스러워하는 기색이 조금 느껴졌다.
‘목우람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지?’
목우람이 도움을 주기 어려운 채찍 연습에 내가 어울려서 그런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목우람의 시선은 내가 아닌 권레나 손에 들린 이능 바이올린 카드에 꽂혀 있었다.
목우람은 심호흡을 하다가 권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연습 고생했습니다, 레나.”
“응, 밖에서 조언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더 오래 버텼어.”
“……아닙니다, 결국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권레나와 대화를 마친 목우람은 무언가 결심한 것 같았다.
그 결심은 의외의 형태로 드러났다.
“부반장, 실기 연습 시간에 저는 따로 움직여도 괜찮겠습니까? 해야 할 일이 떠올라서…… 필기시험 대비 중에는 반드시 돌아와 레나와 여러분과 공부하겠습니다.”
목우람이 권레나와 떨어져서 따로 뭔가를 하겠다고?
실기 한정이긴 하지만 마음에 걸렸다.
나만 이상하게 생각한 게 아닌 듯 맹효돈이 물었다.
“또 이상한 거 사고 알바하려는 건 아니냐?”
“전 이상한 걸 산 적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시험 기간 중이라 교내 알바를 구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목우람은 결연했다.
뭔가를 꾸미는 듯했는데, 목우람의 신체 능력을 직접 봤으니 실기 걱정은 조금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권레나의 필기 공부는 도울 생각인가 보니 괜찮을 것 같다.
“그래, 그러면 계획표를 수정해 둘게. 같이 연습할 거면 미리 말해 줘.”
“감사합니다, 부반장!”
그 후로 몇 명 더 실기 연습을 했다.
사월세음과 권레나는 자칫하다간 실기에서 낙제를 당할 것 같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니었다.
한이는 움직임이 좀 둔해진 것 같긴 했지만, 여유가 있었고 맹효돈과 목우람은 순식간에 에너미를 제압하고 시뮬레이터 룸을 나왔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해산하자. 수정한 계획표는 디바이스로 보내 둘게.”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이만.”
“야, 지익회에서 야식 나눠 주는 거 받아 가자.”
“그래!”
“……단 것도 있어?”
해산 전, 지익회관 로비에 가 야식을 챙기기로 했다.
물품 배포 중인 지익회 소속 학생들은 거의 3학년이었다.
1, 2학년들이 시험공부하게 배려하는 모양이었다.
그 배려심 깊은 지익회 소속 학생 중에는 성시완도 있었다.
“어서 와, 0반 애들이 올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 놨어.”
성시완은 아직 옛 한국 지부장에게 도전하는 중인지, 야위어 보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