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축제의 끝 (1)
주수혁은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누르며 안다인을 기다렸다.
올해 가장 두근거렸던 날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실 안다인이 웃는 걸 처음 본 순간도 지금 못지않게 떨렸지만 데이트, 아니, 축제 구경을 같이 가기로 해서 그런지 몹시 설렜다.
‘다인이가 나한테 축제를 같이 가자고 권유하다니!’
주수리를 무사히 찾은 후, 안다인은 주수혁에게 같이 축제 구경하지 않겠냐고 권했다.
그 말을 들은 주수혁은 크게 땅을 구를 뻔했다.
꼴 사납게 바닥에 머리를 박을 뻔했지만, 안다인이 재빠르게 주수혁을 지지해 줬다.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안다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어서 주수혁은 또 넘어질 뻔했다.
안다인이 주수혁을 단단히 붙잡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분명 비참한 자세로 바닥에 누웠을 것이다.
‘여기는 현실인데, 꿈 같아.’
1학년 1반의 보물 사냥을 관람하던 주수혁의 설렘이 최고조에 달했다.
강적 용제건에 맞서 1반 아이들을 지휘하며 싸우던 안다인은 늠름하고 아름다웠다.
그 생각을 하니 그날 안다인에게 잡혔던 팔이 불타오르듯 뜨겁게 느껴졌다.
‘시험 기간 내내 좀 서먹해서 걱정했는데, 그냥 기분 탓이었나 보다!’
주수혁은 눈치 없는 생각을 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안다인은 조용히 시안색의 책을 읽고 있었다.
용제건에게 대포를 쏘고 에너미의 급소를 꿰뚫는 씩씩한 모습은 눈보라 속에 핀 동백꽃 같았고, 청초한 자태로 페이지를 넘기는 모습은 수선화 같았다.
주수혁은 잠시 넋을 놓았다가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에야 겨우 말을 걸었다.
“다인아, 많이 기다렸어?”
주수혁이 말을 걸자 안다인이 ‘여의보주의 기적’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시간보다 일찍 왔잖아.”
겨울 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안다인이 주수혁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안다인은 주수혁을 만나 기뻤으나 머릿속은 용제건과 나눈 대화로 가득했다.
‘김신록 선생님을 노리는 진족이 있다고? 김신록 선생님은 우리가 위험해질까 봐 거리를 둔 게 아닐까?’
안다인이 본 김신록은 퍼즐 조각 같은 교사였다.
김신록이 필사적으로 원래의 그림을 숨기려 해도 인내심을 가지고 맞추다 보면 본모습이 보였다.
안다인은 아무리 교사라 하더라도 자신같이 눈에 띄는 학생을 공평하고 친절하고 사감 없이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김신록은 그 어려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정 많은 교사였으나, 학생들이 저를 따르는 걸 경계하며 선을 그어 왔다.
‘김신록 선생님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모처럼 주수혁과 함께 있는데, 복잡한 기분에 제대로 축제 구경에 집중하지 못했다.
주수혁은 안다인의 마음을 헤아려 대화를 주도하고, 간단히 답할 수 있는 화제를 골라 이야기했다.
‘보물 사냥 이벤트가 무승부로 끝나서 많이 아쉬운가 보다. 축제 구경하면서 기분을 풀 수 있게 도와야지.’
주수혁은 안다인의 마음을 달랠 만한 축제 기획물을 떠올리려 애썼다.
오늘을 대비해 어젯밤에 모든 축제 기획물의 개요와 장소 등을 외워 왔는데, 좀처럼 그럴싸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딩동.
그때, 주수혁의 디바이스에서 착신음이 울렸다.
선도부 일이거나, 주수리 실종 사건처럼 급한 일일 경우를 대비해 안다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주수혁이 의아해했다.
‘의신이가 보낸 메시지잖아?’
조의신이 보낸 메시지는 짧았지만, 지금 주수혁에게 가장 필요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치 조의신이 주수혁이 처한 상황을 알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수혁은 친구의 도움을 기꺼이 받기로 했다.
“다인아,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
안다인이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며 주수혁이 미소 지었다.
주수혁의 햇살 같은 얼굴을 본 안다인의 흐린 얼굴이 밝아졌다.
* * *
문새론과 합심하여 준비한 수상한 대책이 지금 이 순간,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와……!”
안다인이 작게 탄성을 뱉으며 표정을 무너뜨렸다.
안다인의 시선이 교실에 비해 좁은 부스 안을 이리저리 헤맸다.
시선 끝에는 천사들이 있었다.
벚꽃 잎을 맞으며 잠든 올무, 작은 옷과 모자를 착용하고 패션쇼를 하는 올무, 은신처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올무 등등.
여기는 내가 준비한 개인 부스, 올무의 미니 입체 화보집이었다.
왕! 왕왕!
끄응…….
왕?
올무의 홀로그램이 발치를 헤매다 스쳐 지나가자 안다인이 주수혁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안다인을 보면 평소의 얼음 조각 같은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수혁아, 방금 봤어? 올무가 이쪽을 지나갔어.”
주수혁 눈에는 웃고 있는 안다인밖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지만,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안다인은 연신 미소 지으며 천사를 바라보고 소감을 읊고 주수혁과 감상을 주고받았다.
‘둘을 여기로 불러서 마주치게 하고 같이 축제 구경을 하게 유도하려 했는데. 같이 오다니, 잘됐다.’
은광고 축제에는 1학년 1반의 보물 사냥처럼 하루만 참가하는 이들이 꽤 있다.
그래서 빈 부스가 생기게 되는데, 일부 학생들은 개인적인 발명품 등의 발표에 이를 활용하곤 한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천사가 있는 곳에서 마주치게 하면,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좋아지겠지.’
그렇게 수를 짜내고 문새론과 상담했다.
안다인의 SNS 계정에 올무의 사진이 자주 올라오는 걸 본 문새론은 금방 찬성했고 사진과 영상 선정을 도왔다.
부스 준비를 마친 후에는 두 사람을 초대하기로 했다.
먼저 주수혁에게 초대 메시지를 보냈더니 안다인과 함께 가도 되겠냐는 내용의 답장이 돌아왔다.
‘주수리 건과 은빛 영웅의 개입을 계기로 둘이 오해를 풀고 약속을 한 것 같네. 안다인이 기뻐하긴 하는데 괜히 끼어든 걸까?’
천사의 전시전을 열 수 있는 건 기쁜 일이지만, 내가 방해한 꼴이 된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어진 주수혁의 말에 좀 안심이 되었다.
“의신아, 초대해 줘서 고마워. 다인이가 기운이 없어서 걱정했었어. 수리 건도 그렇고, 축제 때 신세를 많이 졌네.”
주수혁은 주수리 건으로 감사 인사를 하며 베이커리 카페에서 빵 서비스를 이것저것 줬다.
그 빵들은 보물 사냥 구경할 때 유상훈이 거의 다 먹어 치웠지만, 어쨌든 그 일로 감사 인사를 받을 처지가 아니라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안다인이 기운이 없었다니, 보물 사냥 무승부의 여파일까?
하지만 대결이 끝난 직후에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성국언의 말이 떠올랐다.
―안다인 학생도 나와 같은 부탁을 받을 것 같군.
설마 용제건에게 그 부탁을 받았나?
김신록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상위 존재가 되겠다는 소리를 했을 텐데, 하필 축제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해야 했나?
대결이 끝난 직후가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긴 했지만.
그때, 황지호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조의신, 홍규빈이 지적했던 문제점을 기억하나?”
2학년 0반 전시전의 문제점 말하는 건가?
답을 떠올리다가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하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실물보다는 못하겠지.”
황지호가 박수를 한 번 치자 부스에 설치되어 있던 조명 기구 뒤에서 천사가 등장했다!
왕!
지금 나타난 천사는 진짜였다.
게다가 천사는 무려 은광고의 동복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은광고 축제라서 교복을 맞춰 입은 건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입는 은광고 교복 디자인의 완벽함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잘 몰랐던 것 같다.
올무가 입음으로써 은광고 교복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었다.
왕왕!
나를 향해 달려오는 올무를 꽉 끌어안았다.
“황지호, 잘했다……!”
“하하하하하! 그래, 마음껏 고마워 하도록.”
나는 교복을 입은 천사에게 물었다.
“올무야, 우리 반에 들어올래?”
왕!
“그래, 올무는 천재니까 편입 시험 정도는 얼마든지 통과할 거야.”
“하하하하! 조의신, 그만 네 지능을 관리해라.”
황지호가 내 지능을 문제 삼았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늘 황지호는 너무나도 큰 선물을 준비해 주었기에 어떤 소리를 해도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올무의 등장을 보고 한참 말을 잃었던 안다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의신아, 올무가 허락하면 나도 안아 봐도 될까?”
왕!
올무가 허락했다.
플마고 속 솜뭉치가 그랬듯이, 올무는 안다인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다 애교를 부렸다.
안다인은 조심스럽게 올무를 안아 들곤 말을 걸었다.
“교복이 정말 잘 어울린다. 올무야, 1반은 어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좋은 분이셔.”
함근형 선생님도 좋은 분인데.
어느 반에 들어갈지는 어디까지나 올무의 선택이지만, 편입한다면 우리 반을 후보에 넣어 줬으면 좋겠다.
“하하, 두 사람 다 농담을 할 정도로 강아지를 좋아하는구나.”
“안다인은 모르겠으나 조의신은 진담이었을 거다.”
주수혁과 황지호가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플마고 속에서는 0반에서 나름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니 죽이 맞는가 보다.
“음, 내가 타이밍을 잘 맞춰서 도착한 것 같군!”
그때, 문새론이 도착해 내가 마지막으로 둔 수가 완성되었다.
문새론은 주수혁과 안다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수상한 부반장님이 준비한 부스 취재할 건데 인터뷰랑 사진 좀.”
두 사람은 흔쾌히 승낙했다.
이걸로 둘의 첫 데이트, 축제에서 보내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저 둘이 셀카를 찍으며 추억을 기록으로 남길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일기 정도는 쓸 것 같지만.
흐뭇해하고 있을 때,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염준열] 의신아, 축제는 잘 돌고 있어?
[염준열] 스승님, 안녕하세요.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염준열의 메시지를 받은 나는 올 게 왔다 싶었다.
지금 염준열이 나를 부르는 건 학생회장으로서의 업무 때문일 거다.
나만 메시지를 받은 게 아닌지, 주수혁과 안다인이 디바이스를 확인하는 게 보였다.
“의신아, 너도 메시지 받았어?”
“응.”
“잘됐다. 같이 가면 되겠다.”
축제의 끝에는 중요한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다음 해의 은광고 홍보 대사 발표였다.
교사 쪽은 모르겠지만 학생 대표는 주수혁, 안다인, 나, 독고미로 넷으로 결정된 듯했다.
아마 학교 축제에서 염준열이 우리를 소개하며 화제성을 올릴 생각일 거다.
타이틀 히어로와 히로인의 좋은 한때를 목격하며 들뜬 기분이 가라앉으려 했다.
왕왕!
올무의 다독임 덕에 기분이 좀 나아지긴 했다.
올무와 부스를 황지호에게 맡기고 가려고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홍보 대사 발표 때문에 올무를 두고 가야 한다는 상황을 목격했으면 처웃었을 텐데.’
황지호가 처웃지 않을 만한 일이 벌어진 걸까.
황지호에게 올무를 넘기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왜 그래?”
황지호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은 걸 의식해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동요한 것 같다.
파아아…….
황지호는 주변에 소리가 흘러 나가지 않도록 결계를 친 후에야 답했다.
“한반도 밖에서 청호와 신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