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퍼스트 크리스마스 (13)
공청훤의 합류, 학생회관 쪽으로 피난 온 은광고인들의 협력 등으로 1번 출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산발적으로 에너미가 발생하고 있어 경계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또 진족이 권속들을 대거 이끌고 습격해 오지 않는 이상 방어를 유지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2학년 선배님들이 안 오시네…….”
“다른 출구 쪽에 배정된 거 아냐?”
“한 명도 안 오는 건 이상해. 아직 도착 못 했나 봐.”
시간이 지나니 슬슬 2학년 이야기가 나왔다.
1번 출구 쪽 지휘를 맡고 있는 곽경구가 가끔 2학년 구역 쪽을 보는 게,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예상대로라면 염준열을 노리는 이들이 움직였을 테니, 2학년 선배들이 학생회관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다.
‘지금쯤이면 촉룡과 제갈재걸이 2학년과 합류했겠지.’
크리스마스에는 부장급 교사가 전원 자리를 비울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원 자리를 비우는 사태는 막아야 했다.
특히 마족에게 유효한 언령을 사용하는 제갈재걸은 은광고에 남기고 싶었다.
비록 내가 제갈재걸의 이능을 사용하는 장면이 담긴 ‘눈’이 인비디우스의 사제에게 넘어갔지만, 그 사제가 정보 공유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힘을 쓸 방윤섭 쪽에는 공청훤을, 다른 쪽에는 제갈재걸을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흑막이 노릴 상대 중 하나인 염준열 쪽에 제갈재걸을 배치했다.
염준열 본인도 강하고, 2학년 학생들과 움직일 테니 만반의 준비를 했을 거다.
제갈재걸도 담당하고 있는 0반이 걱정될 테니 그쪽으로 가게 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뒤늦게 정보 공유를 할 가능성이 있으니 수를 하나 더 준비해 뒀지.’
그래서 제갈재걸의 옆에 촉룡을 배치했다.
원래 그 자리에는 다른 용족이나 붉은 사자 멤버 중 하나를 배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반도에 오래 머무르고 있는 용족과 한국 4대 플레이어 팀 중 하나인 붉은 사자 팀 멤버는 얼굴이 너무 알려져 있다.
그러니 우산을 씌우는 것만으로는 눈속임하기 어려웠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용왕신의 무녀 중에 있는 배신자가 알아챌 가능성이 있었다.
‘염준열 옆에 청룡이나 염방열을 두면 안전하겠지만, 그렇게 하면 적도 경계하고 다른 수를 두겠지.’
그래서 수를 고르는 데에 고민이 많았는데, 마침 촉룡이 돌아왔다.
촉룡은 한반도를 오래도록 비웠고, 방랑벽이 있어 공적인 자리에 그다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플마고에서 청룡과 나란히 서서 싸웠을 만큼 강하고, 염준열을 아낀다.
게다가 방랑벽이 있어서 갑자기 자리를 비운다 해도 용왕신의 무녀들이 경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용제건을 경유해 촉룡을 움직였다.
촉룡 쪽은 쉽게 해결되었으나 부장 교사 쪽 문제를 해결하는 건 조금 까다로웠다.
―조의신, 너도 알다시피 은광고의 부장급 교사들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셋 다 국제 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플레이어들이지.
황지호가 작전 회의 중에 굳이 저런 말을 꺼냈을 정도다.
셋을 해외 출장에서 빼는 건 어렵고, 대체할 플레이어를 찾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언령을 쓰는 제갈재걸은 반드시 은광고에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수를 준비했다.
―부장 선생님을 대신해서 참가해도 다른 데에서 트집을 절대 못 잡을 선생님이 계셔.
―일단 이사장인 이 몸이 가면 절대 트집을 못 잡겠지.
―…….
그야 그렇긴 한데, 황지호가 괜한 헛소리를 해서 굳이 답변하지는 않았다.
이사장 정도는 아니지만, 그만큼 우리 학교에서 큰 상징성을 가진 사람의 이름을 댔다.
―그 자리에는 황보윤 교장 선생님을 보내자.
은광고의 교장 황보윤.
괴짜 책 수집가로, 외부 활동은 최소한으로 하여 얼굴이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은광고 학생들은 교장의 얼굴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중성적인 이름을 가진 황보윤의 성별을 헷갈려 하는 학생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황보윤이 은광고의 교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교장이 은광고를 대표해서 몸소 간다면, 부장 교사들이 없는 걸 아무도 트집 잡지 못할 거다.
―교장을 보낸다고? 조의신, 교장이 그런 눈에 띄는 자리에 가려 하지 않을 거다.
―내가 직접 말씀드릴게.
―……조의신, 저번에 네가 직접 교장실에 방문한 적이 있었지.
황지호는 내 말을 듣곤 몹시 수상쩍어했다.
황보윤 교장은 평소 학생과 교류가 없으니 저렇게 이상하게 여겨도 어쩔 수 없긴 했다.
어차피 황지호가 나를 수상히 여기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뻔뻔하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의신이 형은 몸가짐이 발라서 연장자분들의 호감을 잘 사죠. 은광고의 교장도 그런 게 아닐까요? 황호 님도 잘 아실 텐데요.
―나도 일단 조의신에 비해서는 연장자인데…….
은호의 말에 노친네가 납득이 갈듯 말듯 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평소에 어르신들께 예의를 잘 지키는 건 알아도 노친네한테는 안 지켜서 저러는 걸까?
저놈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아주 잘 알고 있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편하게 대하라고 한 건 황지호다.
―제갈재걸을 학교 내에서 편히 움직이게 하려면 나름의 준비를 해야겠네요. 제갈재걸을 납득시킬 핑계도 필요하고, 마족의 눈을 속일 준비도 필요하겠죠.
은호가 화제를 바꾸어 나도 이에 편승했다.
은호가 지적한 부분에 대비해 나도 몇 가지 수를 준비했는데, 은호의 제안이 더 좋아 보였다.
―은광고는 크리스마스 자선 이벤트를 개최할 예정이죠. 제갈재걸이 담당한 2학년 0반에서는 행사를 할 예정이고요. 거기에 편승해서 제갈재걸을 숨기죠.
―생각이 있나 보군. 말해 봐라.
―손을 풀 겸, 은신용 아이템을 만들게요. 겉보기에는 크리스마스 자선 이벤트용으로 보일 만한 디자인으로요.
제갈재걸은 언령으로 은신을 사용할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은신을 사용하라고 하면 제갈재걸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고, 제갈재걸의 이능파가 남아나질 않을 거다.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어울릴 만한 인형 옷을 만들게요. 동하 형한테 들었는데, 마침 선도부에서는 산타나 순록을 모티브로 한 의상을 입는다 하네요.
―출장에 빠지는 대신 학생들을 놀래켜 줄 겸 인형 옷을 입고 숨어 있다가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참가하라는 건가?
―네, 제갈재걸은 축제 내내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과 많이 놀아 주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학생 핑계를 대면 절대 거절하지 못하겠죠.
제갈재걸은 축제 기간 내내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준비한 ‘제갈재걸 선생님 3D 화보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 했다.
제자들이 저리 좋아하니 행사를 중단시키지는 못했으나 민망한 마음에 제갈재걸은 축제 내내 도망 다녔다.
아마 한 번은 들렀겠지만, 사람이 없을 시각에 아주 잠깐만 머무르다가 자리를 피했을 거다.
홍규빈도 2학년 0반 행사에 제갈재걸이 없다는 점을 지적할 정도였다.
―인형 옷을 입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얼굴과 체형을 숨길 수 있죠. 이능파가 새어 나오지 않게 제가 직접 손을 보면 높은 레벨의 스킬을 쓰지 않는 한, 그 안에 제갈재걸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할 거예요.
결과적으로 은호의 제안을 수락했다.
제갈재걸은 인형 옷을 입고, 손주를 보러 왔다는 촉룡과 함께 2학년 일행과 합류할 것이다.
한편, 은호가 인형 옷을 만든다는 말에 호랑이들은 동의하면서도 어딘가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은호, 괜찮겠나? 너는 인형 옷 외에도 만들어야 하는 게 있을 텐데.
―괜찮아요. 늦지 않게 준비할게요.
황지호의 말에 은호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은호는 인형 옷 외에도 제작 중인 아이템이 있는 듯했다.
황지호는 은호의 대답에 불만스러운 눈치였는데, 백호군도 마찬가지였는 듯 입을 열었다.
―완성 여부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황호는 네 몸이 괜찮을지 묻는 거다.
백호군의 말에 황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백호의 말대로다. 크리스마스에는 너도 직접 움직일 예정이지 않나. 아이템 제작으로 이능파를 소모하고, 또 밖에서 움직이면 지치지 않겠느냐.
황지호의 말대로였다.
은호가 그동안 정양했다고 하나 오랜 시간 잠들었다가 일어난 상태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아이템 제작에 매달리다가 저택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걱정이 되는 게 당연했다.
천은하의 모습을 한 은호는 아직 고등학생도 안 된 어린 후배의 외양이라 나도 내심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은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황호 님의 저택에서 모습을 숨기고, 몸을 사리는 이유는 필요할 때 저를 사용하기 위함이에요. 제 안위를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은호의 의지는 확고했다.
백호군이나 황지호도 말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지금이죠. 저는 크리스마스 때 신역에 닥칠 위기에 맞서서 제가 해야 할 일을 전부 수행할 거예요.
지금쯤 은호도 움직이고 있을 거다.
‘나도 이제 다음 수를 두기 위해 이동해야 하는데.’
슬슬 자리를 비우기 위해 틈을 보려 했지만, 유상훈과 맹효돈이 계속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1번 출구에서는 곽경구가 짠 조에 맞춰서 함께 행동하게 되었는데, 하필 저 둘과 같은 조가 되어 버려 도망치기 매우 곤란했다.
드디어 쉬는 시간을 맞이해 탈출할 타이밍이 되었으나 이번에는 공청훤에게 잡히고 말았다.
“의신 학생,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공청훤은 평소대로 선량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 앞에 있자니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공청훤 입장에서 보면 혼란의 연속일 듯했다.
보육원 행사에 참가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적호가 나타나 은광고로 부르더니 나를 찾으라고 한다.
나를 찾는 사이 은광고의 상태는 이상해지고 에너미와 진족이 출몰해 학생들을 공격한다.
긴급한 상황이다 보니 일단 싸웠지만, 의문이 많을 거다.
공청훤은 내게 할 말이 많아 보였다.
* * *
1학년 구역, 교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뒤뜰.
학생들이 전부 대피한 이곳은 현재 웅족들과 그 권속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이 포위한 중앙, 용제건이 부른 공간이 있었다.
카앙! 카아앙!
김신록은 부수어지는 시안색의 공간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공간 너머에서 김신록이 시험 삼아 무기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하려 했지만 되지 않았고, 스킬 사용도 되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것들은 전부 웅족뿐이었다.
김신록의 어깨를 빌려 몸을 지탱하는 중인 용제건이 그 광경을 보다가 실없는 소리를 했다.
“신록이가 못 싸우는 거 보니까 저기에 있는 건 다 웅족인가 보다.”
“말 좀 그만해.”
김신록이 핀잔을 주자마자 용제건이 ‘콜록’ 하고 작게 기침을 뱉었다.
그러자 김신록의 어깨에 더운 숨과 함께 피 냄새가 훅 끼얹어졌다.
김신록이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어깨가 용제건이 토한 피로 흥건했다.
쩌저적!
그 순간 용제건이 부른 공간이 깨졌다.
금이 간 시안색의 공간 틈을 번민의 곰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용왕신의 총아도 여기까지인가.”
번민의 곰은 직접 손을 쓸 생각이 없는지 부리고 있는 수하 중 하나를 선장(禅杖)으로 가리켰다.
번민의 곰이 지목한 건 얇은 양날칼을 든 여성 웅족이었다.
“먼저 호족의 후예부터 죽여라.”
“네.”
여성 웅족이 우산을 접고 양날칼을 휘둘러 용제건의 남은 공간을 깨 버리려 할 때.
공간 앞에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번개가 번쩍였다.
적호였다.
“적호가 나타나리라 예상했지. 수련회를 한 석모도에서도 같이 있었잖아?”
그러나 안개 사이로 적호가 나타난 걸 보고도 웅족은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망한 듯이 말했다.
“같은 수를 두다니 실망이군.”
번민의 곰이 선장으로 주술을 사용하던 남성 웅족을 가리키자, 주술사가 땅을 짚으며 이능파를 흘려 넣었다.
콰콰콰콰!
그 순간, 물푸레나무로 만든 거대한 덫, ‘호랑이 창애’가 적호를 덮쳤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