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62화 (560/925)

78. 양자택일 (1)

김신록은 적호가 한 말을 듣고도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발화자가 적호였으므로 김신록의 의심은 길게 지속되지 않았다.

‘적호 님이 말씀하신 거니 전부 사실일 거야. 저 용이 진짜로 상위 존재가 되려는 거겠지.’

김신록은 곧 상위 존재가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악우에 관해 생각했다.

용제건의 광림은 ‘여의보주 현현’.

‘여의보주 현현’은 만물의 인식 속의 여의보주를 물질적으로 실체화시켜 용제건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내고 기적을 실현시키는 능력이다.

용제건 그 자체가 여의보주이기는 하나 이 땅에서 소원을 이루어 주고 기적을 일으켰다고 널리 알려진 것은 어디까지나 구체형의 옥구슬이다.

용왕신의 여의보주로서의 신비를 구현하여 전투 중에는 자신의 종합 능력치와 이능을 대폭 상승시키고 통상시에는 소원을 들어준다.

그러나 용제건은 그동안 광림을 사용하지 않고 몇천 년 동안 김신록의 소원을 들어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저 용은 친구로 있어 줬어.’

김신록은 친구가 있었으면 했다.

이를 여의보주에 빌지 않았으나 용제건은 아무 대가 없이 소원을 이루어 줬다.

굳이 따지면 김신록이 지불한 대가는 이름 정도였다.

그것도 옥색의 여의보주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붉은 비단 ‘제(緹)’ 자가 들어간 어색한 이름이었다.

김신록은 기나긴 세월 사이, 몇 번이나 용제건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김신록이 진지하게 물어도 용제건은 허튼소리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소원? 그럼 차 끓여 줘.

―그게 무슨 소원이야. 원래 차는 그냥 끓여 줬잖아.

―다른 소원을 빌어야 되나. 그러면 용족의 영역에 놀러 와.

―저번에도 놀러 갔잖아.

―또 오면 돼. 청룡이 네 침소를 마련했으니까 구경시켜 줄게. 곶감도 마련해 뒀을걸.

―내 침소? 왜 용족의 영역에 내 방이 있어?

용제건에게 소원 얘기를 꺼낼 때마다 말을 돌리거나 장난질을 쳐 댔기에 김신록은 점차 말을 아끼게 되었다.

하지만 김신록이 포기한 건 아니었다.

‘나도 저 용처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이능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김신록의 광림은 그의 힘이 호랑이와 곰의 형태로 구현되는 것.

파괴력은 상당했으나 웅족의 흔적이 보이는 광림을 함부로 쓸 수 없었고, 용제건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데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능뿐만이 아니었다.

적호와 용제건이 작성한 리플레이 보고서를 보면 자신 때문에 친우가 어떤 일을 겪어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리플레이 속에서 내 부활을 소원으로 빌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어.’

용제건의 소원은 들어주고 싶지만, 그것만큼은 어려웠다.

김신록의 입지나 놓인 처지, 그로 인해 고통받은 아버지 적호를 생각하면 부활을 택할 수 없었다.

김신록은 자신이 죽으면 빠르게 윤회의 굴레를 넘거나 혼이 소멸하는 걸 택할 생각이었다.

리플레이 속에서 김신록이 사망한 후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용제건의 소원이 닿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김신록은 살아 있고, 용제건은 바라는 바가 따로 있었다.

‘저 용이 그동안 말하지 않은 소원은 상위 존재가 되는 거였구나.’

상위 존재는 강하다고 하여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으로 숭배받거나, 신화 속에서 위업을 쌓고 인정받거나 긴 세월 신격을 높여야 상위 존재에 이르게 된다.

물론, 신화 속에 등장한 모든 존재가 상위 존재가 되는 건 아니다.

백호나 황호, 청룡처럼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여 진족으로 남길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신성을 부정하면 다시 신격을 쌓아 올려야 하므로 아득한 수준의 시간과 업적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용제건에게 필요한 건 고작 몇 번의 기적뿐이라고 한다.

분명 오래전부터 계속 신격을 쌓아 온 게 분명했다.

‘그 용은 백호 님이나 황호 님처럼 신성을 부정하지 않고 쌓아 온 거야. 아주 오래전부터 상위 존재가 될 생각을 하고 있던 거겠지. 어쩌면 나와 친구가 되기 전부터.’

리플레이 속 김신록은 용제건의 소원을 이루어 주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용제건이 약해지는 원인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용제건의 소원이 이루어져 상위 존재가 되면 자신의 부활을 빌다가 사망하는 일도 없을 거다.

‘만나기 어려워지겠지.’

천신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황호조차 만반의 준비를 한 후에야 겨우 꿈을 통해 짧은 계시를 받는 게 고작이다.

김신록이 고문한 카드모스는 상위 존재가 된 아내, 조화의 여신 하르모니아를 만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용족을 습격했다.

황호처럼 몇천 년을 호족의 수장으로서 섬겨도, 카드모스처럼 부부의 연을 맺어도 만나기 힘든 게 상위 존재다.

강력한 가호를 받으면 목소리 듣기는 다소 수월하겠지만, 지금처럼 만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가호는 받기 싫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 주고 싶지 않아.’

김신록은 용제건이 상위 존재가 되면 절대로 가호를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저 유희계 여의보주가 멋대로 광림으로 힘을 보낼지 모르겠다만, 상호 동의를 바탕으로 존재감을 새기는 가호는 달랐다.

가호의 범위에 따라선 정신이 연결되어 생각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가호만큼은 받고 싶지 않았다.

비록 악우라고는 하나 몇천 년을 어울린 하나뿐인 친우를 보내는 심정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김신록이 품은 생각이 친우의 소원을 방해하게 될 것 같았다.

가끔…… 아니, 자주 흠씬 패 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악우였지만, 그래도 친우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했다.

‘……저 소원이 이루어지게 돕자.’

김신록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가 겨우 움직였다.

김신록은 마치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걸 알고 있던 것처럼 결연했다.

*    *    *

적호의 폭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나를 포함한 이 자리에 있는 호랑이들 전부가 상상도 못 한 건지 다들 놀란 기색이었다.

용제건이 실눈을 뜨고 다니긴 했으나, 다들 실눈보다는 용제건의 긴 머리카락이나 유희계 용다운 괴짜 행위에 주목하지 않는가.

가끔 놀랄 때 눈을 크게 뜨곤 하지만, 누가 그 틈을 타 용제건의 눈동자를 관찰해 신격을 찾아내려 들겠는가.

용제건이 황홀하게 웃기만 하면 은광고의 유수한 플레이어, 여기저기에 악명을 떨치는 악동들이 도망치며, 날고 기는 용족조차 딴청을 부리며 재빠르게 내뺀다.

그러니 그동안 용제건의 눈동자에 정신을 집중해 관찰하려는 이는 거의 없었을 거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용제건이 현세에서 교사직까지 맡으며 잘 적응하고 있는 중인데, 그걸 다 던지고 상위 존재가 될 거란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겠지.’

용제건이 신격을 쌓아 올렸다는 건 기껏해야 용왕신이나 적호가 말한 황룡 정도만 알아챘을 듯했다.

그 사실이 뼈아프게 느껴졌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품었던 뜻을 알아채지 못하다니!

용제건이 신화 속의 입지와 실눈을 뜨는 속성을 조합해 그 사실을 추측하고, 실제로 그의 눈을 관찰해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이 세계에 와서 매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숨겨진 면모를 알게 될 때마다 반성하게 된다.

플마고의 썩고 고인 물을 자청하는 주제에 이리도 무지하다니.

아직 알아야 하고 생각해야 할 게 많다는 사실을 느끼고 깊게 반성했다.

‘용제건이 상위 존재라니……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최초 아닌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는 상위 존재가 없다.

물론 백호군처럼 상위 존재가 될 자격을 갖춘 훌륭한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있다.

백호군은 청룡, 현무, 주작과 함께 사방신, 방위신 중의 하나로 꼽히고, 아예 그를 신으로 취급하는 문헌도 있지 않은가.

사수(四獸)의 하나인 현무는 예전에 만나서 이런 말을 했다.

―응. 백호와 청룡은 진족으로서 현세에 남기로 했지만, 나와 주작은 달라. 아직 고민 중이지. 고민 중에도 나날이 신격이 올라서 인간과 쉬이 말을 나눌 수가 없어.

진족으로 남을 것인가, 상위 존재가 될 것인가.

아직 선택을 하지 못했다는 현무는 신격이 오른 탓인지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현세에 남기를 택했다는 백호군과 청룡은 눈을 가리지 않는다.

즉, 현세에 남기로 선택하면 신격이 눈에 남지 않게 되는 거다.

이 땅에 머무는 진족의 눈에 신격이 서려 있다면 아직 결정을 못 했다는 증거다.

실눈을 떠 그동안 자신의 고민을 숨긴 용제건처럼 말이다.

‘용제건이 상위 존재의 자리에 올라도 이상한 게 없긴 하지만, 과연 그게 용제건이 원하는 걸까?’

나는 용제건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여태까지 용제건을 관찰한 입장으로선 의심이 먼저 들었다.

용제건이 황홀하게 웃으며 은광고 생활을 즐기던 모습이 떠올라서 혼란스러웠다.

‘용제건의 친우인 김신록은 어떻게 생각할까.’

용제건이 목숨을 깎아 가면서 살리려 했던 친우 아닌가.

나는 생각을 멈추고 김신록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문이 열린 이후부터 김신록은 줄곧 굳은 채로 서 있었다.

김신록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뭔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

김신록이 멈춰 있는 사이, 그를 비롯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적호는 김신록이 접근하는 걸 알고 있었던 건지 동요한 기색이 없었다.

용제건이 품고 있는 뜻을 김신록에게 알리기 위해 일부러 타이밍을 노린 듯했다.

‘……나도 멋대로 적호와 김신록이 숨기려고 했던 걸 다 밝혀 버렸지.’

나는 전과가 있기에 적호를 두고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용제건, 황지호, 은호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거기에 끼어들 입장은 아닌 것 같다.

그때, 생각을 마친 듯한 김신록이 용제건을 향해 척척 걸어오기 시작했다.

키이잉…….

용제건 쪽으로 걸어오는 김신록의 역용술이 풀리며 본모습이 드러났다.

김신록의 머리카락이 붉은 비단처럼 물들고, 눈에는 같은 색의 이능파가 서렸다.

김신록의 눈에는 호족 특유의 스킬, ‘안광’이 발동해 있었다.

용제건은 시안색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과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 떠.”

용제건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선 김신록이 입을 열었다.

용제건은 조금 반응이 느렸으나 이내 실눈을 휘며 웃었다.

“뜨고 있는데.”

“크게 떠.”

“…….”

김신록의 표정은 진지했다.

용제건은 실눈 틈으로 그 얼굴을 관찰하다가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시안색의 눈이 온전하게 드러났다.

김신록은 시간을 들여 용제건의 눈을 관찰했다.

근거리에서 눈을 크게 뜬 상태로도 신격을 감지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았다.

“하…….”

탄식을 먼저 터뜨린 건 황지호였다.

황지호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채로 용제건을 안광으로 관찰하고 있었나 본데, 저 반응을 보니 신격을 감지한 것 같다.

곧이어 김신록도 용제건의 신격을 느꼈는지 안광 스킬을 해제했다.

“……상위 존재가 되고 싶으면 신격을 쌓을 수 있게 도울게.”

김신록은 정말 그걸로 괜찮은가?

용제건은 방금까지 당황한 것과 달리 달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김신록이 제 생각을 알게 되면 이런 반응을 보일 걸 알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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