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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63화 (561/925)

78. 양자택일 (2)

김신록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처럼 빠르게 퇴장했다.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댔는데, 분명 자리를 뜬 이유는 따로 있었을 거다.

적호가 바래다준다는 명목으로 따라나서자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은호와 황지호가 말했다.

“적호 님께서 미리 상의했으면 준비했을 텐데요. 여의보주가 이름도 받아 간 친우 모르게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 적어도 김신록이 자리에 앉은 상태에서 듣게 해 주면 좋았을 것을. 애가 당황해서 꼼짝을 못하지 않았나.”

“저희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 한 걸 보면 몹시 놀란 거겠죠. 여의보주에게 한 방 날리지 않고 의연하고 예의 바르게 대처한 게 대견스러울 정도예요.”

은호와 황지호가 적호를 탓하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내용을 따지면 어째 용제건을 나무라는 말처럼 들렸다.

용제건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나는 좀 더 천천히 말할 생각이었는데. 상위 존재가 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는 했지만 아직은 고민 중이었거든.”

“승천하기 직전에는 말했겠죠. 숨기지도 못했을 테니까.”

“얼마나 천천히 말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나 김신록이 눈치채는 게 더 빨랐을 것 같군.”

은호와 황지호는 승천 예정 사실을 숨기고 있던 용제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두 호랑이는 용제건과 김신록이 친우로 지내는 걸 썩 내켜 하는 눈치는 아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친우를 두고 가려는 용제건을 저렇게 뭐라 하고 있으니까.

두 호랑이의 말을 듣던 용제건은 풀이 죽기는커녕 오히려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용제건, 지금 웃음이 나오나?”

황지호의 말에 용제건의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김신록이 왔다 간 이후 씁쓸해했던 게 거짓말처럼 용제건은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흐뭇하게 느끼는 게 당연하지.”

“뭐가 어떻게 흐뭇하다는 거지?”

“내가 하늘로 올라가면 신록이를 누가 챙기나 싶었는데, 호족의 높으신 분들께서 이렇게 그 아이를 비호하니까 안심이 돼. 신록이가 호족 사이에서 많이 쓸쓸해했잖아.”

용제건의 카운터가 황지호를 거하게 때렸다.

다른 세계에서 천성헌으로 지냈던 은호는 그렇다 쳐도, 줄곧 이 세계에서 호족의 수장으로 지냈던 황지호에게는 아픈 말이었다.

문득 가면을 쓴 호족 부부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가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김신록도 생각났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서야 했던 황지호도.

‘대죄를 지은 적호의 아들을 보호하기 어려웠을 텐데.’

플마고 속 웅족의 습격이 있기 전까지 황지호는 계속 김신록을 보호해 왔다.

그래도 김신록을 눈에 띄게 편애하거나 아끼지는 못했을 거다.

그래서 고문 같은 험한 일을 하고, 호족에 제대로 섞이지 못한 채 용제건의 말대로 쓸쓸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황지호에게 한 방 먹인 용제건은 또 말을 이었다.

“황호 씨라면 날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를 어찌 이해한단 말이냐.”

“친우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 봤잖아.”

용제건의 말에 응접실이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황지호는 백호군도, 적호도, 은호도, 청호도, 신인도 없이 이 광활한 대저택에 홀로 있어야 했다.

백호군은 천신의 분노를 산 이후 은광구에 머물러 있어야 했지만, 황지호랑 어울리지는 않았다.

적호는 이계 충돌 이후 형틀에서 풀려났다고 하나 명령을 받을 때 이외에는 황지호 앞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은호는 잠들어 있었고, 청호와 신인은 인간이 되어 황지호 모르게 은광고에 있었다.

황지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용제건이 다시 말했다.

“황호 씨는 호족의 수장으로서 친우들을 기다리는 걸 택했지. 하지만 만약 상위 존재가 되어 친우들을 지킬 수 있다면 그쪽을 선택했을 거야.”

“용제건, 너 설마 상위 존재가 되려는 이유가…….”

“내가 상위 존재가 되면 광림으로 신록이에게 힘을 빌려주고, 허락한다면 가호도 줄 생각이야.”

용제건이 상위 존재가 되려는 이유를 듣자 계속 날이 서 있던 호랑이들의 기운이 죽었다.

그동안 밝히지는 않았다고 하나 용제건은 김신록을 돕겠다고 저러고 있지 않은가.

“신록이는 웅족에게 저항하지 못해. 하지만 용의 의지가 깃든다면 어떨까.”

용제건은 줄곧 상위 존재가 될 가능성을 열어 뒀지만, 진정 상위 존재가 되겠다고 마음이 기우는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이제 자신이 떠나도 김신록 옆에는 편이 되어 줄 호족들이 있어서였다.

김신록이 적호와 화해를 했고 은호가 돌아왔으니 예전보다 걱정이 덜할 거다.

또 하나는 김신록이 웅족에게 죽었던 악몽을 경험해서다.

웅족의 습격을 당해 죽을 뻔한 것과 실제로 죽어 버린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후자를 생생하게 경험한 용제건의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김유리의 광림도 의지와 상관없이 발동하려 할 때가 있다고 했지.’

구체적인 사례가 없어서 뭐라 하기 힘들지만, 용제건이 상위 존재가 되어 광림으로 힘을 빌려준다면 김신록은 웅족으로부터 안전해질지도 모른다.

용제건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내가 상위 존재가 되어 광림으로 힘을 빌려주면, 신록이가 웅족한테 당할 일은 없을 거야.”

작년 입학시험 때 김신록을 지키지 못한 호족으로선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용제건은 말하는 내내 웃고 있었다.

“기왕이면 정체를 밝히고 제자들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어. 그중에서는 성국언처럼 진족과 겨룰 만큼 강한 인간도 있으니 만약의 일이 생기면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겠지.”

그것 때문에 용제건이 성국언과 김신록을 만나게 하려고 하는 건가.

그런 이유 외에도 단순히 김신록이 옛날 신분으로 지낼 때 인연을 남긴 제자와 만나는 걸 구경하는 게 재밌어서 그랬겠지만.

용제건의 말은 납득할 구석이 있지만, 바로 찬동할 수 없었다.

‘이대로 용제건이 상위 존재가 되면 김신록이 좀 더 안전해지겠지. 하지만 둘은 진짜 그걸로 괜찮을까?’

나도 당장 용제건이 은광고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매우 섭섭하다.

‘운명력’이 자주 발동해 신이 된 용제건을 가끔 볼 수 있게 된다 해도 그랬다.

하물며 몇 천 년을 친우로 지낸 둘은 어떻겠는가.

그러나 용제건의 마음은 상위 존재가 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고, 김신록은 저걸 돕겠다 하고 있고, 호족은 말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당연히 나도 여기에 끼어들 명분이 없었다.

‘그래도 다시 생각하게 하고 싶어.’

나는 내가 가진 패들, 용제건과 김신록이 나눴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몇 번이나 되짚어 봐도 단서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방법밖에 없었다.

말을 고른 나는 입을 열었다.

“용제건 선생님, 신격이 쌓여 승천이 가능하게 되어도 상위 존재가 되는 건 보류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이 상황에 끼어들 줄은 몰랐는지 용제건이 눈을 조금 크게 뜨다 다시 실눈으로 돌아갔다.

내가 뭐라 말할지 기대되는 모양이다.

“용제건 선생님이 제 소원을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용제건이 악몽에서 눈을 떴을 때,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은인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어.

―내 소원은 이미 의신이 네가 이루어 줬어. 그러니 내가 네 소원을 들어줄게.

나는 딱히 용제건의 소원을 들어준답시고 거창한 일을 벌인 적도 없고, 그 사실을 이용해 용제건에게서 뭔가 받아 낼 마음도 없었다.

용제건이 저 말을 했을 때에도 딱히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요청할 마음이 없었다.

용제건의 호의를 이용한 꼴이 되었지만, 어쨌든 시간 끌기에 써먹을 말이 저것밖에 없었다.

“그래, 그랬지. 은인에게 아무 보답도 하지 못하고 갈 수는 없지.”

오늘 준 흑진주는 그새 까먹었나 보다.

그걸 팔면 평생 먹고 놀고 좋은 일에 써도 돈이 남아돌 텐데 무슨 아무 보답도 안 했다는 둥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기 전에 은호가 먼저 말했다.

“네, 여의보주는 오늘 의신이 형에게 준 진주 한 알 정도로 끝내기에는 과분한 은혜를 입었죠.”

“조의신, 아주 잘 말했다. 용제건은 입으로만 은인 소리를 하고 한 게 없었지.”

“하하하, 그냥 갈 생각은 없었어.”

조용히 있던 호랑이들이 갑자기 왜 저러나.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싶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용제건은 어느 사이엔가 시안색의 눈을 크게 뜨고 내게 약조했다.

“의신아, 승천하기 전에 꼭 네 소원을 들어줄게.”

*    *    *

학생회관, 선도부회관을 잇는 비밀통로.

그 안에 위치한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가 자아낸 이계의 보스 룸.

옛 한국 지부장과 계이담이 대련하는 중이었다.

성시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옛 한국 지부장이 정신 공격계 이능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사격 솜씨가 형편없군. 어째서 이능 총을 사용하는 거지? 체술에 능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나한테 졌을 거다.]

옛 한국 지부장의 공격 스킬은 권법이었다.

성국언과 성시완과 같은 유파의 권법이었는데, 만약 계이담이 성시완과의 대련 경험이 없었다면 첫 방에 나가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그 지독한 정신 공격계 이능을 안 쓰고도 이 정도라고? 미친 거 아냐?’

계이담은 통증으로 벌벌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조의신에게 얻어맞았을 때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방어 도중에 왼손 검지와 약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계속 한 손으로 총을 쏴서 오른손에도 부담이 갔다.

넘어진 상태에서 걷어차였을 때 전경골근이 찢어진 건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누가 봐도 옛 한국 지부장의 압승이었다.

‘기억 분석을 해 주는 조건으로 대련을 걸었는데…… 어떻게 이기라고 이걸!’

계이담은 파손된 이능 총을 바라보며 그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원인 중 하나, 안다인을 떠올렸다.

이전 세계에도, 지금에서도 총을 다루는 재능이 바닥에 가까운 그가 이능 총을 택한 건 오로지 안다인 때문이었다.

계이담의 담임과 선도부 고문 함근형이 그에게 몇 번 무기를 바꿀 것을 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능 총을 다루기 너무 힘들기에 솔깃했지만, 총을 다루다 보면 안다인과 연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놓지를 못했다.

‘죽으면 연이고 뭐고 없는데, 아오.’

계이담은 고민하느라 대답도 못 했지만, 언뜻 보기에는 진중하게 보였고 도발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통증이 상당할 텐데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것도 그랬다.

그 점이 마음에 든 건지 옛 한국 지부장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자질은 나쁘지 않군. 대련은 여기까지다.]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네가 이능 총을 사용하는 한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대련이 여기까지라고 했지, 네 제안을 거절한다는 건 아니다.]

옛 한국 지부장의 말에 계이담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사실 계이담도 자신이 질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제안을 받아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때, 옛 한국 지부장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네 기억을 읽을 생각은 없다.]

아니, 그러면 왜 저런 소리를 해서 기대하게 만든 건가.

계이담은 울컥했지만, 압도적인 강자 그것도 계이담의 기억을 읽어 줄 실마리를 쥔 자 앞에서 감히 입을 놀릴 수 없었다.

[나는 너 같은 눈을 한 자를 많이 봤다.]

“저 같은 눈……?”

[개심했으나 지은 죄가 무거운 자 말이다.]

옛 한국 지부장의 말에 계이담이 몸을 움찔 떨었다.

지은 죄가 무겁다는 말에 떠오르는 것들이 많았다.

[무엇을 찾기 위해 네 기억을 분석하려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악용될 소지가 있을 기억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조건이 있다. 너보다 강하고, 선한 자가 있다면 안심할 수 있겠군.]

옛 한국 지부장은 계이담이 가장 우려했던 말을 꺼냈다.

[성시완과 조의신, 두 사람과 동행하여 오도록.]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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