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은광고 축제 (4)
‘이렇게 멋진 곳에서 구질구질하게 굴다니.’
2학년 0반이 준비한 기획전, ‘제갈재걸 선생님 3D 화보집’.
이들이 빌린 장소는 2학년 구역의 운동장 전체였다.
은광고 2학년 전원이 동시에 체육 수업을 진행해도 넉넉한 규모의 운동장에 가벽과 바닥을 설치하니 컨벤션 행사용 시설 못지않았다.
이 광활한 행사장에서 거대한 제갈재걸 조각상이 방문객을 굽어보고, 수많은 제갈재걸이 홀로그램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갈재걸이 진행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제갈재걸과 티타임을 가질 수 있고, 함께 피크닉을 갈 수 있고, 제갈재걸이 운전하는 에어셔틀을 탈 수 있어!’
대체 어떻게 구현한 건지 복장도 상황도 제각각인 제갈재걸이 행사장에 가득했다.
방문객 중 제갈재걸의 팬은 정신을 못 차리면서 홀린 듯이 행사장을 헤맸고, 팬이 아닌 사람은 이만한 기술과 이능을 담임 덕질에 써먹는 2학년 0반의 비범함에 질려 했다.
그리고 제갈재걸의 팬 중, 가장 구질구질한 첫 제자 홍규빈은 2학년 0반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대체 초대권은 어디에서 난 거야!”
“아까 초대권 내밀 때 보니까 한 장만 있는 게 아니었어.”
금찬솔과 왕찬솔이 짜증을 내자 홍규빈이 우월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홍규빈이 초대권을 저렇게 많이 확보한 건 다 2학년 0반 선배놈들의 자업자득이었다.
2학년 0반은 독고미로가 나오는 상영회 초대권, 우대권을 달라고 나를 매우 보챘고, 그 과정에서 화보집 초대권과 교환하게 되었다.
우리 반 아이들의 숫자보다 2학년 0반 선배놈들의 숫자가 많았기에 화보집 초대권의 여분은 전부 홍규빈에게 흘러갔다.
“설령 승부를 한다고 해도 저희에게 메리트가 전혀 없는 걸요. 거대한 제갈재걸 선생님만 한 대가를 치를 수 있으신가요?”
왁왁거리는 금찬왕찬 대신 연극부 에이스 연가람이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러자 홍규빈이 기다렸다는 듯이 홀로그램으로 무언가를 투사했다.
“헉……!”
“저, 저 사진은 설마!”
홀로그램에는 지금에 비해 훨씬 앳된 모습의 제갈재걸이 가득했다.
홍규빈이 비춘 건 20대 초반 정도로 추정되는 제갈재걸이 찍힌 사진이었다!
잘 보니 구석에 교복을 입은 모습도 있는 게,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의 제갈재걸의 모습으로 추정되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제갈 쌤 학창 시절 사진은 없다면서!”
“그냥 왕찬 저놈이 무능해서 못 구한 거였네!”
2학년 0반 놈들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왕찬솔을 구박했다.
정해온이 재빨리 홍규빈이 투사한 홀로그램을 카메라에 담았으나 사진 크기가 성에 차지 않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홍규빈은 사진을 더 숨기고 있는 걸로 추정되었다.
“습격해서 뜯어낼까?”
“아니. 제갈재걸 선생님으로 가득한 이 신성한 공간을 구질구질한 놈과 싸우는 데에 쓸 수는 없어!”
이미 싸우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러나 제갈재걸의 학창 시절의 모습을 포기할 수 없었던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협상에 나섰다.
“뭘로 승부할 건데요.”
“간단해. 내가 지금부터 이 화보집의 거대한 문제점을 지적할 거야. 변명할 수 있다면 너희들의 승리. 못 하면 내 승리야.”
뭐 그딴 걸 승부로 걸고 있나.
구질구질한 이들이 하는 승부는 과연 남달랐다.
문제점이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금찬솔이 버럭하고 소리질렀다.
“문제점? 여기에 그딴 게 어디 있어!”
“없다고 생각하면 승부에 응해서 이기면 돼.”
홍규빈의 태도는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자신에 차 있는 건 2학년 0반 선배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선배놈들의 작전 회의가 시작되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초거대 제갈 쌤을 다시 만들 수 있지만, 대학 시절 사진은 못 얻어! 그리고 우리가 질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네. 우리 화보집에 결함이 있을 리가 없어. 모델이 모델인데!”
“그래, 저 구질구질한 첫 제자가 어떤 헛소리를 하든 제갈 쌤 이름이 나오면 닥칠 수밖에 없을걸.”
2학년 0반 선배놈들의 말대로 규모, 시설, 배치, 모델 무엇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과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주역인 이 공간에 결함이 존재할까?
승부가 시작되었다.
“마침 신문부가 있으니까 증인으로 삼자!”
“의신이라면 믿을 만하지.”
얼떨결에 나도 이 구질구질한 승부에 끼게 되었다.
황지호는 눈을 반짝이며 이 상황을 구경했다.
저렇게 재밌게 구경하고 있으니 2학년 0반 기사는 노친네에게 시켜야겠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홍규빈이 입을 열었다.
“이 전시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인공이신, 제갈재걸 선생님이 부재중이라는 점이다.”
“……!”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문제점은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홍규빈이 온 지 한참 되었는데 제갈재걸은 내내 부재중이었고, 이 구차한 승부가 전개되어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거다.
나도 홍규빈의 의견에 동의했다.
사진, 영상, 피규어, 홀로그램 등등이 있어도 실물보다는 못하다.
이번에 축제를 준비하는 사이 올무의 사진과 영상을 모아 봤는데, 아무리 봐도 진짜 우리 천사에는 미치지 못했다.
“축제가 끝나면 선생님을 모시러 올게.”
“으아아악!”
“애들 상대로 이기니까 좋냐?”
“난 어른이니까 선생님 사진 몇 장 줄 수도 있어.”
사진 몇 장에 낚인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태세를 전환했다.
금찬솔과 왕찬솔이 홍규빈에게 굽신거리면서 말했다.
“어차피 저희는 제갈 쌤의 제자니까 선후배 사이네요. 규빈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규빈 선배님께서 마음 넓은 어른인 건 옛날부터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생각해 볼게.”
홍규빈은 처음부터 차마 이 공간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도망칠 거라는 걸 계산하고 있었나 보다.
거대한 제갈재걸을 모실 건물을 샀다고 했을 때에는 홍규빈의 혈관에 피가 아니라 김칫국이 흐르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나름 대책이 있었구나.
2학년 0반 선배놈들을 가지고 노는 걸 보니 홍규빈의 연륜이 실감났다.
선배놈들이 홍규빈을 모실 준비를 하는 사이 말을 걸었다.
“의신아, 고맙다. 덕분에 좋은 곳에 와서 좋은 걸 얻어 가는구나.”
홍규빈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은광고 출신 플레이어의 광팬인 정 사원이 행사장을 돌다가 사고를 쳤는지, 윤 대리한테 귀때기를 잡혀 걸어가고 있는데도 웃고만 있었다.
마침 좋은 타이밍이니 일을 시키기로 했다.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일 얘기구나. 의신아, 나는 오늘 축제를 즐기고 싶은데…….”
눈치가 귀신 같은 홍규빈이 숨을 헉 들이켜며 말했다.
홍규빈이 말꼬리를 흐린 틈을 타 내가 할 말을 했다.
“네, 낮에 축제를 즐기시고 밤에 일하시면 내일 협회 부스 개시 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
홍규빈에게 일더미를 넘기고 상쾌한 마음으로 제갈재걸 화보집을 감상한 후, 다음 구역으로 이동했다.
“조의신, 너도 저 화보집을 상당히 만끽한 것 같은데…… 너도 제갈재걸을 많이 따르나 보군.”
그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주인공인 행사를 만끽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 행선지도 마찬가지였다.
“의신아, 기다렸어.”
2학년 1반 앞.
긴 대기 줄이 있는 가운데, 우대권을 내밀자 염준열이 마중 나왔다.
염준열은 황지호에게도 후배 대하듯이 말했다.
“지, 호……도 왔구나. 어서 와.”
노친네의 정체를 알고도 후배로서 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염준열이 자랑스러웠다.
염준열은 황지호와 어색하게 인사한 후 말했다.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네?”
“우리 반에는 걔가 있잖아.”
계이담이 같은 반이었나.
2, 3학년은 0반을 제외한 성적 우수자로 특별반을 구성하는데 계이담도 여기에 들어갔나 보다.
다소 불쾌하긴 하지만, 그딴 놈 때문에 내 제자와 한 약속을 어길 리가 없었다.
어쨌든, 우대권이 있는 덕에 대기 없이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별이 가득하다……!’
교실문을 연 순간, 머리 위로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공간 왜곡을 해 평소 크기의 몇 배로 확장한 교실의 천장은 밤하늘처럼 변해 있었다.
2학년 1반이 준비한 축제 기획전은 교실 전체를 활용한 플라네타리움이었다.
“괜찮군.”
황지호가 그렇게 평가할 정도로 2학년 1반의 플라네타리움은 완성도가 높았다.
교실을 나눠 절기 별로 천체와 별자리를 표현하고 설명했는데, 설명도 충실하고 심미적으로도 멋졌다.
교실을 걷는 동안 밤하늘 속 별 사이를 유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천체들의 구성이 좋네요.”
“배치는 동하가 맡았어. 시야와 동선을 고려해 구성했대. 넓게 보는 동하답지?”
“천동하 선배님이 플라네타리움을 하자고 제안하신 건가요?”
염준열은 고개를 저었다.
“제안한 건 나야. 내가 존경하는 분이 별을 상징하는 이명을 달고 있어서. 별을 이해하면 그분을 더 잘 알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붉은 사자와 용족 중에 별과 관련된 이명을 단 사람이 있었나?’라고 짧게 생각했는데, 황지호와 염준열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걸 보고 생각을 정지했다.
염준열은 ‘무명의 초신성’에서 플라네타리움 기획을 생각해 낸 건가!
낯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뒤에서 황지호가 소리를 낮춰 처웃어 댔다.
황지호가 처웃는 걸 멈춘 건 어느 진족의 수장을 발견한 이후였다.
“청룡 님은 좋겠다…….”
“나도 내 별자리가 있었으면…….”
청룡과 용족들이었다.
이들은 청룡을 나타내는 동방칠수 앞에 못 박혀 있었다.
청룡은 감격에 찬 얼굴로 동방칠수 설명문을 몇 번이나 읽어 내리고 있었다.
“1시간 전 쯤에 오셨는데…… 아직도 계셨네. 마음에 드신 것 같아서 다행이다.”
염준열은 용족들이 귀찮지 않은지 웃으며 말했다.
2학년 1반은 용족이 저렇게 나올 것을 대비해 동방칠수 주변을 넓게 비워 뒀다고 한다.
청룡은 우리 일행이 지나친 후에도 자리를 비울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모처럼 우리 준열이가 준비해 준 자리니 좀 더 감상해야겠군.”
청룡은 어쩌면 자신을 생각해 기특한 용족의 후예가 플라네타리움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청룡의 별자리도 나와 있으니 문제는 없을 거다.
우리는 백호의 서방칠수, 청룡의 동방칠수, 현무의 북방칠수, 주작의 남방칠수를 모두 감상한 후 플라네타리움을 뒤로했다.
“우대권은 아직 남아 있지? 또 와도 돼. 시간마다 조명의 색과 별자리 구성을 조금씩 바꿀 생각이라 질리지 않을 거야. 아, 내일은 별을 주제로 한 자작 다큐멘터리도 상영할 예정이니까 보러 와.”
염준열의 적극적인 홍보에 시간이 되면 꼭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염준열과 헤어져 복도를 걷고 있을 때 황지호가 툭 던지듯 말했다.
“초신성 자체는 그리 좋은 뜻이 아니지.”
초신성은 일반적인 신성보다 1만 배 이상의 빛을 내는 별을 가리킨다.
신성은 빠른 시간 내에 인기를 끈 스타를 비유할 때 쓰이기도 하니, 초신성은 비유에 쓰일 때에는 매우 좋은 의미다.
하지만 초신성은 별의 폭발을 가리키는 것이다.
별의 마지막 순간을 의미하는 말이긴 하지만, 난 그 이명이 마음에 들었다.
‘초신성 폭발이 새 별의 탄생에 기여한다는 말도 있으니까.’
나는 황지호가 하는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2학년 구역 취재를 계속했다.
0반이나 1반만 한 임팩트는 없었으나 다른 반도 축제를 열심히 준비한 게 보였다.
특히 운동장 한구석에서 8반 소속 마진승이 준비한 직화구이 전문점이 인상 깊었다.
마진승은 불을 잘 다루지도 못하고 무서워하는 주제에 열심히 불을 지폈다.
센 불을 다루지 못해 음식이 늦게 익어 원성이 많았으나 은은한 불에 익힌 소시지 맛은 나쁘지 않았다.
2학년 구역을 다 둘러보고 이동하려 할 때였다.
“조의신, 중앙 구역으로 가자.”
“중앙 구역은 둘러봤으니까 3학년 구역이나 1학년 구역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황지호는 조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서관 투어 중 방문객 한 명이 실종됐다.”
그 거대한 미궁이나 다름 없는 도서관에서 실종이라니.
심각한 일이고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응하겠지만 뭔가 이상했다.
왜 황지호는 내게 이걸 알려 주는 걸까?
“실종자가 네 친구와 가까운 사이이니, 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나의 은인은 비밀주의지만,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황지호는 내 속을 읽은 것처럼 답했다.
그런데 실종자가 내 친구랑 관련 있는 인물이라고?
머릿속에 실종자 후보가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황지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실종자는 주수혁의 친척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