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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20화 (616/925)

83. 학교 밖 (14)

은광고 서문 주변.

돈족이 부린 권속과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계로 혼란에 빠진 직후.

대체 어디에 숨어 있던 건지, 짧은 망토 차림의 플레이어들이 대거 등장해 사태를 수습했다.

플레이어들이 착용한 망토의 표면에는 ‘E’와 ‘L’이 바이올린 모양으로 형상화되어 새겨져 있었다.

팀 로고를 알아본 일반 관람객들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E와 L은 ‘Eternal Lake’의 약자로, 지금 등장한 프로 플레이어 팀은 권제인을 필두로 한 영원의 호수였다.

‘습격 예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권제인은 푸른 눈으로 지그시 스파크가 일어난 결계 너머의 은광고를 응시했다.

점점 결계가 불투명해지는 바람에 그 모습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권제인의 눈에는 저 너머에서 놀랐을 조카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제인아, 지시를.”

재러드 리의 말에 권제인이 냉정을 되찾았다.

지금 권제인은 권레나의 스승이나 가족이 아니라, 팀 마스터로서 행동해야 했다.

권제인은 걱정을 마음속 깊이 감추었다.

“사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에너미를 먼저 토벌하자.”

권제인이 결계를 무력화시키려는 에너미들을 가리켰다.

동결형 이계 쪽도 걱정되었으나 습격 건을 전달받을 당시, 조의신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에너미의 습격과 동시에 동결형 이계가 발생할 거예요. 이능독을 품고 있으니 이계 공략은 나중으로 미루고 에너미를 먼저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공략은? 이계가 활성화되니까 내버려 둘 수 없는데.

그러자 조의신은 약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녹족의 문양인 사슴뿔 마크가 박혀 있었다.

조의신이 건네는 걸 보면 그는 녹족과도 연이 있는 듯했다.

호족을 경유해서 약 봉투를 전달받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배타적인 호족이 녹족에 관해 모르는 사람을 통해 이걸 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조의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능독의 해독제입니다.

―해독제가 나왔구나. 하지만 처음부터 먹으라고 하지 않는 걸 보니 부작용이 있나 봐.

권제인의 예상대로 이능독의 해독제에는 부작용이 있는 듯했다.

부작용에 관해 말하는 조의신의 얼굴이 조금 어두웠다.

―부작용이 있어요. 초기 버전에 비해 완화되긴 했지만, 약효가 도는 동안 지속적으로 내장이 손상될 거예요. 회복 아이템과 동시에 사용해야 하니 감당할 수 있는 분만 복용하셔야 해요.

이능독에 중독되면 이능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플레이어의 경우 이능파의 영향을 받는 신체에도 지장이 생긴다.

에너미와의 전투 중에 이능과 내장,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플레이어들은 누구나 이능을 택할 것이다.

권제인은 조의신을 달래듯이 말했다.

―그 정도는 각오가 되어 있고, 감당할 힘도 있어.

―……네.

툭 던진 말의 내용은 달랜다기보다는 자만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으나, 조의신은 권제인의 뜻을 이해했는지 다소 편안해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부작용에 관해서 물을게.

권제인은 조의신에게 그 내장 손상 정도에 관해 질문을 몇 개 던졌다.

조의신은 사전에 철저하게 확인했는지, 일반인, 진족, 플레이어 등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를 읊었다.

그런 결과를 잘 알고 있는 걸 보니 사전에 장기간에 걸쳐 해독제를 실험해 본 것 같았다.

내용을 잘 들어보니 에너미나 실험동물이 아닌, 진족이나 인간을 대상으로 한 듯했다.

‘해독제를 여러 번 실험해 개량했구나. 누구에게 한 걸까. 실험체는 녹족이 직접 구한 게 아니라 호족이 제공했을 것 같아.’

권제인은 잠시 궁금해하긴 했지만, 굳이 질문을 던질 정도로 관심이 생기지 않았기에 묻지는 않았다.

조의신의 말이 길어지자 권제인은 그런 의문을 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다.

호족의 심기를 거슬러 어둠에 묻힌 후 실험체들이 된 자들에게 관심을 오래 둘 만큼 권제인은 호기심이 많지 않았다.

권제인의 잠시 예상한 대로 이능독 해독제의 시험 대상은 호족의 고문을 받은 웅족, 악행을 저지르다 호족에 의해 사회적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었다.

녹족의 수장 향록은 광범위한 실험 데이터를 원했고, 호족의 수장 황호는 실험체로 내민 이들이 고통받기를 원했기에 이해가 일치했다.

향록은 겉보기나 말투에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구석이 있어 실험체들은 향록을 잘 구슬리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착각했고, 향록은 그 사실을 이용해 많은 대화를 나누며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지성이 있는 실험체는 말을 할 수 있는 게 장점이야!’

……라고 향록이 입버릇처럼 떠들어 댔지만, 실험체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실험체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향록은 아주 주의 깊게 그들의 목소리에 기울이고 관심을 줬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반응하는 실험체들에겐 더욱 다양한 실험을 해서 많은 피드백을 얻어 냈다.

그렇게 향록은 실험체들을 알뜰살뜰 활용해 마음껏 데이터를 뜯어냈다.

그 실험 덕에 권제인은 해독제의 부작용 범위에 관해 소상히 알 수 있었다.

―나랑 재러드, 간부들은 먹을 수 있을 거야.

조의신의 말을 들은 후, 권제인은 팀원들의 능력을 고려해 결론을 내렸다.

아직 해독제는 대량 생산이 어려운 건지 양이 충분하지 않았으나 다행히 권제인이 선정한 이들은 전부 해독제를 소지할 수 있었다.

권제인은 해독제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후,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해독제가 있는데도 왜 이계 공략을 미루라고 한 거야?

―각 출입구 근처에 있는 동결형 이계가 활성화된 후 발생한 이능독을 이용해서 흑막이 ‘어떤 짓’을 할 거예요.

―그게 무슨 짓인데?

―독기와 냉기를 이용해 은광고의 결계를 얼려 버릴 거예요.

은광고의 결계를 얼려 버린다니.

권제인이 푸른 눈을 크게 떴다.

이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권레나는 저 안에 남는다.

얼어붙은 학교 안에서 권레나가 어떻게 될지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하지만, 레나만을 구하는 건…….’

권제인은 당연히 권레나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권레나를 피신시키고 나면 그녀의 친구들인 1학년 0반 아이들을 또 빼내고 싶어질 거다.

그뿐만이 아니라 명예교사직을 하며 가까워진 현악부원, 담당 고문 등도 안전한 곳으로 유도하고 싶어질 게 뻔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어.’

한때 권제인은 권레나를 안전한 곳에 둔다고 그녀를 홀로 한반도에 맡겼었다.

그 결과 권레나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일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권레나는 영원의 호수가 마주쳐야 했던 위협으로부터는 안전했지만, 행복하지는 못했다.

이번 일은 상황이 다르긴 했지만, 권제인은 또 비슷한 판단을 하여 권레나만을 빼돌린다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권제인의 갈등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조의신은 계속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되면 활성화된 동결형 이계에 남은 이능독이 옅어지거나 사라지겠죠. 그때 공략을 개시해 주세요.

―……의신이 너는 안에 남는다고 했지.

조의신은 지나치게 침착해 보였다.

권제인은 조의신이 반 친구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 뒤에서 얼마나 열심히 활약하고 있는지도.

하지만 은광고에 닥친 위기를 두고도 조의신은 그 친구들만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거나, 피신시킨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네.

조의신은 안에 남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조의신은 학교 안에서 저 거대한 위험과 맞서 싸울 생각인데, 권제인은 그 앞에서 차마 약한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권제인은 조의신의 제안에 모두 응해 이 자리에 왔다.

권제인은 현재 서문을 습격한 에너미의 숫자, 동결형 이계의 확장 속도를 고려해 판단을 내렸다.

“이 정도면 내가 광림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파앗!

권제인의 손에서 푸른 바이올린과 활이 실체화되었다.

권제인을 뒤따라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실체화시켰다.

권제인 주변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이능 악기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레나가 걱정되니까 광림을 쓸래.”

권제인의 밝은 목소리에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화색을 보였다.

권제인의 이능은 보통 연주로 발현되기에 그녀의 감성, 컨디션에 따라 이능의 강도가 크게 좌우되었다.

권레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커 컨디션이 저조할 가능성도 생각했는데, 마음을 굳게 먹은 건지 상태가 좋아 보였다.

재러드 리도 덩달아 밝게 말했다.

“응, 제인이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무슨 곡을 연주할까?”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캐롤을.”

“알았어! 그러면 먼저 물을 준비할까. 안은 모르겠지만, 밖은 너무 건조한데.”

재러드 리의 손에 아이템 카드 수십 장이 들렸다.

아이템 카드의 희귀도 자체는 낮았으나, 지금처럼 물이 없는 지역에서 권제인의 이능을 발동시킬 때에는 필수 아이템에 해당했다.

아이템 카드가 품고 있는 건 바로 ‘물’.

이능을 통해 고착화시킨 후, 카드로 변환한 물이었다.

파아앗! 솨아아아아……!

재러드 리가 아이템 카드에 이능파를 실어 허공에 멀리 던지자 수십 톤에 달하는 물이 실체화되었다.

아이템 카드로부터 막 실체화한 물이 허공에서 쏟아지기 전에, 권제인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결계와 에너미의 충돌로 퍼지는 스파크 소리, 도망치는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들이 바이올린 소리에 묻혀 사라져 갔다.

파아아아…….

그러자 그저 쏟아지려는 물이, 권제인의 연주에 반응해 물방울 하나하나가 노래하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권제인의 광림, ‘수면의 요영(謠詠)’이 발동해 물 덩어리는 하나가 되어 춤을 추었다.

권제인이 연주하는 밝은 캐롤에 맞춰 영원의 호수 팀원들의 연주도 이어졌다.

그러자 물 덩어리는 주변의 수증기를 흡수한 듯 더욱 몸을 불리고 커졌다.

“순록이다!”

“……루돌프?”

도망치던 사람들이 거대한 물의 순록을 보고 감탄했다.

권제인이 연주하는 캐롤의 가사대로 거대한 순록의 형상이 된 물 덩어리가 에너미를 향해 달려갔다.

거대한 순록의 발굽이 돈족이 부른 에너미를 짓밟고, 뒤늦게 순록의 존재를 알아챈 에너미가 공격해 봤지만, 순록의 뿔에서 뿜어져 나온 물기둥에 몸을 꿰뚫렸다.

‘레나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으면 했는데, 이 곡은 레나와 연주하려 했는데…….’

이 에너미를 전부 쓰러뜨리고, 이계를 공략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냈으면 하는 권제인의 마음이 물의 순록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연주하는 캐롤이 끝나 갈 때쯤에는 돈족이 부른 에너미는 거의 사라져 있었다.

돈족 중 하나가 연주 중인 권제인이 무방비한 상태라 판단하고 기습을 시도하긴 했으나, 재러드 리에 의해 역습을 당하고 순록의 발굽에 짓밟혔다.

그렇게 동결형 이계를 제외하고 서문의 상황은 종결되는 것 같았다.

‘이제 의신이가 말한 상황이 발생한 후에 이계 공략을 개시하면 될…… 아!’

그때 권제인의 사고가 뚝 끊겼다.

권제인의 시야 한구석에 나비가 보였다.

이 계절에 있을 리가 없는 나비의 존재는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나비!’

나비의 존재를 알아챈 건 아직까지는 권제인 하나뿐인 듯했다.

나비는 권제인의 시야 한구석에 머물다가 어디론가 날아갔다.

마치 경고를 하듯 날갯짓한 나비가 사라진 곳은 천익산과 이어지는 대나무 숲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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