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은광고 축제 (3)
한반도를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12지 동맹의 진족, 그 수장들이 서로를 인식했다.
“저 망할 달토끼는 그렇다 쳐도 네놈은 어떻게 여기에 온 거냐. 은광고 출입 허가는 내렸지만, 초대권은 주지 않았거늘.”
“제 인맥이 좀 넓거든요.”
서돌은 느루의 수석 디자이너니까 왕찬솔이 초대하지 않았을까?
일단 갑자기 튀어나온 두 진족에게 인사를 했다.
“그래, 은인아.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다! 쥐랑 미친 호……만 없으면 더 좋았을 텐데.”
“조의신은 인사성이 밝네요.”
옥토연은 황지호를 ‘미친 호랑이’라고 부르려다가 은호의 후예들이 호랑이라는 점이 뒤늦게 떠올라 입을 다문 것 같다.
서돌이 옥토연 옆에 있는 은호의 후예들을 천천히 살폈다.
“어디에서 본 듯한데요?”
서돌이 은서호와 은이호를 보며 말했다.
황지호가 만우절에 은서호를 처음 보자마자 ‘은호’라고 부른 것도 닮아서 그런 걸까.
내 기준에서는 인상이 많이 달라 보이는데, 진족 입장에서 보면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 보다.
한편, 두 후예는 서돌을 보고 ‘은광고에는 역시 진족이 많아!’라며 걱정하는 것 같았다.
옥토연은 기겁하며 후예들의 눈을 가렸다.
“지지! 보면 역병 옮는다!”
“지금 제가 뿌린 역병은 여기 없으니 안심하세요.”
“역병은 금방 퍼지잖아!”
“남의 신역에서 역병 소리 하지 마라. 이 땅에 역병이 퍼지면 둘 다 100년간 접근 금지령을 내리겠다.”
“나는 왜!”
옥토연과 황지호가 다투는 사이, 얼어 있던 송대석이 말했다.
“은인이 너였냐?”
송대석은 내가 뭐라 반응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부반장, 난 협회 부스 지키러 간다.”
사람 하나 없는 협회 부스에서 뭘 하려고 돌아가나.
송대석은 뒤도 안 돌아보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절대 엮이지 않겠다, 모르는 흉내를 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서돌이 도망치는 송대석을 감평하듯 말했다.
“무쇠팔 젊은 시절이랑 똑같이 생겼네요? 무쇠팔은 너무 그림으로 그린 듯한 영웅이라 내 취향이 아니긴 해.”
송만석과 송대석은 다른 점이 많은데.
하지만 모처럼 서돌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눈독을 들이려다가 발을 뺐으니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러자 화살이 갑자기 내 쪽으로 왔다.
“제가 선물한 넥타이핀이네요. 조만간 저번에 고른 디자인으로 하나 더 선물해 드릴게요. 다음엔 벨트 어때요?”
“조의신, 그런 불길한 걸 착용하고 있었나? 어울리긴 하다만. 그런데 조의신이 뭘 골랐다는 거지?”
“느루에서 무명의 초신성 에디션 작업을 진행 중인데, 다음 액세서리 라인업을 뽑고 있어서…….”
“뭐야, 은인이 모델 해? 달토끼떡 모델도 시킬래!”
그놈의 모델 소리를 하는 진족이 하나 더 늘었다……!
황지호는 거기에다 대고 부추기듯 말했다.
“황명 그룹이 먼저다. 뭐, 우선 은광고의 학생 홍보 대사가 되겠지만.”
“달토끼떡은 그다음에 하면 되지!”
“느루 앰배서더는 동시에 해도 돼요.”
“그럼 달토끼떡 모델도 같이 해!”
방금까지 사이가 안 좋아 보였는데 왜 이상한 곳에서만 마음이 맞는지 모르겠다.
남들이 들으면 정체가 다 들통나고 위험한 소리도 섞인 것 같은데, 잘 보니 황지호가 수장들의 등장과 동시에 방음 결계를 친 것 같았다.
허술한 건지 철저한 건지 구분이 안 간다.
어쨌든 단체로 헛소리를 하는 노친네들은 무시하고 은호의 후예들과 얘기하기로 했다.
“어른들이 말씀하는 자리에선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해서 조용히 있었어요! 잘했죠?”
“축제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 지금 모습을 감추셨지만 옆에 적호 님도 계세요.”
“적호 님께도 맛있는 거 사드리고 싶은데…….”
12지 수장들보다 은호의 후예들이 훨씬 의젓했다.
저 철없는 어르신들은 버리고 은호의 후예들과 축제 구경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쨌든, 적호는 맛있는 것보다는 아들 얼굴을 보는 걸 더 기뻐할 거다.
축제 중에 김신록이 있을 만한 장소를 추천해 주니 아이들이 몹시 기뻐했다.
슬슬 취재할 시간이 돼서 황지호를 버리고 가려고 마음 먹었을 때였다.
“이 몸은 한가한 네놈들과 달리 바쁘시다.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놀다가 꺼지거라.”
눈치가 귀신 같은 노친네가 빠져나왔다.
하지만 옥토연과 서돌은 쉽게 놔주지 않았다.
“나도 은인이랑 같이 다니고 싶은데!”
“저도요. 제인이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황호랑 조의신을 귀찮고 번거롭게 하면서 따라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귀찮고 번거로운 걸 알면 저리 가!”
“은광고에서 쫓겨나고 싶으면 따라오도록.”
“그럼 황호가 아니라 조의신을 따라다니는 걸로 할게요.”
“나도!”
결국, 나한테 짐이 떠넘겨져서 거절하기로 했다.
“취재 중이라서 시간을 내기 어려워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둘 다 그렇게 만족스러워 보이진 않았지만, 정중히 부탁하니 물러나 줬다.
서돌은 나와 은호의 후예들을 보며 불길한 소리를 남겼다.
“다음에 봐요.”
“보긴 뭘 봐!”
“볼 일 없다.”
이럴 때만큼은 옥토연과 황지호의 합이 척척 맞았다.
어쨌든 두 수장을 떨쳐 내는 데에는 성공한 후, 예정대로 체스 소모임 스테일메이트를 취재하기 위해 이동했다.
예상보다 늦어서 10면 대국 중에 올 줄 알았는데 아직 시작 전이었다.
나를 본 스테일메이트 부원이 화색을 띄었다.
“잘 왔어, 챔피언!”
왜 이렇게 환영하나 싶었는데, 참가자가 부족했나 보다.
10면 대국은 혼자서 동시에 열 명과 대국을 하는 것.
즉, 열 한 명의 플레이어가 필요했다.
열 명을 상대할 플레이어는 스테일메이트 측에서, 도전자 열 명은 관객 중에서 뽑는데 도전자가 한 명 부족하다고 한다.
관객이 제법 모인 걸 보면 도전자가 더 있을 법도 한데, 사람들 앞에서 대국하는 게 민망한 건가?
아니면 첫번째 10면 대국이라 꺼려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취재 생각을 하며 온 거라 체스를 둘 마음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망설이고 있을 때, 스테일메이트 대표로 10명을 상대할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대전자가 다 모였어?”
“용쌤, 한 자리 남았어요! 올해 챔피언한테 부탁해 보려고요.”
스테일메이트의 대표는 용제건이었나!
하긴 스테일메이트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는 용제건이었으니, 소모임 고문이긴 하나 10면 대국의 첫 타자가 되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용제건은 나를 보고 실눈을 휘며 웃었다.
“의신이랑 한 번 두고 싶었어. 잘됐다, 둘래?”
리플레이 건도 그렇고, 용제건이 상위 존재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도 있고, 많이 극복했다고 하나 체스 자체도 여전히 내 머리를 뒤흔든다.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축제의 흥을 깰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이 몸이 대신…….”
황지호가 끼어들기 전,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방금 스테일메이트의 10면 대국 회장에 입장한 성국언이었다.
“아직 자리가 남은 것 같군.”
관객들이 성국언을 알아보고 탄성을 뱉었다.
“국회의원 성국언이다!”
“은광고 졸업생이었지…… 축제에도 왔구나!”
성국언이 도전 의사를 보이자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열어 줬다.
성국언은 용제건을 응시하며 똑바로 회장 안으로 걸어왔다.
뒤를 따르던 전무영은 저지선 앞에 멈춰 섰으나 성국언은 체스 테이블로 향했다.
“내가 상대라는 걸 알고 온 거야?”
“물론입니다.”
“나를 피하는 줄 알았는데.”
성국언은 용제건 외에도 진족과 후예를 피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연유로 용제건이 상대라는 걸 뻔히 알고도 이벤트에 참가하는 걸까.
“……학생인 시절 저는 무력하고 미숙했습니다.”
“네 학생회장 시절을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
“하핫! 그렇게 봐 주셨습니까?”
성국언이 용제건 앞에서 웃는 건 처음 봤다.
아니, 진족이라는 걸 아는 상대로 저런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성국언의 목소리가 낮아져 뒤의 말은 관객석에서는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들렸다.
체스 테이블 근처에 서 있던 몇 명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였다.
“저는 존경하는 선생님의 죽음 앞에서 판단력이 흐려질 정도로 미숙하고, 그 원인을 조사할 능력이 없을 만큼 무력했습니다.”
“지금은 다르다는 말이구나.”
“네, 그래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성국언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조용히 그 말을 듣던 황지호도 성국언을 바라봤다.
성국언은 두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된 노련한 정치인이자 플레이어다.
학생 시절 외면했던 진실을 꿰뚫어 보고, 조사할 연륜과 능력을 갖게 되었다.
평소라면 호족이 김신록의 정체를 캐지 못하게 막았겠지만, 성국언이라면 아마 막지 않았을 거다.
‘성국언은 설마 김신록의 정체를 이미…….’
김신록이 성국언과 몇 번 더 접촉했다고 들었다.
그때 딱히 성국언이 정체를 눈치챈 것 같다는 보고를 한 적이 없으니, 아마 성국언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게 분명했다.
성국언의 성격이라면 옛 스승을 추궁하는 대신 이유를 파악하고 기다릴 거다.
“어쩌면 제가 헤아릴 수도 없는 긴 시간 동안 그분 곁에 있어 준 건, 제가 가장 싫어하던 진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성국언이 가장 싫어하던 진족, 용제건이 말없이 눈을 휘며 웃었다.
성국언은 관객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크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저랑 한 판 두시죠, 용제건 선생님!”
성국언의 호탕한 목소리에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사회자를 맡은 스테일메이트 스태프가 얼른 외쳤다.
“곧 체스 소모임 스테일메이트가 준비한 10면 대국이 시작됩니다!”
파아아앗!
사회자의 말과 함께 용제건이 손을 허공에 뻗어 이능파를 발산했다.
그러자 용제건이 공간술로 만들어 낸 거대한 체스판이 바닥에서 올라왔다.
경기장과 관객석의 구분이 애매하고 회장이 조금 허전하다 싶었더니 이걸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마치 10면 대국을 하는 테이블들이 체스판이라는 무대 위에 놓여진 것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차례로 체스 피스들이 무대 곳곳에 놓이기 시작했다.
스테일메이트배 체스 대회 때 봤던 오프닝 쇼 못지않게 화려했다.
와아아아아!
환호 속에서 용제건이 원형으로 배열된 10개의 테이블들 중앙에 서자 10면 대국이 시작되었다.
사회자가 선언할 때를 노려 스태프 쪽으로 이동한 나는 홀로그램으로 전개된 열 개의 화면을 디바이스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용제건이 산책하듯이 열 개의 체스 테이블을 걸으며 체스 피스를 옮겼다.
10개의 홀로그램은 점차 수가 줄기 시작했다.
용제건이 체크를 부를 때마다 대국이 종료되어 화면이 꺼졌으니까.
‘도전자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은데, 압승을 거두고 있어. 용제건도 체스를 잘 두는구나.’
체스 보드를 응시하는 건 머리가 아팠으나 모처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둘이나 출전한 10면 대국을 놓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대국은 엉켜 있던 둘의 관계를 풀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열 개의 홀로그램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 남은 도전자는 성국언이었다.
“용제건의 집중력이 점점 흐려지는군.”
용제건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열 명을 상대할 때보다 성국언 하나를 상대하는 게 더 힘든 것처럼 보였다.
결국 승기는 성국언 쪽으로 기울었다.
관객들이 체크를 부르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
방음 결계 너머 용제건이 성국언에게 말을 건넸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성국언이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좁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용제건이 기권을 선언했다.
“용제건 선생님의 기권 선언으로 성국언 국회의원의 승리입니다!”
기권 직전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성국언은 혼란스러워 보였고 용제건은 후련해 보였다.
둘의 대국이 화제가 되어 도전자가 몰려드는 가운데, 우리는 자리를 비웠다.
인터뷰는 나중에 해야 할 것 같다.
“저들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은데, 축제 중에 물을 만한 게 아니니 자리를 뜨는 게 좋겠군.”
황지호의 말대로였다.
일단 신문부로서 다음 취재를 하기로 했다.
“동아리 쪽은 민그린의 합동전이 남았지만, 여전히 사람이 많으니 나중에 보는 게 좋겠군. 다음은 2학년 구역으로 갈까.”
나와 황지호는 2학년 구역으로 향하는 길에도 사진을 몇 개 찍고, 메모를 하며 이동했다.
자잘한 기록을 남기면 내일 취재를 할 때 도움이 될 거다.
그때,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주수혁이 왜 여기에 있지? 점심 전까지는 베이커리 카페 당번일 텐데.’
인사라도 할까 했지만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었다.
주수혁은 미안해하는 얼굴로 허채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허채아는 웃으며 말하는데, 주수혁은 재차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데.’
나중에 베이커리 카페에 가면 말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2학년 구역.
나는 거대한 제갈재걸 선생님과 마주쳤다.
“제갈재걸 선생님을 두고 승부하자!”
“진짜 구질구질하네! 뭐라 해도 우리의 제갈 쌤은 안 넘겨!”
그리고 거대한 구질구질함과도 마주쳤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