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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73화 (569/925)

79. 은광고 축제 (7)

은빛의 그림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인 것 같던 음성은 하나로 합쳐졌다.

본모습을 드러낸 은호의 후예가 물었다.

“은호 님이 그때 벌어진 일을 네게 일러 주셨을 거다. 어째서 의심 없이 바로 내 정체를 맞힌 거지?”

은호가 내게 그때 있던 일을 말해 준 것도 아는 건가?

은호가 모든 것을 알려 준 건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적호와 싸웠을 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은호는 먼 옛날 호족의 수장의 아이가 이 땅을 수호할 전사가 되리라는 미래를 읽었다.

호족의 적이 아이를 노릴 것이라는 생각에 은호는 이를 호족에게도 숨겼다.

은호가 비밀을 공유한 건 같은 예지를 받은 인간의 무녀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은호가 인간의 무녀는 은호를 배신하고 복중의 후예를 해하고 출산 중 사망했다.

그렇게 태어난 후예는 기(氣)의 흐름, 지금으로 따지면 이능을 사용할 수 없었고 신체도 부자유했다.

‘굳이 후예를 죽이지 않고 낳은 건 다른 아이가 수호자의 운명을 타고나는 걸 막기 위해서일 거야.’

목숨 하나로 천명을 완전히 막을 수 없을 테니 막지는 않되 뒤틀어 버린 거다.

그래서 후예는 전사로서 싸울 힘을 잃은 채로 무력하게 태어났으나 ‘다른 무언가’를 타고났다고 한다.

은호가 후예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새로운 천기를 읽었다.

후예를 지키다가 백호군을 비롯한 호족의 영웅들이 죽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두고 황지호와 은호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네 후예가 무슨 예언을 타고났든, 나는 그 후예를 지켰을 거다.

―네, 황호 님이라면 제 아이를 지켜 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이도 목숨을 부지했겠죠. 황호 님이 살아 계신 동안에는요.

싸울 수도 없는 후예를 위해 호족의 영웅들이 죽게 된다.

이들이 모두 죽고 나면 어느 호족이 이 후예를 비호하려 들겠는가.

결국 은호는 친우들과 딸을 지키기 위해 옥토연에게 후예를 맡기고, 천기를 틀어 버렸다.

후예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한 은호는 천기를 읽는 힘을 잃고 큰 싸움을 몇 차례 걸친 후 깊은 잠에 빠졌다고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들은 후,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생겼다.

‘어째서 신화계 호족들이 후예를 지키다가 죽는다는 예언이 새로 나온 걸까?’

단순히 생각하면 적이 은호의 후예를 노리기 때문일 거다.

그렇다면 적은 왜 그 후예를 노리는 걸까?

그저 호족을 위협할 인질이 필요했다면 은호를 노리는 게 더 효과적일 거다.

전사가 될 힘을 잃은 후예 하나 잡자고 신화계 호족들을 죽이는 리스크를 진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여전히 은호의 후예는 한반도를 수호할 운명을 타고났던 거겠지.’

내가 눈치챈 걸 은호가 몰랐을 리가 없다.

은호는 제 손으로 한반도를 지킬 수호자의 존재를 숨기고 지웠던 거다.

“당신이 태어난 이후 내려온 두 번째 예지를 듣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 생각을 간략히 정리해 말했더니 은빛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전부 정답인 것 같았다.

“어머니가 내게서 전사의 힘을 앗아 갔고, 아버지는 나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호족의 수장의 아이도, 전사도 될 수 없었다.”

“…….”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땅을 지킬 운명과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은빛 그림자는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신화 속에서는 자식에게 비정한 이들이 세기도 힘들 만큼 등장하지만, 그게 자기 부모 이야기라면 저렇게 무디게 받아들이기는 힘들 거다.

“구세의 운명은 가혹하지. 안 그런가?”

은빛 그림자는 동의를 구하듯이 내게 물었다.

나한테 동의를 구하려 해 봤자 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세상을 구한 기억이 없다.

플마고 게임 내용이 가혹하긴 했지만 천성헌 시절의 은호도, 저 위에서 아무 생각없이 처놀고 있을 ‘계’새끼도 클리어한 거다.

왜 내가 운명력 스킬을 지녔는지 아직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네게 감히 할 이야기가 아니었군. 내게는 가족이나 다름 없는 토족이 있었고, 눈을 감기 전까지 아이를 셋이나 봤으니까. 나는 제법 행복하게 살았다.”

웃으면서 하는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딘가 은서호, 은이호, 은재호를 연상하는 외모라고는 생각했으나 저렇게 웃으니 정말 닮아 있었다.

그 셋이 밝게 자란 건 옥토연과 그녀의 영향이 클 것 같다.

문득 그 생각에 이르자 줄곧 신경 쓰였던 걸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이들의 아버지에 관해 물어봐도 될까요?”

은빛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도를 보니 무거운 내용은 없을 것 같아 안심했다.

“내 남편은 지금 이 세계에 없다.”

처음부터 무거운 말이 나왔다.

괜히 안심했다.

사죄의 말을 고르고 있자니 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다. 죽은 것도 아니다. 그저 제 일을 하느라 이 세계에 없을 뿐이다.”

그녀가 장난에 성공한 아이처럼 웃었다.

그 아이들의 장난기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할 일이 있어서 이 세계에 없다는 게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

“내 남편은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내가 할 일을 마치면 다시 얼굴을 볼 일이 있겠지.”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이 남편이라고……?

상상도 못 한 말에 잠시 멍해졌지만 이후 곧바로 의문이 솟았다.

대체 둘은 어떻게 만난 건지, 어쩌다가 부부가 된 건지 궁금했다.

“몹시 궁금한 게 많겠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내 남편에게 듣도록 해. 조만간 만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만날 일이 생기나요?”

“그래, 네가 성탄절에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크리스마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시나요?”

그녀는 퍼스트 크리스마스에 관해서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부정하지 않고 답했다.

“그래, 나도 너처럼 초상우주가 보여 준 미래를 봤다. 게임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초상우주라는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운명력은 ‘세상을 구했던 자’가 ‘아득한 미지’와 접촉했을 때 생기는 힘이라고 했죠. 그 ‘아득한 미지’는 초상우주를 가리키는 건가요?”

“그래.”

“그렇다면 당신은 세상을 구한 적이 있나요?”

“그렇다.”

은빛 그림자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손 위로 작은 이능파가 물방울처럼 맺혔는데, 그 정순한 결정체가 머금은 힘에 감탄이 나왔다.

“나는 온몸의 기혈이 막힌 채로 태어났고, 검 하나 들 힘이 없는 무력한 육신을 타고났다. 하지만 혼은 달랐다.”

은빛 그림자가 손가락으로 결정체를 두드리자 그 강렬한 결정체가 말 그대로 물방울처럼 녹아 허공에 흩어졌다.

그녀의 손짓 하나에 힘이 모였다 스러지는 게 경악스러웠다.

“내 혼의 그릇은 무수한 상위 존재와 진족의 존재감을 감당할 만큼 컸지. 망가진 육신으로는 이 혼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수천 년 동안 거동도 제대로 못 했다.”

그건 보기만 해도 느껴진다.

단순히 죽은 사람의 혼이 아니라 상위 존재가 아닐까 착각했을 정도로 그녀의 혼에서 느껴지는 힘은 상당했다.

세상을 구한 존재라고 할 만큼 말이다.

그런데 대체 그녀는 언제 세상을 구한 걸까?

은호는 딸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한반도를 수호하는 데에 성공한 게 아닌가?

“하지만 이 세계에 거대한 위기가 닥친 순간, 천신을 필두로 수많은 상위 존재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가호를 받아 나는 육신을 초월해 이 세상을 구했다.”

수많은 상위 존재들이 합심하여 개입할 정도의 큰 사건.

신화 시절 있었던 외적의 침입을 가리키는 건 아닐 거다.

시기가 맞지 않고 이는 호족들에 의해 해결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구해서 역사에 남지 않은 걸까? 하지만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을 리가 없어.’

신화 시절 거대한 천명을 타고난 수호자의 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호를 짊어져야 할 만한 세계의 위기.

나는 그 흔적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을 입에 담았다.

“이계 충돌 때 세상을 구하셨나요?”

이 세계의 정체성을 바꾼 이계 충돌.

이계 충돌 발생 이후에 에너미들의 침입으로 세계는 위태로워졌지만, 충돌 자체로 인해 누군가가 죽거나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정말 총명하구나.”

내 예상이 맞은 건지, 약 100년 전에 이 세계를 구한 이가 말했다.

“그래, 원래 이 세계는 충돌하여 소멸할 예정이었다. 충돌의 여파가 이 세계의 생명체들을 지우기에 충분했지. 하지만 그저 접촉하여 이 세계와 이계가 교차되는 것에 그쳤다.”

이계 충돌이 세계를 격변시킨 것에 비해 충돌 자체의 위력이 별로 없었다고 알려졌으나 실상은 달랐나 보다.

이름이 없는 영웅에 의해 이 세계는 한 번 구해진 거다.

무슨 수를 써 충돌의 여파를 지운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거짓말이 아닐 것 같았다.

그녀는 자조하듯이 말했다.

“이계 공략과 에너미의 습격에 많은 것을 잃은 이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이야기지만, 세상을 구한 것으로 취급되어 나는 운명력을 얻었다. 그리고 운명력이 이끄는 대로 몇 가지 일을 더 했지.”

그 몇 가지 일에는 목우람의 스승을 구한 일도 포함되어 있을까?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구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좀 무리한 탓인지 혼이 이 세계에 머무르기도 어려워져 수명이 다해 버렸다. 본래 후예는 이렇게 빨리 죽지 않는데.”

그녀가 사망한 건 막내 은재호가 태어났을 즈음이다.

약 10년 전이니 그녀는 세상을 구한 후에도 90년 가량을 더 산 셈이다.

90년 동안 많은 이들을 구하며 그녀는 앞으로의 일을 대비했을 거다.

‘세상을 구한 후에 수명이 줄었다는 걸 알았을 거야. 그래서 윤회의 굴레에 관해 조사하고, 그러다가 파수꾼과 연을 맺은 게 아닐까.’

옛 한국 지부장처럼 시뮬레이터가 구현하는 이계 속에만 존재하는 AI로 남는다면 모를까, 혼이 이 세계에 머물러 있으려면 상당히 제약이 큰 것 같다.

운명력이 발동해야 한정적인 공간 속에서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인 걸 보니 말이다.

어쨌든, 그녀는 죽은 후에도 혼을 이 세계에 남기는 데에 성공했고 이렇게 나와 만나게 되었다.

“네가 흑막이라고 부르는 자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너도 짐작하고 있을 거다.”

“……네.”

그야 플마고를 플레이했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거다.

흑막이 은광고를 무너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이 세계를 바꾸려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

“네가 성탄절에 벌어질 사건을 막을 대책을 세운 걸 안다. 계획대로 진행되면 그날의 일은 저지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경고하듯이 말했다.

“황호 님이 위험에 처하겠지.”

순간 플마고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황지호가 떠올랐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그녀가 웃기 시작했다.

“황호 님께서 은인이 무정하고 무심하다며 한탄하시는 걸 몇 번 보았는데 걱정하는 것 같아 다행이군.”

“…….”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밖에서 보면 그렇게 보였나?

주변에 보는 눈이 많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황지호도 오늘 박하게 취급한다며 뭐라고 한마디 했던 것 같다.

그녀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안심하고 네게 부탁할 수 있겠구나.”

세상을 구했던 영웅이 내게 상상하지도 못한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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