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퍼스트 크리스마스 (6)
안다인은 축제가 끝나고 크리스마스이브 전까지 용제건이 했던 말의 의미에 관해 조사했다.
조사라고 해서 거창하게 움직인 건 아니었다.
안다인은 도서관에 있는 역대 은광고 졸업 앨범을 살펴보고, 종합 게시판에서 용제건과 적대한 학생들에 관해 알아보았다.
그러다 보니 국회의원 성국언의 은광고 시절에 관해 알게 되었다.
성국언이 현역 0반에 못지않은 악동이었고, 담임이었던 교사가 용제건과 사이가 좋았다는 것.
그리고 그 담임은 현재 사망했다는 것까지.
‘그분의 사인은 병사. 상주는 용제건 선생님이라고 했어.’
안다인이 성국언과 같은 일을 겪는다고 생각해 봤다.
순간 저도 모르게 불합리한 분노가 용제건을 향했다.
상주를 설 정도면 여의보주의 기적으로 병을 낫게 했으면 좋을 텐데, 하고.
‘하지만 성국언 국회의원은 이번 축제에 용제건 선생님을 찾아와서 체스를 뒀어.’
시간이 흘러서 생각이 바뀐 걸까?
안다인의 입장이라면 설령 분노를 발산하는 것은 그만둔다 해도 귀중한 시간을 쪼개 용제건의 얼굴을 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안다인은 고민했다.
‘성국언 국회의원은 나처럼 ‘김신록 선생님은 신분을 바꾸고 있다.’라는 가설을 세운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척해야 할까.’
어쩌면 김신록의 제자 중 안다인이나 성국언 외에도 이 결론에 다다른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용제건은 마음에 드는 학생들을 상대로 힌트를 주는 듯했으니까, 총명한 은광고의 학생들 중 누군가는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신록의 비밀은 공공연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어쩌면 옛 제자들은 스승을 위해 모르는 척하는 걸지도 모른다.
“산타 옷 다 갈아입었음?”
그때, 문새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실에서 안내역을 맡은 당번 학생들은 산타 옷을 입기로 했는데, 안다인이 첫 당번을 맡게 되었다.
취재를 하러 온 문새론은 산타 옷을 입은 안다인의 사진을 찍고 갈 예정이다.
붉은 케이프 코트가 잘 어울린다고 수선을 떨며 사진을 몇 장 찍은 문새론이 말했다.
“님, 선도부분들도 산타 옷 입은 거 앎?”
“선도부가?”
선도부라는 말에 안다인은 주수혁을 가장 먼저 떠올랐다.
문새론이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같이 사진 찍기 딱 좋겠다. 그치? 와, 마침 눈도 내림요! 응? 뭔가 이상한데…….”
안다인도 눈을 보니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모처럼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했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곧 눈이 그치고,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용제건의 시안색 공간이 하늘을 가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크고 거대한 힘이라니!’
안다인은 우선 반 아이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문새론은 당장 취재하러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주수혁이 선도부로 자리를 비운 바람에 부반장으로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용제건 선생님은 교내에서 그동안 힘을 억누르고, 감추고 계셨어. 그걸 숨기지 않게 된 이유가 있을 거야.’
여의보주의 기적.
그리고 지금 은광고를 덮은 또 다른 기적.
마치 상위 존재가 개입했다 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현상이었다.
그러자 자연히 용제건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상위 존재가 되면, 어느 진족들로부터 신록이를 지켜 줬으면 해.
곧 도원우의 안내 방송이 들렸다.
은광고에 발생한 초유의 사태에 어느 불길한 생각이 안다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김신록 선생님은 작년에 에너미가 난입했을 때, 죽을 뻔하셨어!’
안다인은 1학년 건물 로비에 도착했다.
산타 복장 차림의 안다인의 등장에 잠시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는 학생들도 있었다.
긴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계속 멍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다인은 인원 점검을 하고 대피할 준비를 하는 학생 임원들 쪽으로 다가갔다.
“0반은? 걔들 넷인가 있지 않았나?”
“걔들 먼저 갔다. 아까 0반 부반장이 얘기 했는데, 먼저 길을 뚫겠대. 지도에 이동 예정 루트 표시해 줬어. 디바이스에 복사해 줄게.”
“무명의 초신성이 척후를 맡아 준다니 든든하네.”
인원 점검이 완료되고 대열을 구성했다.
출발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안다인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김신록이 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훈아, 인솔을 부탁해. 난 김신록 선생님을 찾으러 갈게.”
“혼자서 괜찮겠냐?”
“김신록 선생님과 같이 움직이면 전력은 충분해.”
“못 만나면?”
“그래도 문제없어.”
혼자 움직여도 전력상 문제없다는 말에 유상훈은 반박하지 않았다.
안다인이라면 포위당해도 어지간한 경우에는 자력으로 적을 섬멸하거나 탈출하는 게 가능했다.
이런 비상사태에 개인행동을 하는 건 권장하기는 어렵지만, 안다인이 이렇게 말하니 말리기 어려웠다.
“먼저 출발한다. 계속 합류 안 하면 찾으러 온다.”
“응, 고마워.”
1반 아이들이 안다인은 따로 행동한다는 말에 의아해했으나 김신록을 찾으러 간다는 말에 너도나도 응원의 말을 남겼다.
1학년 학생들이 출발한 후.
홀로 1학년 구역에 남은 안다인은 수색을 시작했다.
뒤뜰에 가까워졌을 때, 안다인은 결계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능파를 지우고, 은폐 스킬을 사용해 흔적을 지우려 했으나 안다인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이 너머에 뭔가가 있구나.’
안다인은 그 영역을 밟지 않고 기척을 죽이고 몸을 숨겼다.
스코프를 꺼내 이능파를 실어 창밖을 본 순간, 안다인은 우산을 쓴 진족들을 발견했다.
진족들은 권속으로 추정되는 에너미로 용제건을 포위하고 맹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용제건 선생님!’
용제건은 공간을 전개해 방어하고 있었지만,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용제건을 지탱해 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저분은…….’
낯선 사내는 붉은 비단 같은 머리카락으로 왼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안다인의 담임 선생님, 김신록처럼.
* * *
안다인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안다인이라면 유상훈과 함께 반 아이들을 이끌고 중앙 구역으로 향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김신록을 향한 안다인의 존경심을 얕봤구나!’
어쩌면 이건 용제건이 유도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작전 회의 날 1학년 1반 학생들의 행동 패턴을 추측했을 때, 용제건의 기분이 유독 좋아 보였으니까.
그럴싸한 미끼를 던져 두고 안다인을 유도했을 거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도 생각했지만, 막상 눈앞에 그게 벌어지니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안다인은 무사할 거다. 타이틀 히로인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믿자.’
유상훈은 내 표정을 살피다가 별다른 점을 못 찾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수상쩍어하는 것 같긴 했지만.
“흠…….”
지금은 싸우는 중이라고 느껴서 그런지 표정 관리가 잘되는 것 같다.
그 이후로도 두 번 에너미를 마주쳤으나, 수도 적었고 희귀도도 높지 않아 어려움 없이 깼다.
1학년 구역에서 출발한 학생들은 전원 무사히 중앙 구역에 도착했다.
중앙 구역에서는 한참 전투 중이었는데, 방어선을 유지하는 모습에 여유가 느껴져 1학년 학생들이 크게 안도했다.
“중앙 구역이다!”
“학생회관 쪽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나 봐.”
“학생회관이면 몇천 명을 수용할 수 있고, 내부에 식당도 있고, 방송도 할 수 있으니까 적절하네.”
도원우는 플마고에서처럼 중앙 구역에서도 학생회관을 사령부로 삼았다.
선도부회관, 총동아리회관은 비우고 폐쇄한 건지 문과 창문에 셔터가 굳게 내려가 있었고, 에너미들도 그 주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에너미들이 사람의 기척에 이끌려 학생회관을 향해 달려들면 요격대는 이에 대응해 에너미들을 토벌했다.
“1학년 애들이 도착했다!”
“눈에 띄는 부상자 없음. 학생회관 안으로 들여보내!”
요격대가 우리를 발견하고 사기를 높였다.
요격대는 중앙 구역에서 동아리 행사나 개인 부스를 준비하던 학생들, 학생회 멤버들 그리고 소수의 교직원들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2학년 구역에서 합류한 이들은 없는 것 같았다.
‘2학년은 아직이구나.’
넓은 은광고 부지에서 신입생이 헤매지 말라는 배려인 건지 1학년 구역은 중앙 구역에서 가장 가까웠다.
그러니 2학년보다 1학년이 먼저 도착하는 건 거리상 당연하긴 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1학년이라고 쉬게 할 수는 없어.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로테이션을 정해 에너미와 싸워야 해.”
학생회관 로비에서 도원우가 우리를 맞이했다.
“현재 넓은 범위로 발동 가능한 통찰계 스킬과 광림을 가진 학생을 뽑고 있다. 전황 파악을 위해 지원하도록.”
통찰계 스킬을 가진 학생은 몇 명 있었으나 은광고 부지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천동하급 능력자는 없었다.
내가 플레이어의 궤적을 발동하면 그 자리에 지원할 수 있긴 했지만, 이 자리에서 발을 묶일 수 없었다.
결국 여러 학생을 뽑아 여러 범위를 커버하기로 했는데, 지원자 중에는 문새론도 있었다.
도원우가 1학년 학생들 쪽을 둘러보다 물었다.
“안다인은?”
“담임 선생님과 합류할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도원우가 유상훈을 보며 물었지만, 유상희 사건으로 서로 데면데면할 것 같아 먼저 대답했다.
“……알았다.”
도원우는 학급 임원에게 배치도를 건넸다.
현재 1학년의 인원수에 맞춰 각 방향에 배치했다.
1번 출구에는 1학년 0반, 1반, 2반.
2번 출구에는 3반, 4반, 5반, 6반.
3번 출구에는 7반, 8반, 9반, 10반.
1반, 2반 학생 중에 등교자가 많아 1번 출구에는 적은 반이 편성되었다.
또, 1학년을 나눈 건 합동 수업을 진행한 경험이 있는 반끼리 묶은 후, 2, 3학년을 섞어 요격대를 편성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 같다.
“가끔 1, 2반 분들이랑 합동 수업을 해서 이능을 아는 분이 있어요.”
“우람이랑 레나는 먼저 도착한 것 같아요!”
“중앙 구역에 있으니까 먼저 온 거구나.”
학생회관 1번 출구 쪽으로 이동하며 배정된 이들의 명단을 확인했다.
먼저 도착한 이들도 표시되어 있었는데, 이름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걸음을 서두르게 되었다.
‘……예상보다 빨리 왔어! 그 상황이 빨리 올 가능성이 있어.’
내가 걷는 템포가 빨라져서 그런지 유상훈도 걸음을 빨리했다.
손에는 계속 듀얼링 실드를 들고 있었다.
맹효돈도 덩달아 걸음을 빨리하며 보호대를 착용한 손을 풀었다.
1번 출구 쪽으로 이어지는 연결통로에 도착했을 때였다.
콰아아앙!
“레나!”
폭발음에 묻혔지만, 목우람이 권레나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서포트조는 후방에 서. 이동 중에 이능파를 소모한 사람은 학생회관 안에 있어!”
그렇게 외치고 이능총의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며 달려 나갔다.
자동문을 몇 개 통과하자 학생회관 1번 출구 쪽 참상이 보였다.
에너미들과 싸우며 방어선을 유지하는 중인 학생들.
방어선 안쪽에서 쌍검을 들고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산타 옷을 입은 주수혁.
광림 ‘100초의 은총’을 발동해 몸을 회복시키는 중인 곽경구.
채찍을 놓친 권레나.
그 앞을 도끼를 들고 막아선 목우람.
그리고 자줏빛으로 변한 오른팔을 휘두르고 있는 방윤섭이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