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행운아 (9)
은광고 방문객 전용 주차장.
다들 축제를 즐기고 있는지 주차장에는 성국언과 전무영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영아, 일정 조정하느라 고생했다.”
“아닙니다.”
전무영은 피로를 숨기며 딱딱하게 말했다.
어제 성국언이 갑자기 이틀 연속 은광고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에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유를 들으니 말릴 수 없었다.
―용제건 선생님이 체스를 둘 때 상태가 좀 이상했다. 대국이 끝나고 나서는 자신이 상위 존재가 되면 김신록 선생님을 지켜 달라는 말도 하더군.
성국언은 마치 용제건을 걱정하는 것 같은 말투를 썼다.
진족, 그중에서도 특히 용제건을 증오하는 성국언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경악할 일인데 걱정까지 하는 건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었다.
결국 스케줄을 조정해 이틀 연속 은광고에 방문하긴 했지만, 전무영은 아직 성국언의 바뀐 태도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제 익숙해져야 할 텐데.’
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성국언이 영국에 가기 위해 붉은 사자 팀 전용기를 타던 중 김신록과 만난 것.
둘째는 광일초등학교의 교사 실종 건에 관해 조사한 것.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성국언과 김신록이 만나고, 그 정체에 관해 알게 되었다.
김신록은 가짜 신분을 사용하고 있었고,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김신록의 호적을 관리하는 건 바로 호족이었다.
‘김신록 선생님의 뒤에 호족이 있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호족이거나 호족의 후예인 거겠지.’
광일초등학교 사건에 연루된 교사, 괴롭힘에 가담한 학생들이 차례차례 사회적으로 무너지거나 실종되었다.
그 일에 진족의 개입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진족이 벌인 일인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전무영은 김신록과 호족이 연관된 걸 보고 의문을 품었다.
‘우리한테 거리를 둔 건 호족 때문인 건가. 선생님은 항상 쓸쓸해 보였는데, 내 착각이었나. 호족이 제 가족에게 소홀할 리가 없을 텐데.’
김신록은 학생들에게 선을 긋고, 교사들과 개인적인 교류를 가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김신록이 겉돌고 있는데 유희계 용이 옆에서 장난질을 쳐 대고 찌르고 있으니 주변에서 접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김신록의 제자들은 오늘 1학년 1반이 그랬던 것처럼 용제건 타도를 부르짖었다.
성국언도 그런 제자 중 하나였다.
‘의원님은 예전부터 진족을 경계하고 있었지…….’
성국언의 조부, 옛 한국 지부장은 한반도를 노리는 진족이 있다는 단서를 남겼다.
그 단서에 관해 조사하던 성국언은 조부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여겼다.
성국언은 조부의 사인(死因)에 진족이 엮여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던 와중에 가장 존경했던 스승의 장례식에서 용제건이 실실거리는 걸 보고 말았다.
그 결과 아직 젊고 무력한 성국언은 진족에게 편견을 품고 엮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신록이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낸 이후, 성국언은 생각을 바꿨다.
용제건을 찾아가 선생님이라 부르고, 대국을 청하며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어쩌면 제가 헤아릴 수도 없는 긴 시간 동안 그분 곁에 있어 준 건, 제가 가장 싫어하던 진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용제건은 부정하지 않았다.
저 말에 틀린 점이 있었다면 용제건이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농담을 걸며 즐겼을 거다.
그러나 용제건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오늘 보니 완전히 마음을 굳힌 것 같더군. 용제건 선생님은 승천할 거다. 선생님도 알고 계시겠지. 이런 책을 만든 걸 보면.”
“승천을 돕고 싶은 걸까요?”
“글쎄,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성국언은 한 번 완독한 ‘여의보주의 기적’을 들추며 말했다.
책의 페이지 수는 적지만, 문장이 몹시 간결해 수많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건 아마 선생님들의 추억담일 거다. 이런 걸 전부 기억해 둘 만큼 교우를 다졌는데 하늘로 보낸다고? 선생님은 그렇게 매정한 분이 못 된다.”
“그건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졸업할 때마다 쓸쓸해하시는 분이니까요.”
전무영이 성국언의 말에 크게 동의했다.
전무영은 여전히 김신록이 진족이나 후예라는 게 실감이 잘 안 났다.
그러나 성국언이 존경하는 그 선생님이 김신록이라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았다.
둘이 기억하고 있는 김신록의 성품, 버릇, 음식 취향 등등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용제건 선생님은 우수한 제자들에게 친우를 맡길 생각인 거겠지.”
“김신록 선생님 뒤에 호족이 있는데, 왜 그런 부탁을…….”
말을 마치기 전, 성국언이 손을 들어 전무영을 제지했다.
말을 그만하라는 신호에 전무영이 입을 다물고 주변을 경계했다.
멀리서 천장을 타고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0반 후배가 찾아왔군.”
휙!
“안녕하세요.”
지하 주차장 천장에 설치된 광파이프 사이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독고미로 학생이군요.”
후드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전무영이 이름을 불렀다.
성국언도 0반 후배 운운하는 걸 보니 진작에 알아본 것 같았다.
“……바로 알아 보셨네요.”
독고미로가 후드를 벗자 낮은 조도의 조명 사이로 분홍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기껏 눈에 띄는 머리카락과 얼굴을 감췄으나 저 둘은 체격만으로 독고미로라는 걸 꿰뚫어 봤다.
“모습을 감추고 뒤를 밟아서 죄송해요.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말을 걸면 눈에 띄어서요.”
독고미로의 의견은 지당했다.
2선 국회의원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생존자.
두 사람이 사인을 부탁받거나 같이 사진을 찍자는 요청을 받는 건 일상다반사다.
유명인인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진을 기사문 없이 포토 뉴스로만 내도 조회수가 상당히 나올 거다.
독고미로는 눈에 띄지 않게 저 둘을 만나고 싶었다.
“여태까지 감사하다는 인사를 못 했는데, 기회가 없어서요. 뵙기 어려운 분이니까 오늘 꼭 인사하고 싶었어요.”
“광일초등학교 건을 말하는 거구나. 그 쓰레기 교사들을 감옥으로 보내지 못했는데,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저를 기억하세요?”
“물론이다.”
독고미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성국언이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핫! 내가 당선되어 처음 받은 민원인데, 당연히 기억하고 말고.”
초등학교 시절, 독고미로가 패왕으로서 은광구의 기강을 잡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썩은 교사들이 꾸미는 짓을 막기는 어려웠다.
당시 광일초등학교는 크게 썩어 있었다.
횡령, 촌지, 비리, 성적 조작 등 온갖 문제가 산재한 상태였다.
어느 기자가 광일초등학교에 관해 취재하려 하자, 교사들은 저 사건들을 묻기 위해 학생 하나에게 누명을 씌워 기삿거리를 던져 주기로 했다.
그들의 제물이 될 뻔한 게 한이였다.
제물의 후보로는 독고미로가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가족이 있었으므로 교사들은 한이를 택했다.
한이는 가족이 없고, 친구도 없었고 청각 장애를 타고났으나 우수한 예비 플레이어였기에 최적의 제물이었다.
“친구가 썩은 교사들의 주도로 누명을 쓸 위기에 놓여 있으니 구해 달라고 했지. 영리하고 용감한 행동이었다.”
이미 교사들은 그들을 잘 따르고 거짓말을 잘하는 아이들을 골라 철저하게 말을 맞춘 상태였다.
우수한 플레이어가 될 싹이었으나, 타고난 환경으로 인해 비뚤어진 초등학생이 장기간 학교 폭력과 금품 갈취 행위, 협박, 성적 조작을 벌였다며 한이의 명예를 더럽힐 계획이었다.
독고미로가 알아챘을 때에는 이미 완벽하게 판이 짜여 있었다.
일부러 한이와 거리를 둬서 자신과 엮여 험한 꼴을 당하는 걸 막았는데, 다른 위협이 한이를 노리고 있었다.
독고미로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정치인 중 유일한 플레이어 출신, 성국언을 찾아갔다.
“저는, 아무 증거도 대지 못했는데, 선배님이 제 말을 믿어 주셔서…….”
성국언은 독고미로의 말만을 믿고 광일초등학교를 조사하고 한이를 보호했다.
독고미로의 말이 사실이라는 건 나중에 성국언이 찾은 증거로 밝혀졌다.
그들은 결국 관대한 처분을 받았으나 광일초등학교의 비리가 드러나고 한이가 무사했던 건 전부 성국언 덕이었다.
“사람들의 말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오른 거다. 네 말을 믿고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
성국언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독고미로는 그게 얼마나 어려웠던 일인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초등학생 말 하나만을 믿고 공공기관을 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조사 초반에는 성국언이 당선되자마자 증거도 없이 갑질을 하고 여기저기 찌르고 다닌다며 말이 많았다.
하지만 성국언은 끝까지 제보자인 독고미로에 관해 밝히지 않은 상태로 모든 일을 진행했다.
“그때는 둘 다 0반 후배가 될 줄 몰랐다. 친구랑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플레이리스트랑 0반에서 하는 상영회도 봤다. 앞으로도 응원하마.”
“……네! 감사합니다!”
독고미로는 목이 메는 걸 꾹 참고 밝게 답했다.
전무영은 성국언이 독고미로와 이야기하는 걸 흐뭇해하며 바라봤다.
인사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 독고미로가 물었다.
“하나 질문해도 될까요?”
“답할 수 있는 거라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된 건…… 선배님이 한 게 아니죠?”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성국언은 그 말에 답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성국언은 어느 0반 후배의 얼굴을 떠올렸다.
최근 황명 그룹이 후계자로 내세운 ‘황지호’.
성국언은 이번 축제에서 그가 한이에게 장난질을 걸고, 독고미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다.
그의 정체에 관해서 직접 이야기할 생각은 없지만, 힌트는 주기로 했다.
“올해 0반 후배들이 우수하구나. 선배로서 참 기쁜 일이다.”
비록 그 후배 중 하나가 진족이긴 하지만.
그 호족은 광일초등학교 건으로 움직인 데다가 성국언이 믿고 있는 후배와 가까이 지내는 것 같았다.
그는 트라이앵글을 치는 조의신을 보며 아주 신나게 처웃었다.
그의 배경에 관해 몰랐다면 그냥 잘 처웃는 0반 후배라고 생각했을 거다.
‘의신이는 황지호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조의신이 진족과 연이 없다고 단정 지었으나 생각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전무영이 의도적으로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전무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기척을 죽이고 주차장 입구 쪽에 있었는데, 누군가를 발견한 듯했다.
곧 성국언도 이쪽으로 오는 누군가를 확인했다.
성국언이 입구를 보다 독고미로에게 말했다.
“친구가 마중 왔구나.”
입구에 한이가 있었다.
한이는 독고미로를 찾으러 온 것 같았다.
한이를 발견한 독고미로가 환하게 웃었다.
“한이야, 나 찾으러 온 거야?”
“…….”
한이는 독고미로와 성국언을 가만히 보다 입을 열었다.
“학생회에서 불러. 디바이스로 연락이 안 돼서 찾으러 왔어.”
“학생회가? 알았어, 금방 갈게. 그럼 먼저 가 볼게요!”
독고미로가 성국언과 전무영에게 인사를 하는 사이, 한이는 짧게 묵례를 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한이는 성국언을 보고 떠오르는 게 있는지 생각에 잠겼다.
왜 독고미로가 갑자기 성국언을 따라 여기에 온 건지,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생각이 한이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때 그일. 그냥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설마…….’
초등학교 시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명을 쓸 뻔했지만, 국회의원의 개입으로 무사히 일이 해결된 적이 있었다.
보육원 사람들도, 한이도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